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야! 너 맞지?]
나의 전음에 그가 크게 당황한 듯 조심스럽게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나야. 18호. 설마 날 잊은 건 아니겠지?]
그는 나의 두번째 전음을 듣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나를 찾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 여기서는 아는 척 하기가 서로 불편할테니 저녁 먹고 이각(30분)후 술시(19시)에 본부 옆에 호수에서 보자. 그렇게 하겠다면 고개를 한번만 끄덕여 줘.]
나의 전음을 들은 적운은 자리에 앉더니 고개를 크게 한번 끄덕였다.
'1호가 맞구나. 1호가 무당파 장문인의 제자가 되었다니 그동안 무슨일이 있었던걸까..이제 적운이라 불러야하나.. 그래도 오늘 오랜만에 반가운 친구를 보게 되니 가슴이 설레는구나.'
밥을 먹으면서도 나의 시선은 계속 적운에게 향해 있었다.
적운도 나와의 약속을 기다리는 것 때문인지 밥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갔다.
우리도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와 숙소로 돌아갔다.
"다음에도 시간이 맞으면 함께 먹자."
"그래. 잘 쉬고 오다가다 만나면 모르는 척 하기 없기다."
"그래. 잘 쉬어."
"무영아, 나 보고 싶어도 내일까지 꾹 참고..호호. 들어가서 쉬어."
"둘이 무슨 사이야. 호호. 초아랑 무영 소협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어?"
"오호, 어쩐지 두 사람 서로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더라니..호호."
초아의 농담에 또 다시 여자들의 장난이 시작되었다.
"그래. 심심하면 빨리 놀리고 들어가. 나도 얼른 들어가서 쉬게."
하지만 내가 자신들이 생각한 반응을 해주지 않자 실망했는지 초아가 말했다.
"에이.. 반응이 없으니..재미없어. 얘들아 들어가자."
초아가 여자들을 데리고 가면서 나를 보며 혀를 쏙 내밀고 웃으며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우리 방 동기들은 부러운 표정으로 날 보며 말했다.
"너 초아 소저랑 무슨 사이야? 단순히 같은 문파 사람이라서 친한 느낌은 아니던데.."
"아직은 나도 잘 모르겠어. 초아와 내가 어떤 사이인지.."
"빨리 네 입장을 정하는 게 좋을 걸. 안 그럼.."
"안 그럼?"
나는 추대운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재촉하며 물었다.
"초아 소저를 놓칠 수도 있다고.. 누군가는 초아 소저를 마음에 두고 있을 수 있다고..네가 망설이는 동안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지 누가 알아.."
"듣고보니 그렇구나.. 그런데 난 아직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는데.."
"쯧쯧. 아직 여자 경험이 없고만. 나중에 이 친구들 모르게 내가 조용히 가르쳐 줄테니 나만 믿어."
"진짜? 고마워."
"소하, 네가? 풉.. 너도 여자 경험 없기는 마찬가지 아냐?"
"뭐야.. 지금 나 가지고 장난친거야?"
"아니..난 그래도 이론은 잘 알고 있다고.. 나만 믿어봐."
'이런...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네. 빨리 가야겠다.'
"얘들아 먼저 들어가.. 나 저녁 먹은 게 소화가 안되서. 바람 좀 쐬고 들어갈께."
"그럼 우리도 같이 가자."
"아니야. 나 혼자 생각도 좀 할 게 있고 해서.. 혼자 갈께."
"그래? 그럼 다녀와. 우리는 먼저 들어가서 쉬고 있을께."
방 동기들을 숙소로 올려보내고 난 무림맹 본부 옆에 있는 호수로 급히 이동했다.
어두워진 밤이었지만 호수 주변으로는 연등이 주변을 밝히고 있어 제법 운치가 있었다.
호수 안쪽으로 다리가 놓아져 있었고 그것을 따라 그 중앙에 팔각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호수 주변을 둘러보니 어떤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1호는 아직 오지 않았나보군.'
잠시 호수를 바라보고 1호를 기다리는 사이에 팔각정에서 누군가의 움직임이 보였다.
'1호가 팔각정에 있는건가?'
나는 팔각정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나의 움직임을 느꼈는지 팔각정에서 걸어나왔다.
나와 사내와의 거리가 1장(3m)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그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그에게 말을 했다.
"1호야,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
하지만 1호는 대답없이 보법으로 미끄러지듯 내게 다가와 내목에 검을 겨누었다.
"날 어떻게 알아본거지..누가 보낸거냐? 도대체 네놈의 정체가 뭐지?"
