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며칠 뒤 부하들을 데리고 남해 객잔에 와서 황녀님과 그림자 무사님을 찾을 거니까요."
"우리를요?"
"네. 그리고 저들이 황녀님을 찾지 않도록 두 분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 겁니다."
7호는 진유한의 말을 듣고 물었다.
"나는 어차피 아는 사람이 없어서 상관 없지만 황녀님 얼굴은 아는 자가 있을텐데 들키지 않을까요?"
"그래서 오늘 안으로 근처 마을에서 여인의 사체 두 구를 구해다가 불태울 겁니다. 불에 탄 사체는 구분하기 어려울테니까요."
"그럼 지휘사님이 황녀님과 저의 사체라 말해도 그들이 믿지 않을 수 있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그래서 황녀님께 한가지 부탁을 드리려합니다."
"그 부탁이 무엇인가요?"
"착용하고 계신 장신구 중에 보고 황녀님을 떠올릴 만한 것을 하나만 내어 주십시요."
진유한의 말에 황녀가 고심하다가 목걸이를 풀었다.
그 모습을 본 7호가 황녀를 만류하며 말했다.
"황녀님, 그건 황후마마의 유품이라서 황녀님이 제일 아끼는 물건이 아닙니까.. 차라리 다른 걸 내놓으시는 게.."
"그만큼 이 목걸이가 내 것이라걸 아는 사람이 많으니 그 사체를 나라고 믿게끔 만드는데 손색이 없는 물건이지.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서도 이해해 주실거야."
황녀가 진유한에게 목걸이를 건네주자 그가 말했다.
"오늘 사체도 구해야하고 여러가지 준비할게 많으니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황녀님 부디 옥체를 보중하십시요."
"진 지휘사, 고마워요. 잊지 않을께요."
"네. 황녀님. 그림자 무사님도 조심하시고 황녀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네. 지휘사님,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지킬테니 걱정마세요."
진유한이 떠나고 7호와 황녀는 항구 근처 작은 집을 발견하고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나이가 지긋한 노파가 나왔다.
"무슨 일로 왔수?"
황녀가 황룡패를 꺼내어 보이자 노파가 무릎을 꿇고 절하며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만세 만세 만만세."
"노파는 일어나세요."
황녀의 말에 노파가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폐하께서 황룡패를 건네주셨으니 황녀님이겠군요. 황녀님께 인사 올립니다. 저는 황궁에서 황후마마를 모시던 상궁이었던 유화라 합니다."
"유화 상궁이었군요. 예전에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헌데 어찌 이곳에서 생활하고 계십니까?"
"전 황제 폐하께서 신경 써주신 덕분에 이 곳에서 말년을 평안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안배해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제가 바로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노파 유화가 종종걸음으로 남해항으로 간 후 다시 돌아왔다.
"아마 내일쯤이면 이 곳에 그 분께서 나타나실 겁니다. 그때까지 편히 쉬고 계시지요."
황녀와 7호는 오랜만에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제대로 된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황녀님과 어색한 재회
다음날 그 집으로 한 명의 여인이 찾아왔다.
그는 유일한 여자 십대고수인 검후 은소향이었다.
"오랜만이구나. 소연아, 잘 지냈느냐?"
"아니! 무사부님이셨어요?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분이?"
황녀가 구음절맥으로 태어나 목숨이 위태로울 때 황제가 검후를 초빙하여 황녀의 구음절맥으로 인한 음한지기를 다스려달라 부탁하여 황녀가 아기일때부터 해마다 황궁에 방문하여 주소연이 음한지기에 몸이 얼어붙지 않도록 자신의 진기를 넣어주었다.
주소연이 위기를 넘기고 자라나 아이가 되자 스스로 음한 지기를 다스리도록 내공을 가르쳐주고 때때로 무공도 가르쳐 주었다.
주소연이 구음절맥으로 인해 무학의 재능이 타고나 검후가 무사부로 오래 머무르지 않았는데도 짧은 기간에 많은 것을 배웠다.
그 뒤로 십여년만에 생명의 은인이자 무공 스승인 검후를 다시 만나게 되니 주소연은 너무나 기뻐했다.
"그래. 황제 폐하께서 무슨 일이 있으면 남해로 보낼테니 특별히 널 잘 지켜달라고 말씀하셨다."
"그럼 저희는 남해검녀문으로 가는 건가요?"
"그래. 그 곳에 아무도 널 위협하지 못하게 지켜주마."
"그럼 무사부님. 저에게 무공을 더 가르쳐 주세요. 강해지고 싶어요."
은소향은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너는 무학의 재능이 뛰어나니 가르칠 맛이나지. 그래 널 내 정식 제자로 받아주마."
"그럼 사부님 한가지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무엇이냐? 말해보거라."
