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회동
나는 흑사회 회주라는 사람의 목소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분을 처음 만났을 때가.. 언제였더라? 내가 황녀님의 호위무사로 배치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는데..'
미간을 좁힌 채 골똘히 생각하다 보니 그날의 기억이 점점 선명해졌다.
***
"황녀님 또 틀리셨습니다. 오늘도 예습을 안 하셨군요."
"대학사님, 제가 어제 하루종일 아파서 누워있었고 밤새 한숨도 못 잤어요."
"또 변명을 하시는군요. 이번 변명은 궁색하네요. 제가 내의원에 알아보면 금세 탄로가 날 텐데."
"아! 어제 제가 아파 잠을 못 잤다는 거, 확인해 줄 증인이 있어요."
"그게 누굽니까?"
"무사님, 나와서 제 증인이 되어주세요."
'아무래도 나를 부르는 것 같은데.. 대학사님이 계시는데 나가도 되나? 남들에게 최대한 내 존재를 숨겨야 하는데..'
내가 나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는데 대학사가 황녀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황녀님,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데 누구보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에요. 여기 어딘가에 제 비밀 호위 무사님이 계세요."
'후우.. 이미 저렇게까지 말씀하셨으니 그냥 나가야겠다.'
은신술을 풀고 위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나는 일어나 황녀님께 말했다.
"황녀님, 부르셨습니까?"
"무사님, 여기 대학사님께 어제 제가 잠도 못 자고 밤새 뒤척인 것 좀 확인시켜주세요."
나는 몸을 돌려 대학사님께 인사를 드렸다.
"대학사님, 처음 뵙겠습니다. 황녀님의 호위무사입니다."
"...황손을 지키는 호위무사들은 많지만 이렇게 비밀 호위무사가 따로 있는 줄은 몰랐군요. 반갑소. 난 한림원 대학사 공지철이오."
"네, 알고 있습니다. 대학사님께선 절 처음 보시겠지만 전 이곳에 오실 때마다 대학사님을 봤습니다."
"그렇군요. 한 번도 이 방 다른 누가 있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대단한 은신술이군요."
황녀님이 나에게 재촉하며 말했다.
"인사만 나누시지 마시고 제 억울함을 풀어주세요. 무사님."
"네, 알겠습니다. 대학사님, 황녀님의 말씀은 다 사실입니다. 밤새 한숨도 못 주무시고 뒤척이셨습니다."
"뭐.. 조금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이렇게 증인도 있으니 황녀님 말씀을 믿어드리지요. 그래도 다음부터는 미리 예습을 하셔야 합니다."
"알겠어요. 대학사님."
"오늘은 이만하시죠.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대학사님이 나가자 황녀님이 내게 쪼르르 달려와 방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사님, 고마워요. 실은 제가 거짓말을 했는데.. 알면서도 제 편을 들어줘서요."
"전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황녀님은 어젯밤에 뒤척이셨어요. 아주 잠깐이었지만.."
"풉! 그런가요?"
"이제 전 다시 경계를 서기 위해 올라가 보겠습니다."
"무사님, 내려오신 김에 조금만 더 계시다 가시면 안 돼요?"
"여기에.. 좀 더 있으라고요?"
"그냥 저랑 소소한 이야기나 나누자는 거죠."
"...네, 알겠습니다."
황녀님이 잠시 손가락 끝을 꼼지락거리더니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음..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요. 무사님은 혹시 연모하는 여인이 있어요?"
'내가 십구 년을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연모해 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요. 없습니다."
"그럼 연모했던 여인은요?"
"그것도 없습니다."
"단 한 번도요?"
"네. 살아남기 위해 항상 무공 수련을 해야 했으니까요. 다른 곳을 바라볼 여유가 없었어요."
"아.. 많이 힘드셨겠네요."
"누구나 쉬운 인생은 없으니까요. 황녀님도 매일매일이 마냥 행복하지는 않으시잖아요."
나의 대답에 황녀님은 갑자기 울먹이는 듯하더니 또르르 눈물을 흘렸다.
"화.. 황녀님, 괜찮으세요? 제가 혹시 무슨 말실수라도..."
"흑흑.. 아니에요. 무사님의 말에 저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쳤나 봐요."
'아.. 열네 살 소녀는 감정의 변화가 심하다고 했지.'
내가 황녀님의 울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그녀가 말했다.
"흑흑.. 무사님.. 여인이 이렇게 울면 가까이 와서 안아주셔야 하는 거예요."
"그래도 황녀님처럼 귀하신 분을 제가 어찌 감히.."
"이건 명령이에요! 빨리 날 달래 달라고요."