"나 18호 맞아. 우리 지금 십년 만에 보는데 보자마자 이렇게 검부터 겨누는 거냐?"
"넌 18호가 아니야. 십년이 지났다고 내가 18호의 얼굴도 잊어버렸을 줄 아냐."
'아! 내가 인피면구를 쓰고 있어서 그런 거구나. 이건 벗을 수도 없는건데.. 날 어떻게 믿게 만들지?'
"내가 18호라는 걸 증명해줄께."
"그래. 어디 자신 있으면 해 보던가."
"1호야, 십년 전 나와 한 약속을 잊어버린 거냐? 다시 만나면 내가 무슨 부탁을 하든 하나는 들어준다고 했잖아. 남아일언."
"중천금. 너 정말 18호 맞는거야? 얼굴이 너무 변했는데.."
"그건 사정이 있어서.. 일단 검을 내려봐. 설명해줄께."
1호도 내가 18호라는 걸 조금 믿게된 건지 내 목을 겨누고 있던 검을 내렸다.
나는 무경원을 떠나 군부로 가서 있었던 일부터 이야기 하기 시작하여 탈영과 인피면구에 관한 것까지 모두 1호에게 말해 주었다.
그제서야 1호는 나를 확실히 믿는 것 같았다.
내 볼을 잡아보더니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네 살 같은데.. 이게 인피면구란 말이야?"
"어, 인피면구인데.. 이걸 제거하려면 복잡하고 시간도 걸려서 일단은 이대로 생활하다가 어느정도 일이 마무리되면 그때 제거하려고."
"그래. 그럼 일단은 이 얼굴에 적응을 해야겠군. 암튼 정말 반갑다. 내가 황궁을 나와서.. 무경원 사람들은 다시 못 만날 줄 알았더니..무림맹에서 널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내가 이곳에 있는 너를 보고 더 놀랬어. 황궁에서 도망쳐 나간 녀석이 검성님의 제자가 되어서 무림맹에 나타나다니..어떻게 된 일이야?"
1호가 과거를 회상하며 말을 시작했다.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1호의 사연
***
반란군이 황궁을 장악하기 하루 전.
반란군이 황성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 황궁에 전해진 뒤 대장이 그림자 무사들을 소집했다.
"황제 폐하께서 나에 명을 내리셨다. 태자마마와 황자님과 황녀님을 그림자 무사들이 호위하여 황궁을 빠져나가 그분들을 무사하게 지키라는 명이시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희들은 함께 움직입니까?"
1호의 질문에 대장이 말했다.
"아니다. 우리는 황궁을 나가는 즉시 남동쪽과 남서쪽으로 나누어 흩어지고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는 다시 만나지 않을 거다."
"그럼 목적지는 없이 가는 겁니까?"
"그래. 중간 중간 우리들 끼리만 아는 그 표식을 남겨놓고 최대한 황궁에 멀리 떠나 안전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거라."
"기한은 없는 겁니까?"
"황궁의 반란군이 사라지면 돌아와도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쉽지 않을 거 같다."
다들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황손들도 지키고 너희들도 살아남아라. 그래서 시간이 지난 후 꼭 다시 만나자."
"네.대장님."
그림자 무사들은 야밤에 각자 자신들이 지키는 황손들을 변복시킨 후 호위하여 황궁을 빠져나갔다.
1호와 그가 지키는 2황자가 변복을 마친 후 남서쪽을 향해 경신술을 펼쳤다.
2황자도 무예를 수련하여 일류고수 경지는 올랐기 때문에 그를 데리고 도망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1호는 최대한 황궁과 멀어지라는 대장의 명령 때문에 2황자와 며칠을 쉬지않고 달려 섬서성과 호북성 경계지역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2황자님 너무 힘드시죠? 오늘은 이 근처에서 쉬고 가시죠. 제가 먹을 걸 구해 오겠습니다."
"나보다 자네가 고생이 많지. 먹을 걸 구하는 건 좀 쉬었다가 가게나."
1호와 2황자는 객잔에는 가지 못하고 사람들이 지나지 않은 그 근처 사당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사당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1호가 급히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2황자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주었다.
두 사람은 쥐 죽은 듯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잠시 후 사당 근처로 다섯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1호는 내공을 끌어 올린 후 청력에 집중하여 멀리서 이야기하는 그들의 소리를 잡아내었다.
"여기 근처에서 표식이 끊겼습니다. 아마 이 주변 어딘가에 있을 듯 합니다."
