소설리스트

그림자 무사의 귀환-92화 (92/114)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니 그 동안 내가 익혔던 모든 무공들보다 조금 더 자유로운 형태의 새로운 초식들이 탄생했다.

'내 몸에서 이런 움직임이 나오다니 신기하네. 의식적으로 이런 동작을 하려면 불편했을텐데 자유롭게 나오다보니 물 흐르듯 모든 게 이어지고 자연스럽구나.'

그 동안 익힌 무공들이 원래부터 하나의 무공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섞여나왔다.

그러다가 오독교 제자로부터 연화 소저를 구하기 위해 신체 움직임의 한계를 넘어섰던 동작, 그 동작과 비슷한 동작도 나오는 모든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몸 속에서도 끊임없이 맑은 기가 솟구치고 움직임 또한 전보다 배는 빨라진 것 같은데..설마 이게 화경의 경지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초일류에서 절정의 경지로 올라갈 때와 절정에서 초절정 경지로 올라섰을 때의 느낌과는 많이 달랐다.

그 때는 확연히 전의 경지와 차이가 느껴졌고 실제로도 초절정고수 일때는 절정고수 두 세명쯤은 상대가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의 경지가 화경이라면 초절정 고수 두 세명은 상대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두명까지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중간 중간 연결의 흐름이 살짝 끊기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내가 익힌 무공의 수가 적기 때문에 다양한 동작이 나오기 어려워서 인 듯 했다.

'분명 한 단계 올라선 건 맞는데 화경까지는 아닌 것 같고, 초절정의 끝자락에 도달한 듯 하군. 길은 찾았으니 조금 더 앞으로 나가다보면 곧 화경 경지를 밟을 수 있겠어.'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자 통제를 벗어났던 기의 움직임도 잦아들고 몸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하늘에서 정한 인연

"짝짝짝"

"무영 소협, 정말 대단한 움직임이었어요. 오독교 사람들과 싸울 때보다 더 빠르고 움직임도 간결해진 느낌이에요."

나의 움직임을 보고 연화 소저가 박수를 치며 연신 감탄을 하고 있었다.

영경도 마찬가지도 감탄하며 말했다.

"훌륭해. 정말 멋진 움직임이었어. 무영이 넌 우리가 짐을 싸고 오는 그 짧은 시간, 그 사이에 더 발전했네."

"태산 전경을 바라보다가 압도되면서 작은 깨달음이 있었어."

"작은 깨달음? 방금 그건 초절정 경지를 넘어선 움직임 아니었어?"

"아니. 아직은 조금 부족해. 화경의 움직임은 내 의념에 의해 끊임없이 동작이 나와야 하는데..아직 내가 이 움직임을 의념으로 통제할 수 없고, 또 내가 여러 무공을 익히지 않아서인지 움직임이 다양하게 나오지 않아."

"와, 그 정도로도 충분히 대단한데..그 정도로는 화경의 경지가 아니라니.."

'그 때 대장이 황궁 무고를 구경하라고 했을 때 들어가서 몇 가지 무공 만이라도 더 익혔으면 오늘의 깨달음으로 화경의 경지에 도달했었을 지도 모르겠군. 황궁에 갈 기회가 있다면 황궁 무고도 들려 봐야겠어.'

"화경에 근접한 것만 해도 십대고수급은 될 거에요. 무영 소협 나이에 우리 사부님과 같은 반열이라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본인의 무공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도 되요."

연화 소저의 말에 마음 속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피어올랐다.

전생에서는 그림자 무사가 되기 위해.

황궁에서는 황녀님을 잘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수련 했던 무공.

초절정 고수가 되었지만 어둠 속에서 살다가 죽어간 고수.

그게 전생의 나였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고수가 되고 다시 만난 황녀님에게 인정을 받으니 울컥하는 감정이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나의 울컥한 표정을 본 영경이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하는지 웃으며 말을 했다.

"그럼 우리 두 여인을 십대고수급 무사님이 호위를 하고 가는 건가? 엄청난 호사를 누리겠는데.. 호호."

나도 일부러 영경의 말에 맞춰주며 말을 했다.

"두 미녀 분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가 광동성까지 안전하게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말이 흡족했는지 두 사람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잘 부탁해요. 무사님."

우리 세 사람은 곧장 태산을 내려와 광동성으로 향했다.

태산에서 광동성으로 가는 길은 안휘성과 강서성을 지나야 했다.

한참을 경공을 쓰며 가다 보니 날이 어두워 질 때 쯤에는 안휘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안휘성에는 남궁 세가와 제갈 세가 위치해서 그들의 상황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 두 세가는 오대 세가에 속해 있는 세가인 만큼 문제를 스스로 잘 해결 했으리라 생각하고 객잔에서 하룻밤만 자고 바로 떠나려 했다.

안휘 객잔.