"여기는 제 호위무사인데.. 남해검녀문에 데리고 가고 싶은데. 사부님 제자로 받아주면 안될까요?"
은소향이 7호의 전신을 훑어보더니 그녀에게 물었다.
"몸의 균형이 제대로 잡힌 게 기초가 탄탄하군. 황궁 출신인가.. 경지는?"
"네. 절정 초급입니다."
"어려보이는데 벌써 절정이라.. 내가 손해 볼 건 없겠군. 내 제자가 될 생각 있니?"
"네.. 받아만 주신다면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그래. 너도 받아주도록 하지. 이름이 무엇이냐?"
"이름은 없고 그림자 무사 7호라 불렸습니다."
은소향은 안쓰러워 하는 표정으로 7호에게 말했다.
"이름도 없이 살았다니 안쓰럽구나. 내가 지어주마. 그림자로 살았으니 영경이라 하자."
"영..경...내 이름이 생겼네요. 감사해요. 사부님."
"소연이도 이름을 그대로 쓸 수 없으니 이름을 하나 지어줘야하는데..소연화?.. 어떠니?"
"네. 좋아요. 사부님."
"연화가 어리지만 내게 먼저 무공을 배웠으니 영경이 너에게사저가 되고 연화에게는 영경이가 사매가 되는거다. 알겠니?"
"네. 사부님."
"그리고 혹여 해남도에서도 너희 두 사람의 얼굴을 알아 볼 지 모르니.. 인피면구를 만들어 쓰고 들어가도록 하자. 광동성에서 인피면구를 잘 만들기로 유명한 자를 내가 알고 있으니 그 곳으로 가자구나."
은소향을 따라가 인피면구의 장인을 만나게 된 7호와 황녀는 인피면구를 만들어 쓰게 되고 검후를 따라 남해검녀문으로 들어가 검후의 지도 아래 열심히 무공 수련을 하게 되고 무림부대 소집으로 인해 2년 후 무림맹에 오게 된 것이었다.
***
7호가 그렇게 2년 간의 이야기를 마쳤다.
"이렇게 된 거야."
"그럼 황녀님은 어디 계시는데? 남해검녀문에 검후님과 함께 계시나?"
"아니. 너희 옆에 계시는 분이 나의 사저이자 황녀님이셔."
모두들 황녀가 연화 소저라는 말에 놀라며 그녀를 보고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라서 당황을 하고 있었다.
1호와 5호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급히 황녀에게 인사드렸다.
"황녀님께 인사드립니다."
"그러지 마세요. 전 이미 황녀의 신분은 내려놓았어요. 그저 남해검녀문의 제자일 뿐이에요."
나는 연화 소저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막막했다.
'내가 그리 찾아 해매던 황녀님이 연화 소저였다니.. 연화 소저일 때는 편한 사이였는데..황녀님이라 생각하니 대하기가 너무 어렵다.'
내가 아무 말도 안하고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자 연화 소저가 말했다.
"무영 소협, 왜 아무 말이 없어요? 내가 황녀라서 불편해요?"
"아무래도 제 앞에 계신 분이 편하게 생각하던 연화 소저가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황녀님이라고 생각을 하니 쉽게 말이 안 나오네요."
"달라진 거 없어요. 황녀라는 신분은 과거에 나 일 뿐이에요. 지금은 평범한 무림인이에요. 소협도 그렇게 생각해 줬으면 해요."
"네."
대답은 했지만 나를 비롯한 적운과 풍현은 여전히 연화 소저가 편할 수가 없었다.
"18호, 아니 무영아, 너는 어떻게 된 거야? 군부로 간 거 아니였어?"
7호가 내가 어떻게 이곳에 있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하여 무경원 이후로 군부에서 있었던 일들부터 무림맹에 오기 전까지의 일을 7호와 연화 소저에게 말해주었다.
다 듣고 난 7호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도 정말 고생이 많았네. 그런데 우리 소식을 듣고 군부에서 탈영을 했다는데 18호, 네가 무경원 때 나를 좋아하지는 않았잖아..날 구하려고 그러진 않았을 거 같고 탈영하면서까지 구하려 한 게 황녀님이야?"
"흠흠..황녀님을 구하려 한 건 맞는데.. 너도 황녀님과 항상 함께 다니니까 너도 구하려 한 것도 맞지."
"됐거든. 그런데 넌 황녀님을 어떻게 아는거야? 무경원에서 떠나기 전날 나에게 한말도 그렇고 그리고 내가 더 놀랐던 건 황궁에 그림자 무사로 배치 받고 나서 황녀님께서 너의 안위를 물으셨을 때였지."
"황녀님도 날 알고 계셨다고?"
"그래. 황녀님과 네가 서로 알고 있었다는 게 신기했어."
