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무사의 귀환-65화 (65/114)

어르신의 정체

"자네, 올해 나이가 몇인가?"

"스물셋입니다."

"젊어 보인다는 생각은 했지만 스물셋이면 많이 어리군."

"제가 나이보다 좀 들어 보이기는 하죠."

"나이가 어리니 아직 혼인은 안 했겠군. 자네 혹시 정인이라든지, 만나는 여인이 있나?"

'정인이라.. 전생에는 황녀님과 죽기 직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고, 이번 생에서는 황녀님은 내가 누군지 조차 모르고 살았을 텐데.. 황녀님이 내 정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난 그동안 무엇을 쫓아 살았던 걸까? 그저 전생의 인연에 대한 미련을 붙잡고 살았던 걸까..'

"어르신, 제 사주에는 여인과의 연은 없는 듯합니다."

"앞길이 창창한 젊은 친구가 그 무슨 소리인가? 자네 혹여 출가할 생각이거나 도인이 되려 하는가?"

"그건 아니지만.. 이번 생에는 누군가와 연을 맺기 어려울 듯합니다."

"어린 나이에 꽤나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나 보군. 아쉽구나, 아쉬워.."

"네? 어르신 뭐가 아쉬우신 겁니까?"

"자네가 마음에 들어서 내 여식과 잘해보라고 하려 했는데.. 어렵겠어."

나는 어르신의 말을 듣고 웃으며 말을 했다.

"하하. 제가 어르신 마음에 든다고 따님과 이어주려 하셨다고요? 저와 따님은 서로 알지도 못하는 사인데 어르신 마음대로 그게 되나요?"

"...무공 실력도 뛰어나고 생긴 것도 그만하면 남자답고 멀쩡하게 생겼는데, 자네 혹시 바보는 아니지?"

"네? 어르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르신의 말에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초아 소저가 밖으로 나왔다.

"반성하라고 내보냈더니 거기서 둘이 노닥거리고 있는 거예요?"

“어.. 그게 아니라.. 초아 소저, 미안해요. 제가 소저 심기를 불편하게 했네요. 짐 싸서 다른 곳으로 숙소를 옮길게요."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예요. 숙소를 왜 옮겨요?"

"저 때문에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아서.."

어르신이 한심한 녀석 보듯 날 쳐다보며 말했다.

"이 녀석 바보 맞네. 여자의 마음을 이리 몰라서야. 초아야, 내가 너와 이 녀석을 만나보게 해주려 했더니.. 통 엉뚱한 소리만 하더구나. 너도 이 녀석에게 마음 주지 말거라. 너만 마음 고생하겠구나. 들어가자."

"아버지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들어가긴 어딜 들어가요."

초아 소저의 말에 내가 놀라며 물었다.

"이 어르신이 초아 소저 아버지세요?"

"네. 자식을 잊어버리고 홀로 방랑을 즐기시다가 잊을만하면 나타나시는 아버지세요."

"내가 이렇게 어여쁜 딸을 어찌 잊겠느냐. 그냥 잘살고 있으니 멀리서 지켜보는 거지."

"아.. 멀리서요? 어디 서역에서 지켜보고 계셨나요?"

'서로 허물없이 말을 주고받는 게 확실히 부녀지간이구나. 이걸 못 알아채다니.. 정말 바본가. 에휴'

"어르신, 초아 소저 아버님인 줄 모르고 실례했습니다."

"자네는 우리 딸이 예쁘지 않나?"

"네? 초아 소저야.. 정말 예쁘죠."

"헌데.. 정말 내 딸한테 관심이 없어?"

어르신의 말에 초아 소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초아 소저와 전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그리고 전 누구를 좋아할 자격도 없고요."

"혹시 내 딸이 나이가 많아서 그런가?"

"네? 전 초아 소저의 나이를 모르는데요."

"그래? 자네보다 내 딸이 네 살 많네."

"전 저보다 어리게 봤었는데.."

'초아 소저가 엄청 동안이구나. 당연히 내 또래거나 나보다 어릴 거라 생각했는데.. 네 살이나 더 많다니.'

내가 초아 소저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녀가 어르신께 소리치며 말했다.

"아버지! 그만해요! 진짜 나 화나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알죠?"

어르신이 기가 죽은 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래, 알았다. 그만하마. 그만하면 되잖니.."

초아 소저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두 사람 다 언제까지 밖에 있을 거예요. 안으로 들어와요."

나와 어르신은 초아 소저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조용히 내 방으로 들어가고 어르신과 초아 소저는 대화를 따로 나누려는지 응접실로 향했다.

다음 날 아침, 전날과 마찬가지로 초아 소저가 청아한 목소리로 나를 깨웠다.

"무영 소협, 일어났나요? 얼른 와서 아침밥 먹어요."

'목소리를 들어보니 초아 소저의 기분은 풀린 것 같구나. 다행이다.'

"네. 바로 갈게요."

간단히 세안만 하고 아침을 먹기 위해 주방으로 가니 식탁에는 어르신이 먼저 와서 앉아계셨다.

어르신이 내게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눈인사를 했다.

"어르신,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랜만에 푹신한 침상에서 아주 잘 잤지. 자네도 잘 잤는가?"

"편히 말씀하십시오, 어르신."

"초아보다도 더 어리니.. 그럼 그럴까? 내가 말 놔도 되지?"

"네, 그게 더 편합니다."

"그럼 무영이라 부르마."

"네, 어르신."

어르신은 내게 말을 놓으면서 좀 더 날 친근하게 여기는 듯 보였다.

"너도 딱딱하게 어르신이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아저씨라 불러."

"네, 아저씨.''

