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초아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정 없다면 제가 할께요. 아주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니까요."
'왜.. 거짓말을 하지? 내가 먹어본 요리 중에는 초아가 만든 요리가 제일 맛있던데..초아는 겸손과는 거리가 먼데..이상하네..'
"고마워요. 우리가 옆에서 도울테니까 초아 소저가 맛있는 요리를 해줘요."
"네. 최선을 다해보죠. 무영아, 너도 와서 도와줘."
초아의 말을 듣고 나는 얼른 그녀의 옆으로 가서 재료 손질을 도와주었다.
"연화 사매, 영경 사매, 두 사람도 이리 와서 재료 손질을 도와줘."
단주의 말에 두 사매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저희는 어떤 걸 도와드리면 될까요?"
초아가 두 사람을 살짝 쳐다보고는 말했다.
"두 분은 요리를 거의 안 해보셨다고 한 거 같은데 맞나요?"
초아의 말에 두 사람은 살짝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어쩌다보니 요리를 제가 직접 해 본 적은 없네요.."
"저 역시 무공만 익히느라..요리를 해 본 적은 없네요.."
"그럼 무영이 옆에서 지켜보면서 따라하시면 되요."
나도 처음에는 요리를 해 본 적이 없어서 재료손질조차 할 줄 몰랐는데 가만히 초아가 해 준 요리를 얻어먹기만 하는 게 미안하여 그녀를 도와주기 시작하며 조금씩 요리도 배웠다.
그렇게 꾸준히 하다보니 이제는 채소를 자르고 다듬고하는 재료 손질 실력은 수준급이 되었다.
초아의 말을 듣고 연화 소저와 영경 소저가 내게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무영 소협, 남자가 요리도 할 줄 알고 대단하네요."
"그러게요. 무영 소협이 저희보다 훨씬 낫네요."
두 사람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지며 나의 볼은 상기되었다.
"겨우 재료 손질 밖에 못하는 걸요. 요리는 초아가 정말 잘해요."
"두 분이 많이 친하신가봐요. 혹시 정인이신가요?"
"......."
'그러고보니까 나는 초아와 무슨 사이지? 2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생활하면서 너무 가까워져서 초아와 내가 어떤 사이인지 나조차도 명확히 정의 내릴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구나.'
영경 소저의 말에 나는 당황하여 뭐라 대답해야 할 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가 말을 못하고 있자 초아가 내 대신 나서며 말을 해 주었다.
"저희는 그냥 같은 문파의 사형제 관계에요. 남녀간의 그런 관계 아니에요."
"아..너무 가까워보여서 제가 오해했었네요. 미안해요."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초아의 말에 나는 살짝 기분이 언짢아졌다.
'남녀간의 관계가 아니라는 초아의 말을 듣고 기분이 좋지 않은 건 왜일까? 나도 모르게 초아와 특별한 사이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던걸까..'
"무영 소협은 어느 문파 소속이세요?"
나의 상념을 깨뜨리는 황녀님과 똑같은 목소리의 연화 소저의 말에 놀라며 말했다.
"네? 뭐라고 하셨죠?"
"너무 놀라지마세요. 호호.어느 문파에서 오셨는지 물었어요."
"저희는 현무문이라는 작은 문파에서 나왔어요. 규모도 작고 문파가 세워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아마 모르실거에요."
"그럼 무영소협은 그 문파에서 입문하신 지 오래 되셨어요?"
"아니요..전 무림인이 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아! 그러시구나.. 제가 아는 분과 많이 닮은 듯 하여 물어봤어요."
"저랑 많이 닮았다고요? 그 분이 누구신데요?"
"외모는 많이 닮지는 않았지만 그분과 소협이 비슷한 느낌이 있어서 착각했나봐요."
"아..소저께서는 그 분과는 어떤 사이신데요?"
나의 물음에 연화 소저는 아련한 눈빛으로 먼 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저에게 그 분은...꼭 한번 만나고 싶으면서도 만나면 안될 것 같은 분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죠? 만나고 싶다는 건가요? 만나기 싫다는 건가요?"
"제가 말을 너무 어렵게 했죠? 마음은 만나고 싶은데.. 정작 만나면 그 분이 절 못 알아볼까봐.. 두려운 마음이 크다는 거에요."
'연화 소저에게 오래전부터 연모하던 정인이 있나보구나.'
"두려움이 커서 그분을 만나지 않는다면 평생 후회와 미련 속에 사실거 같은데요. 그래도 어찌됐건 그 분을 만나서 연화 소저를 기억하는지.. 잊었는지.. 확인은 해 봐야 후회가 덜 남지 않을까요?"
"소협 덕분에 복잡하던 머릿속이 정리가 되었어요. 이제는 두렵지만 용기를 낼 수 있을 거 같아요. 정말 고마워요."
연화 소저가 내게 싱긋 웃으며 고맙다고 말하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웃는 모습도 황녀님과 닮았다. 세상에는 이렇게나 많이 닮은 사람도 있구나.'