"사람들이 많은 객잔으로 가지는 않았을 듯 한데.. 이 주변을 샅샅이 훑어봐야겠군."
"수환 대인, 2황자를 발견하면 어찌합니까?"
"뭐..시체만 가져가도 된다고 했으니..그냥 죽여라."
"그럼 그 황자를 호위 하는 자도 당연히 제거해야겠지요."
"당연하지. 2황자에게 호위가 제법 강한 자가 붙어 있다고 하니 혼자서 싸우지 말고 여럿이 함께 제거하도록 하거라."
"네.알겠습니다. 대인."
저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1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가 남긴 표식을 따라 왔다는 건가? 그 말은 그림자 무사 중에 배신자가 있다는 건데..젠장.. 어떤 놈이지..그리고 수환 대인이라면 절정 고수이며 동창의 2인자인데..저들도 환관들처럼 보이는 것이 동창에 속한 자 같다.. 동창이 황제 폐하를 배신 한건가?'
1호는 일단 전음으로 2황자에게 상황을 설명하였다.
[2황자님, 동창의 2인자인 수환이란 자와 그의 수하 4명이 황자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아무래도 동창이 황제 폐하를 배신 한 듯 합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제가 남긴 표식을 보고 따라 쫓아온 것을 보면 그림자 무사 중에도 배신자가 있는 듯 합니다.]
1호의 전음을 듣고 2황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동창의 배신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기에 2황자가 받은 충격 상당히 컸다.
그 때, 사당 쪽으로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1호와 2황자는 황급히 사당에 목패를 올려놓은 곳 뒤쪽으로 숨었다.
사당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사당 안 여기저기를 살펴보더니 목패 근처로 왔다.
1호는 자신의 검에 손을 올리고 저들이 뒤를 확인하는 순간을 노리려 하였다.
목패 앞에 있는 두 사람이 대화를 하였다.
"2황자가 이렇게 음침한 사당에 있겠나..그나저나 오늘 못 잡으면 꽤나 골치 아픈데 말야.."
"그러게. 황제는 죽으려면 자식들과 다 같이 죽을 것이지. 자기만 죽고 자식들을 여기저기 뿔뿔히 흩어가지고 우리만 힘들게 하고 있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1호는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셨다니.. 황궁에 남는다고 하실 때 짐작은 했지만 그리 허망하게 가시다니..'
1호는 2황자가 받았을 충격을 걱정하며 2황자를 바라보았더니 눈이 충혈되고 당장이라도 뛰어나가 저들을 죽일 태세였다.
[2황자님, 지금은 안됩니다. 분하셔도 참으셔야 합니다.]
하지만 2황자는 1호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검에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확인 다 했으면 빨리 나와. 여기서 놓치면 잡기 힘들다고 빨리 다른 곳도 살펴봐야해."
다른 자들이 부르는 소리에 두 사람은 급히 사당을 벗어났다.
그러자 2황자가 분을 삼키며 검에서 손을 뗐다.
그들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1호가 2황자에게 말을 했다.
"2황자님, 송구합니다. 황자님을 지키라는 황제 폐하의 마지막 명을 따르기 위해 막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날 잘 말려 주었네.. 아버님의 복수도 못하고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
"네. 저도 2황자님께서 황제 폐하의 복수를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돕겠습니다."
"고맙네. 복수를 하려면 나도 힘을 키워야지."
2황자는 어려서부터 무공의 자질이 뛰어났었다.
그래서 황제가 유능한 무사부들을 초청하여 무공을 사사 받도록 하였다.
그 결과 어린 나이에 일류 고수까지 될 수 있었으나 2황자가 무림인의 삶을 살 게 아니었기에 그 이상은 수련하지 않았다.
그런데 2황자는 십여년만에 그 때 계속 수련을 하지 않은 걸 후회하고 있었다.
"내 어릴 적 무사부 중에 무당파에서 온 청풍 도장님이 있었는데.. 듣기로 지금은 무당파의 장로 계신다고 하니.. 아마 내가 도움을 청하면 거절하지는 않을 듯하네. 그러니 무당파로 가세나."
"네. 알겠습니다. 마침 호북성 경계에 들어와 있어서.. 무당파까지는 하루도 안 걸릴 겁니다. 서둘러 이동하시지요."
1호와 2황자는 반나절만에 무당파의 입구에 도착하였다.
"어디서 온 뉘신지요?"
"황궁에서 청풍도장의 옛 제자가 왔다고 전하게."
"청풍 장로님의 옛 제자시라고요?"
급히 본산으로 소식이 전달되어 청풍진인이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