안휘성 안쪽에 있는 객잔으로 꽤나 많은 사람들이 찾는 객잔이었다.

객잔 안에는 많은 이들이 술과 음식을 먹으며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그 중에는 무림인들도 많이 있어서 자연스레 남궁 세가와 제갈 세가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자네는 들었는가? 남궁 세가와 제갈 세가가 오늘 봉문을 선언했다는데.."

"나도 오전에 전해 듣기는 들었는데.. 믿기가 힘들어서 아까 오후에 남궁 세가와 제갈 세가 입구에 가 봤더니 참말로 정문에 떡 하니 봉문이란 글자가 붙어 있더구만."

우리들은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며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

"정문에 봉문이란 글자가 붙은 걸 확인했다면 사실이란 말인데..어떻게 오대 세가 중에 두 곳이나 동시에 봉문에 들어가다니.."

나의 말에 영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림 문파들에 생긴 문제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것 같은데.. 무림이 엄청난 혼란에 빠질 수도 있겠어."

영경의 말에 연화 소저가 말을 이어 받았다.

"사매 말처럼 이번 일은 보통 일이 아닌 건 분명해 보여요. 우리도 그들을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내일 남궁 세가나 제갈 세가에 방문해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도록 하죠."

나의 말에 영경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그들은 봉문에 들어갔는데 우리를 만나 줄까?"

"공식적인 방문은 불가능 하겠지만 몰래 들어가면 그들을 만날 수는 있겠지."

"남궁 세가의 담을 넘자는 말이지? 그들이 과연 우리를 반갑게 맞아 줄까?"

"당연히 우리의 방문을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남궁 세가에 아는 사람이 있으니 그를 만난다면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있겠지."

내가 남궁 세가에 아는 사람이 있다니 궁금해하며 물었다.

"아는 사람이 누군데?"

"남궁수혁이라고 내당 당주야."

"네가 그 사람을 어떻게 아는 거야?"

"비무행 때 남궁 세가의 사람을 두 명 상대했거든. 그 중 한 명이야."

"아.. 그 비무행 때.. 그런데 너와 대결했던 상대면 좋은 사이는 아니지 않나?"

나는 영경의 말에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번에 태산에서 오독교 때문에 위급했을 때 내가 자신을 구해줬다고 나중에 은혜를 갚는다고 했으니까 모른 척 하지는 않을 거야."

"오! 이번에 제대로 무림의 유명 인사가 되어서 네 인맥이 엄청나졌네."

우리는 객잔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각자의 방에 올라가 휴식을 취하며 내일 아침에 만나기로 했다.

방에 들어온 지 반시진 쯤 지났을 때 나는 침상에 누워 잠을 자기 전에 남궁 세가와 제갈 세가가 봉문한 이유가 무엇일까 고민 중이었다.

'남궁 세가와 제갈 세가의 봉문은 같은 문제인 것 같은데..그 이유가 무엇일까? 단지 문파 사람들이 중독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봉문까지 선택했을까?'

"똑똑똑."

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상념에 깨며 말했다.

"누구시죠?"

"저 연화에요.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나는 연화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네! 들어오세요."

방문이 열리고 그녀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도 객잔에서 같이 저녁까지 먹었는데도 방에 단둘이 있으니 나도 역시 긴장이 되었다.

"영경 사매에게 들으니 소협이 무경원 시절부터 절 알고 있었다던데.. 그게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주시겠어요?"

연화 소저의 말을 듣고 때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전생에서 내가 그림자 무사로 황녀님을 지켰었고 서로가 좋아했었다는 나의 말을 연화 소저가 과연 그대로 믿어줄까?'

"제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전 황녀님을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이요?"

"네. 믿기 힘드시겠지만 전생에 황녀님을 지키는 그림자 무사였습니다."

"......"

나의 말에 연화 소저가 순간 멈칫하더니 침묵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나조차도 믿기 힘든 상황이었는데..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그냥 믿을 리가 없지.'

"믿어요."

"네? 정말 제 말을 믿는다고요? "

연화 소저의 말에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네. 믿어요. 무영 소협이 날 지켜 주었다는 걸. "

'소저의 얼굴 표정을 보면 진짜 믿는 것 같은데.. 어떻게 내 말을 믿을 수가 있는거지?'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이냐 묻지도 않고 그냥 믿는다고요?"

그러자 연화 소저가 환하며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전에 내가 무영 소협과 닮은 사람이 있다고 했던 적이 있었는데 기억해요? "

"네. 기억하죠.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연화 소저를 기억하지 못 할 것 같아서 만나기 두렵다고 했었죠."

"제 말을 기억하고 있었네요. 호호. 그 분을 드디어 태산에서 만났어요."

연화 소저의 말에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들며 그녀의 이어질 말을 듣기가 두려워졌다.

'그 때의 연화 소저의 모습은 그 분을 많이 연모하는 듯 했는데..'