어느 새 초아는 내가 다듬어 놓은 재료를 가지고 요리를 하여 맛있는 음식을 완성했다.
"아! 이 향긋한 냄새... 이것은 절대 맛이 없을 수 없다."
"와...정말 냄새가 죽이는데.. 이런 냄새면 독약이라도 먹을 수 있다."
초아가 음식을 내놓자 화무단의 단원들이 음식 냄새를 맡고 하나같이 칭찬일색이었다.
"맛은 더 죽입니다. 맛은 제가 보증할테니 얼른 받아가서 맛있게 드세요."
나의 말에 화무단 단원이 서둘러 줄을 서서 음식을 받아갔다.
첫번째로 음식을 받은 단원이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한참을 먹던 그가,
"으아악.. 나 죽는다... 나 죽어.. 물..물 좀 줘.."
"무슨 일이야? 음식에 독이라도 들었어?"
첫번째로 음식을 먹은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며 죽는다고 소리치자 모두들 음식을 받아놓고 먹지 못한 채 그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잠시 후 물을 마시고 진정된 그가 말했다.
"미안...음식이 살짝 뜨거웠는데 너무 맛있어서 허겁지겁 먹다가 입천장을 다 데었어.. 그런데 맛있어서 참지 못하고 데인 곳에 음식을 밀어넣으니 죽을 거 같더라고..."
그의 말에 다들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음식 맛을 본 후에는 그의 말이 수긍이 가는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초아를 처음 봤을 때 너무나도 아름다운 외모에 놀랐는데 이번에 그녀의 음식 솜씨에 또 다시 놀라고 있었다.
"저렇게 아리따운 여인이 요리까지 잘하다니.. 누가 그녀를 데려갈 지 모르지만 봉 잡았군."
"천상의 선녀가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네."
화무단 모두가 초아를 칭찬하며 그녀에게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초아가 단원 모두에게 칭찬을 받고 관심의 대상이 되었는데.. 왜 나는 기분이 좋지 않은걸까?'
그것에 대한 이유는 정확히 찾지 못한 채 생각을 멈추고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모두들 저녁식사가 끝나고 다들 간이 막사로 들어가 잠을 청하며 하루를 보냈다.
다음날 아침에 서둘러 건량으로 간단히 식사를 하고 밤에 쳤던 간이 막사를 거두고 부지런히 무림맹으로 이동을 했다.
또 다시 점심시간이 되어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각자의 단끼리 모여 건량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 명나라는 어떻게 되는건가?"
"그게 무슨 말이야? 명나라가 어떻게 되냐니.."
"반란군이 황성을 점령하고 명나라 영토의 반 이상을 차지한지 벌써 2년이 지났잖아. 거기다가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신지도 2년이나 지났는데.. 황위를 이을 태자 전하나 황자님들을 한 분도 찾지 못했잖아."
"그러고보니 반란군들이 황궁에서 도망친 태자 전하나 황자님들을 쫓아가 모두 사살했다는 소문이 들리던데..사실일까?"
"그러니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겠지."
"자네 말을 듣고보니 반란군이 나머지 명나라 땅까지 차지하면 새로운 나라를 세울 지도 모르겠군."
"내가 보기에 명나라의 국운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이번에 무림인들을 통해 후금의 공격을 막아낸다고 하더라도 반란군을 제압하는 건 쉽지 않을거야.."
"그렇겠지. 워낙 명나라 황실과 고관대작 그리고 지방관리들이 백성들에게 신망을 잃었잖는가. 게다가 반란군의 주축이 농민인데 어찌 싸우겠나. 무림인도 반란군과의 싸움은 나서지 않을테니..남은 명나라 군사들로는 그들을 못 당해내지."
그 말을 듣고 있던 영경 소저가 그들에게 물었다.
"만약 태자 전하나 황자님이 살아계신다면 명나라는 재건될 수 있을까요?"
"아마 어려울 거에요. 한번 국운이 기울어진 국가는 다시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럼 이대로 반란군이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겁니까?"
"영경 소저의 애국심이 대단하군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죠.반란군을 이끌고 있는 이자성이란 자를 누군가 죽인다면 명나라가 무너지는 걸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죠."
무림맹에 가다.
그의 말에 영경 소저의 눈빛이 반짝이며 아까와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영경 소저는 반란군과 무슨 악연이 있는걸까? 아니면 황실에 대한 경외심이 높은건가?'
"그렇게 간단한 방법이 있었네요. 어느 날 갑자기 우국충정 애국지사가 나타나 이자성 그 자를 제거한다면 명나라가 다시 일어날 지 모를 일이겠네요."
"그렇긴 하죠. 세상 일은 변화가 생기면 어떤 방향으로 바뀔 지 모르니까요."
'이자성 그 자를 제거하는 것이 황녀님의 복수를 위해 내게 남겨진 마지막 역할인건가?'
여러 주제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니 점심 시간이 지났다.
남해부대는 대열을 정비하여 다시 무림맹을 향해 출발했다.
며칠 후 무림맹이 있는 하남성에 도착했다.