황녀님의 명령이라는 말에 거부하지 못하고 황녀님에게 다가가 살며시 감싸 안았다.
황녀님은 그런 내 허리를 꼭 부둥켜안고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한참을 울었다.
비단결같이 보드라운 머리에서 향긋한 향기가 나고 가녀린 체구가 내 품으로 파고들자 난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작년에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얼굴에 젖살이 남아있는 귀여운 소녀였는데..‘
황녀님이 내 허리를 꼭 껴안은 탓에 여체의 봉긋한 가슴이 나에게 그대로 느껴졌다.
황녀님이 내게 여인으로 느껴진 건 그때가 처음이었고 나는 애써 쓸데없는 잡생각들을 지워내며 그녀의 등을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황녀님이 아직 많이 여리구나. 내가 끝까지 지켜줘야지.'
***
[소협, 멍하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갑자기 들려온 초아 소저의 전음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 대학사님을 만난 때를 떠올리다가 황녀님과의 추억이 생각났네. 그런데 다시 생각해도 정말 대학사님의 목소리와 너무 흡사하다. 하지만 그분이 이런 곳에 있을 리가 만무한데.. 정말 그분이라면 무슨 연유로 흑사회의 회주 자리를 맡으신 걸까?'
[흑사회 회주라는 사람의 목소리가 제가 아는 사람과 너무 비슷해서요. 그분이 왜 이곳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분이 누군데요?]
[한림원 대학사님이요.]
[네? 한림원 대학사님이 흑사회 회주 같다고요? 지금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저도 말이 안 되는 거 같기는 한데.. 목소리가 정말 너무 똑같아요.]
[소협 말대로 진짜 한림원 대학사님이 회주라면 흑사회가 뭔가 큰일을 벌일 거 같네요.]
[신비문과 흑사회의 최근 행적에 대해 하오문에서 조사를 해 주었으면 해요. 이것도 외상으로 달아놔요.]
[알겠어요. 조사해서 알려줄게요. 다만 이건 우리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문제에요. 소협이 따로 부탁하지 않아도 자체적으로 알아봤을 거니까 그냥 해 줄게요. 호호]
그들은 흑사회 수뇌부 회의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여러분 의견대로 이번에는 풍림산장을 사도련에 넣는 게 좋겠소. 풍림장 장주님은 무공도 뛰어나고 최근에 풍림장의 무사들도 증원하여 인재를 키우고 계신다 소문도 났으니.. 여러분들도 주변에 풍림산장이 요즘 떠오르는 사파의 신성이라고 소문을 내주시면 좋겠소."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풍림장이 들어가면 이제 사도련에 우리 흑사회에서 넣은 문파가 세 개가 되는군요."
"그렇소. 흑사방과 운림산장, 풍림장까지 이렇게 세 문파가 사도련에 들어가게 되면 힘을 합쳐서 사도련 내 다른 문파들을 포섭하고 사도련 자체를 흑사회화해서 사파를 우리가 장악하는 게 될 것이요."
회주의 말에 수뇌부들이 모두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우리에게는 공 회주님이 있어서 너무나 다행입니다. 안 그랬으면 흑사회 소속 문파는 오래 가지 못하고 지리멸렬하여 사라졌을 텐데요."
"맞습니다. 공 문주님이 회주를 맡은 뒤로 흑사회가 제대로 틀을 갖추게 되고 사파의 맹주가 되는 큰 꿈을 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공이라니요. 모두 여러분이 잘 따라준 덕분이외다."
흑사회 수뇌부 회의는 계속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의제가 변경되며 분위기가 달라졌다.
"하오문이 최근 광동성 지역의 군소 사파 서른 곳 정도를 정리하고 다녔습니다. 흑사회에 속한 사파도 공격당하여 광동성 지역에서만 지금 세 곳 방파의 문주와 방주가 참석을 못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세 문파들은 거의 괴멸 직전까지 갔다고 합니다."
흑사회에 속한 문파들은 이번 사건에 대해 울분을 토하며 말하고 있었다.
"나도 그 소식은 들었는데.. 대체 하오문이 언제부터 무력이 그리 강한 문파였소?"
"저희도 당황스럽습니다. 하오문은 같은 사파 문파지만 문도들의 무공 실력이 전체적으로 떨어져 문파라고 하기에도 창피한 수준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런 일을 벌일 줄이야."
"사자방이나 금오문, 그리고 혈사방 같은 경우는 문주나 방주가 모두 절정고수 아니었소?"
"맞습니다. 특히 사자방은 수뇌부의 무공 실력도 뛰어나 사도련에 들어갈 후보군 중 하나였습니다."
"그게 모두 한 사람이 한 짓이라던데요."