"아! 만났군요. 소저가 무척 만나고 싶어했는데 잘 되었네요. 그 분은 소저를 기억하고 계시던가요?"

"처음에 봤을 때는 그 분이 절 기억하는 건지 아닌건지 몰랐는데..그때도 저는 왠지 그분이 절 기억하실 거라고 믿었어요.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되었어요. 그 분도 절 기억하고 계셨다는 걸."

그를 떠올리며 말하며 너무나 밝은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아프지만 그에게 보내야 할 것 같았다.

'연화 소저가 그 사람을 떠올리며 말할 때 내가 본 그 어느 때보다 밝은 미소를 짓는구나.. 그녀는 그를 아주 많이 연모하는 게 분명하다. 그녀의 행복을 위해 보내주는 게 맞다.'

"소저가 그 분을 떠올리며 행복한 표정을 지으시는 걸 보니 정말 좋은 분인가 보네요."

"네. 정말 좋은 분이에요. 오랫동안 절 잊지 않고 찾으셨던 걸 보면..이제 저도 그 분에게 말해야 할 거 같아요."

'예상했던 소저의 말이지만 마음이 씁쓸해 지는 건 어쩔 수 없구나. 난 웃으며 그녀를 보내줘야 할까?'

"네. 소저가 좋은 분을 만나서 다행이에요."

"그 분이.."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우리는 대화를 멈추고 방문을 바라보았다.

"무영아, 나 영경이야. 들어가도 돼?"

'갑자기 영경이가 내 방으로 찾아오다니.. 밤중에 방에서 연화 소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난 검지 손가락을 내 입술에 대면서 연화 소저에 조용히 해달라는 신호를 보내고 문을 열고 들어오려는 영경을 막고 그녀에게 말했다.

"나 지금 자려고 누웠었다가 네가 문을 두드려서 일어났어. 이 시간에 왠일이야?"

"뭐? 벌써 자려고? 술 한잔 하면서 이야기나 나누려 했는데."

"오늘은 조금 피곤해서.. 술은 내일 저녁에 먹도록 하자."

"알겠어. 어쩔 수 없지. 너 대신 연화 사저에게나 가서 물어봐야겠다."

'연화 소저 방에 간다고? 연화 소저는 여기 있는데.'

"연화 소저도 피곤해서 안 마신다고 할 거 같은데.. 그냥 내일 같이 마시자."

"네가 연화 사저가 마시고 싶어할 지.. 안 마시고 싶어할 지 어떻게 아냐? 내가 가서 물어봐야지."

"아..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영경이 연화 소저의 방으로 가서 방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잠시 후 내 방으로 다시 온 영경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영아, 큰일이야. 연화 사저가 방에 안 계셔. 빨리 찾아봐야 할 거 같아. 너도 나 좀 도와줘."

그 모습을 본 연화 소저가 침상에 숨어 있다가 나오며 말했다.

"영경 사매, 나 여기 있어요. 걱정 말아요."

내 방 침상 쪽에서 연화 소저가 나오자, 영경이 당황한 표정과 눈빛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연화 사저가 왜 무영이 방에 계시죠?"

"나 무영 소협과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는데, 단둘이 있는 모습을 보면 오해 할까봐, 몸을 숨겼었어요."

연화 소저의 말을 듣고 영경이 나를 보며 말했다.

"전부터 궁금했지만, 못 물어봤었는데 이제 알아야겠어. 무영아, 너와 사저는 언제부터 알던 사이고 또 무슨 사이야? "

영경이의 말에 나는 무슨 말을 대답해야 할 지 망설여졌다.

'방금 연화 소저가 다른 이와 다시 좋은 관계가 되어 버린 걸 알았는데 이제는 우리가 사귀는 사이라 할 수도 없고, 애매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음..나와 연화 소저는.."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자, 연화 소저가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할께요. 나와 무영 소협은 사귀고 있고 서로를 연모하는 사이에요."

"네? 연화 사저.. 사저가 무림인으로 살고 있어서 잊고 계신 것 같은데..사저의 진짜 신분은 황녀님이에요. 무영이는 그냥 일반 백성이고요. 신분상 이건 이뤄질 수 없어요."

"사매에게 여러 번 말했잖아요. 저는 더 이상 황녀라는 신분으로 살지 않겠다고요. 그냥 평범한 백성, 그리고 무림인으로 살다가 죽을 거라고요. 그리고 황녀라는 신분이 그대로 있었다고 하더라도 무영 소협을 선택했을 거에요."

연화 소저의 단호한 말에 영경이도 당황한 모습이었지만 더이상 반박 하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상황은 뭐지...황녀님이 연모하던 사람과 다시 만났다고 했는데.. 영경에게 나와 연모하는 사이라고 말하는 건? 설마..'

나와 그 사람을 둘 다 좋아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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