나는 놀라서 연화 소저를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도 나에게 궁금한 게 많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여럿이 있는 이 곳에서는 우리 두 사람만의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는 어려워서 나중에 따로 대화를 할 시간을 갖자고 전음으로 말했다.
"그건 나중에 알려줄게."
"그래. 꼭 알려줘. 그런데 진짜 진유한 지휘사님을 네가 죽인거야?"
"그때는 그런 사연이 있는지 몰라서 너와 황녀님의 가짜 시체를 본 순간 제정신이 아니였어. 진 지휘사도 끝까지 사실을 밝히지 않았고.. 아마도 너와 황녀님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을테지. 나는 그것도 모르고 복수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인정사정없이 그를 공격해 죽이고 말았어."
연화 소저와 영경은 자신들을 구해줬던 진유한을 떠올리며 잠시 눈을 감고 묵념하며 죽은 그를 애도했다.
눈을 뜬 영경이 나에게 말했다.
"무영아, 너는 너대로 진유한은 그 사람대로 각자 자기 할 일을 한거니까 너무 그 일을 마음에 담아두지는 말아."
"그래. 영경이 말대로 무영아, 네 탓이 아니야. 넌 그가 우리 편인지 배신자인지 알 수가 없었잖아."
모두 나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그 뒤로 한참동안 서로 과거의 일들을 이야기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영경이가 한 말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제 앞으로 너희들은 어떻게 할 거야?"
"반란군에 대한 문제 말이야? 아니면 명나라 황실 재건?"
"반란군 문제도 그렇고 명나라의 황위를 이을 분들이 나타나지 않아서 2년동안 황제 폐하의 자리가 공석이라서 승상이 대리를 하고 있잖아."
"우리 셋 다 반란군을 도운 무림 세력을 찾고 있었는데.. 일단 어느정도 추려지기는 했는데.. 이번 일로 오독교가 포함 되었다는 건 확실해졌지."
"적운의 말대로 반란군 문제는 어느정도 윤곽이 드러났다면 명나라 황실문제는 더 어렵지.. 2황자님은 무림인으로 살아가시겠다고 선언하시며 황실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으신다고 하셨고, 3황자님도 산촌에 은거하며 평범한 삶을 사시겠다고 하셨으니 남은 건 태자마마 뿐인데..태자마마와 함께 떠난 대장은 전혀 소식을 알 길이 없으니.."
다들 마땅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자 고민이 깊어지는 듯 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연화 소저가 말했다.
"어차피 당장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니 너무 깊게 생각 하지마요. 지금은 해야할 일이 무사히 훈련을 마치고 북방에 가서 후금의 군대를 물리쳐야하니까."
연화의 말에 적운이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황녀님 말씀이 맞습니다. 당장 시급한 문제는 그것이죠."
"앞으로는 황녀라고 부르지 말아요. 그냥 연화라 불러줘요."
적운이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이 네가 현무회 회주라면서 2년동안 명성을 꽤나 쌓았던데, 내가 있었는 해남도까지 네 소문이 들릴 정도였으니.."
"그냥 이 일을 도울 고수들을 모으려다 보니까 명성이 필요해서 했던거지."
"그래. 그래서 현무회에 고수들이 많이 모였어?"
"여기에는 나 포함 세 사람, 그리고 초아까지 현재는 4명이야."
영경과 연화가 살짝 놀란 눈치였다.
"초아도 포함이 되어있다고?"
"응. 초아는 하오문 사람인데 내가 현무회를 만드는데 많은 도움을 줬어."
"초아가 하오문 사람이라고? 무공이 수준이 나와 비슷한 경지에 올라있던데.. 그녀가 하오문 수뇌부라도 되는거야?"
"확실치는 않지만 꽤나 높은 지위에 있는 듯 해."
"그녀가 정말 하오문의 수뇌부라면 그녀가 가져다주는 정보가 큰 도움이 되기는 하겠네."
"응. 초아 없었다면 그 백번의 비무행을 할 엄두도 못 냈을거야."
내가 초아 칭찬을 계속하자 연화 소저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영경은 다른 말로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나와 연화 사저도 현무회에 가입 시켜줄거지?"
"당연하지. 두 사람은 우리 현무회의 수뇌부로 영입해야지."
그 때 마침 초아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무영아,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안 그래도 현무회에 대해 말이 나와서 네 이야기를 하는 중이였어. 인사해. 여기 모두 현무회에 가입한 사람이야."
"반가워요. 신초아에요. 무영이에게 이야기를 들었겠지만 전 하오문 소속이고, 현무회에서 군사를 맡고 있어요."
적운과 풍현이 초아와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나눴고 영경도 마찬가지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연화와 초아도 겉으로는 웃으면 인사했지만 눈빛에서는 불꽃이 튀는 듯한 느낌이었다.
"초아야, 무슨 말을 하려고 한거야? 여기서 말하기 곤란한 이야기면 자리를 옮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