그의 말에 회주가 놀란 말투로 물었다.
"한 사람이 한 짓이라 했소?"
"네. 하오문 사람은 아니고 하오문에서 고용한 용병인데.. 워낙 손속이 잔인하여 혈귀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합니다."
"하오문의 용병? 혈귀?"
"네. 그자가 하오문에게 채무를 지고 갚지 않는 문파들을 모두 찾아다니며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돈을 받아갔다고 합니다."
회주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잘못하면 하오문 때문에 우리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겠소이다. 최근의 행적만 놓고 보면 사파에서 가장 떠오르는 문파로 하오문을 꼽는 자들도 꽤나 많을 것 같소."
"그럼 어떻게 할까요?"
우리는 저들의 대화를 숨죽여 들으며 저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에 주목하고 있었다.
특히 초아 소저는 이마에 땀까지 맺히며 역력히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 하오문 문주를 아는 사람이 있소?"
"하오문은 수뇌부가 모두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서 향주부터 문주까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일단은 하오문의 의도를 정확히 모르니 섣부른 행동은 삼가고 그 일은 내가 따로 알아보도록 하겠소."
"네. 회주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오늘 회합은 이걸로 끝내고 다음 달에 다시 모이도록 하겠소."
"네, 공 회주님. 수고하셨습니다."
"연회가 준비되어 있으니 오늘은 먹고 마시고 푹 쉬었다가 가시요."
"감사합니다, 회주님."
그들이 회합장을 떠나고 나와 초아 소저는 잠시 더 모든 인기척이 사라지길 기다린 후 좁은 공간에서 조심스레 빠져나왔다.
"소저, 비좁은 데서 고생이 많았어요."
초아 소저의 이마에 땀이 송송 맺혀 있기에 자연스럽게 닦아주었는데 소저가 놀란 눈빛으로 날 바라본 후 말했다.
"소협도 고생했어요. 흑사회가 이렇게 달라졌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네요. 회주 한 사람으로 인해 여느 단체 못지않게 틀이 잡혀가고 있네요."
"네. 그리고 대학사님이 무슨 목적으로 흑사회 회주를 맡고 있는지 빨리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할 테니.."
"돌아가는 대로 최대한 빨리 알아볼게요."
"그보다 하오문이 저 때문에 위기에 빠질 수도 있겠네요. 미안해요."
나의 말에 초아 소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문제가 생기면 소협이 저지른 일이니 소협이 마무리하면 되죠."
"네? 제가요?"
"초절정 고수 한 명이면 흑사회에 속한 문파들을 각개격파하는 건 식은 죽 먹기인데 뭘 걱정해요. 호호호."
'생각해보면 소저 말이 맞네. 내가 흑사회 소속 문파들을 각개격파하고 다니면 하오문을 함부로 건들 생각은 못 하겠지.'
"알겠어요. 저 때문에 하오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긴다면 내가 나서서 처리할게요."
"그럼 이만 이 방에서 나가볼까요."
"네, 그러시죠."
우리는 들어왔던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와 전각 위로 올라가 인적이 드문 전각 사이를 옮겨 다닌 후 아무도 모르게 신비문에서 빠져나왔다.
신비문을 벗어난 후 다시 광동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초아 소저에게 물었다.
"소저, 내가 세력을 만든다고 한다면 뭐부터 하는 게 좋을까요?"
"소협이 세력을 만들겠다고요?"
"아무래도 반란군을 도운 무림 세력을 잡기에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부족할 거 같아서요."
초아 소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그렇죠. 세력을 만들겠다면 소협이 직접 문파를 세우거나 다른 문파에 들어가 그 문파의 수장이 되면 돼요."
"그건 둘 다 너무 오래 걸리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무림맹이나 사도련, 흑사회처럼 회나 맹을 만드는 방법도 있고요."
"제가 회나 맹을 만들면 다른 문파 사람들이 모일까요?"
"안 모이겠죠. 소협이 무공은 강하지만 무림에 명성이 퍼진 상태는 아니니까요."
'그래. 내 무공의 경지가 높아져도 명성까지 같이 높아진 건 아니니까.. 무림인 중 날 아는 자는 거의 없겠지.‘
"그럼 우선은 저의 명성부터 높여야겠네요. 누구든지 제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도록요."
"그렇죠. 명성이 높아지면 소협이 만든 맹이나 회에 서로 들어오려 할 거예요."
"그럼 단기간에 명성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대형 사고를 치면 가능하죠."
그녀의 말에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대형 사고요?"
"가령 십대고수라든지 아니면 십대세가나 구파일방의 장문인급을 쓰러뜨리면 단번에 명성이 전 무림에 퍼질 거에요. 물론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요. 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