"이 곳에는 정말 오랜만에 와 보네. 사부님 따라 칠년 전쯤에 왔던 것 같은데.."
"아민 사저, 칠년 전이라면 사부님께서 무림대회에 출전하실 때 같이 따라 온거죠?"
"맞아. 내가 그때 스무살 꽃다운 나이에 사부님 따라 이곳에 와서 뭇 사내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만들었지. 호호."
"으이구.. 사저 때문에 제가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네요."
"왜? 부끄러워? 난 사실을 말했는데.. 진짜 사매들이 못 봐서 그렇지.. 그때 날 보려고 줄을 설 정도였다니까.."
"아.. 사저, 이제 그만해요. 다른 사람들이 쳐다봐요. 남해검녀문의 위신이 떨어져요."
아민 소저와 영경 소저는 서로 아웅다웅하며 대화를 하고 있었고 그 옆에서 연화 소저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며 재밌서 하며 있었다.
"영경 사매, 무림맹에 이번이 처음이지? 그래서 내 말을 못 믿는거야. 곧 사내들이 우리 세 사람을 보려고 몰려들거야."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세요. 제가 그 말을 믿을 거 같아요? 연화 사저, 아민 사저 좀 말려줘요."
"아민 사저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죠. 곧 지켜보면 알겠죠. 호호호."
"그러고보니 연화 사매도 무림맹에는 처음 와 본거지? 곧 좋은 구경이 생길거야."
연화 소저도 표정을 보아하니 아민 소저의 말을 반신반의하는 듯 했는데 무림맹 입구를 통과하여 내당 쪽으로 들어가니 갑자기 우람한 사내들이 몰려나왔다.
"저희는 동부지역 부대에서 왔습니다. 검후님의 제자분들이 오셨다기에 인사나 드리려고 왔습니다."
동부지역 부대는 강소성, 안휘성, 절강성, 복건성, 산동성에 있는 문파들이 소속되었다.
동부지역에는 남궁세가와 제갈세가, 산동악가, 청성파 등 오대세가에 들어있거나 구파일방에 속하는 문파들이 꽤나 많이 있었다.
"아! 직접 저희들을 마중 나와 주셔서 고마워요. 전 남해검녀문의 대제자 유아민이에요. 소협은 누구시죠?"
유아민의 말에 한 사내가 제일 먼저 나서며 말했다.
"저는 산동악가의 소가주 악추하라고 합니다."
"아.. 소협의 이름을 들어봤어요. 산동악가에 권법이 뛰어난 기재가 있다고요."
"검후님 대제자님이 절 아신다니 영광입니다."
산동철권 악추하.
산동 지역에서는 제법 이름이 난 후기지수로 권으로 유명한 산동악가에서도 가주 다음으로 실력이 뛰어나 산동악가에서는 그에게 큰 기대를 갖고 있었다.
"나머지 분들도 다 동부지역 분들인가요?"
"네. 남궁세가와 제갈세가, 청성파 분들도 같이 왔습니다."
"반갑습니다. 아민 소저, 전 남궁세가의 남궁현성이라고 합니다."
남궁세가의 신룡 남궁현성.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무군의 첫째 아들로 남궁세가의 차기 가주로 유력한 자였다.
무재가 뛰어난 편이라 후기지수 중에서도 상위권에 올라 있고 외모도 준수한 편이라 여자 무림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남궁세가의 신룡이시군요. 가주님은 잘 계시죠?"
"저를 알아봐 주시니 영광이군요. 저희 아버지께서는 잘 계십니다. 검후님께도 안부를 전해주십시요."
"네 그러지요."
그 뒤에도 제갈세가와 청성파 등 대문파 제자들이 계속해서 자기를 소개하며 유아민 소저에게 계속 인사를 해왔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서 유아민 소저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영경 소저와 연화 소저에게 말을 했다.
"두 사람 다 잘 봤지? 호호호. 난 거짓말을 안한다고.."
"......"
영경 소저는 뭔가 그녀에게 말을 하고 싶은 듯 했으나 본 게 있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 때 연화 소저가 아민 소저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민 소저는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에 대해 알고 있는 거에요?"
"음.. 그건 사부님을 따라 다니다보면 인맥이 넓어져서 자연스레 알게된 사람들과 남해검녀문의 대제자로써 무림 동향을 살피다보니 또 많은 이들의 정보를 얻게된 거지."
"대단하네요. 저나 영경 사매는 그런쪽으로는 문외한인데.."
"아직 무림에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으니 그건 당연한거지. 나를 따라 다니다보면 무림에 대해 잘 알게 될거야."
무림맹 본부에는 각 지역에서 모인 무림인 부대들이 집결해 있었다.
많은 이들이 모여있으니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없었다.
"여기 진짜 사람 많이 모였네.. 초아야, 무림맹은 와 봤어?"
"무림맹에는 예전에 일 때문에 몇 번 와 봤어."
"그랬구나. 난 이번이 처음이라 낯설고 긴장이 되네."
"그런 것보다 여기 아름다운 여인들이 잔뜩 있어서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