"아이고, 내 정신 좀 봐라. 무영이에게 내 이름도 안 가르쳐줬네. 내 이름은 신유혁이다. 들어 본 적 있지?"

신유혁은 자신의 이름 석자를 자랑스럽게 말했지만 나는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무림 초출이라서.. 아저씨 이름을 못 들어봤네요."

"으잉? 무림초출? 허허허. 무슨 절정 고수가, 그것도 초절정을 코앞에 둔 녀석이 무림초출이라는 게냐."

"그래도 무림에 나온 지 얼마 안 돼서요."

"나도 네 사정은 초아에게 대충 들어서 안다. 황궁에도 인연이 있었던 거 같고 군부에서 오래 있다가 나온 것도 들었다."

'어젯밤에 초아 소저와 아저씨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주무셨구나.'

"아.. 다 들으셨군요."

"군부를 벗어나 하오문의 일을 돕고 있으니 이제 너도 어엿한 무림인이다. 그러니 무림초출이니 그런 말들은 쓰지 말거라."

"네, 아저씨."

"지금은 여기저기 방랑하며 떠돌고 있지만.. 언제든 내 도움이 필요하면 초아를 통해 내게 연락하거라. 내 바로 달려와 도와주마."

"네, 감사합니다."

바로 앞에서 우리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초아 소저가 말했다.

"와! 무영 소협이 진짜 마음에 들으셨나 보네. 아무에게나 말하지 않는 아버지 이름도 가르쳐주고 연락하면 도와주겠다고까지 하시고. 호호"

"다 너 때문이지. 사람 인연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혹시 아느냐? 이 녀석이 우리 집안 사람이 될지. 미리 내 편으로 만들어놔야지."

"내가 이래서 아버지를 오래 미워하지 못한다니까. 호호."

'오늘은 부녀지간의 사이가 너무 좋구나. 어제와는 정반대로군.'

"무영아, 앞으로 우리 초아를 잘 부탁한다."

"부탁이라니요. 오히려 제가 초아 소저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는데요."

"그래도 남자는 여자를 지켜줘야 해. 위험한 순간이 닥친다면 네가 나서서 꼭 초아를 지켜줘야 한다. 알겠느냐?"

"네, 아저씨. 그런 순간이 오면 어떻게든 초아 소저를 지켜줄게요."

"그래. 네가 초아 옆에 있다니 조금은 안심이 되는구나."

나는 아저씨의 말에 궁금증이 생겨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런데 아저씨가 직접 초아 소저 옆에 있어 주시면 되잖아요?"

나의 말에 아저씨가 조금 당황을 하며 말했다.

"나도 초아를 혼자 두고 돌아다닐 때 초아가 자꾸 눈에 밟혀서 몇 번이나 돌아오고 싶었는데.. 그래도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꾹 참고 몇 년에 한 번씩만 얼굴을 보고 돌아가야만 했다."

"할 일이요? 그게 초아 소저를 놔두고 떠날 만큼 중요한 일인가요?"

'이런.. 아저씨에게 나도 모르게 흥분을 해서 말했구나."

내가 조금 흥분한 목소리로 따지듯 물었음에도 아저씨는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차분히 설명을 해주셨다.

"무영이 넌 군부에 있었으니 그곳을 예를 들어주마. 병사 때는 위에서 시킨 일, 자기에게 주어진 일만 해도 되지만 그 병사가 장군이 되면 그의 지위에 걸맞게 행동을 해야 하지 않느냐. 병사 때처럼 자기 할 일만 하면 장군으로서 자기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거지. 마찬가지로 무림인도 삼류무사, 이류, 일류 때에 주어지는 역할과 초일류, 절정, 초절정 때의 역할이 다르다. 특히 초절정 고수쯤 되면 자신을 희생하여 무림의 안정을 위해 나서서 조율하는 역할을 맡아야만 한다."

'아저씨의 말을 들으니 스스로가 부끄럽구나. 처음에는 나 자신의 안위를 위해, 그다음에는 황녀님을 지키기 위해 무공 수련에 매달리고 초절정 경지까지 올라갔는데.. 아저씨는 무림의 안정까지 생각하고 큰 뜻을 펼치시는구나. 나와 그릇의 크기 자체가 다르다.'

아저씨의 말에 큰 깨달음을 얻어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아저씨 말씀을 들으니 그동안 제가 생각하고 보았던 시야가 너무 좁았단 걸 깨달았어요. 아저씨 덕분에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깨닫네요. 감사해요."

"아니다. 네가 아직 어리기에 지금 네가 보는 시야가 좁은 건 당연하다. 그리고 황궁이든 군부든 폐쇄적인 환경이었으니 더 큰 세계를 보지 못한 것도 당연한 거고. 이제부터 조금씩 시야를 넓혀가다 보면 네 무공의 성취뿐만 아니라 네 정신적인 성숙도 함께 될 것이다."

'전생에 나는 내 스스로 무공이 초절정 경지까지 올랐다고 자만했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그때의 나는 그저 우물 안의 개구리였구나. 정신적인 성숙을 하지 못한 어린아이 주제에 크고 날카로운 검을 쥐고 우쭐했던 거였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아를 성찰하게 되고 다시 명상에 빠져들었다.

명상 속에서 그동안 갇혀 있던 한계를 마주하게 되고 나의 성장을 가로막아 왔던 수많은 문제들이 꼬였던 실타래가 풀리듯 하나하나씩 머릿속에 정리가 되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자 극도로 편안해지며 종극에 가서는 무념무상, 즉 무아의 경지로 들어갔다.

나는 얼마가 지났는지도 모른 채 자연스럽게 눈이 떠져서 깨어났다.

처음 눈을 떴을 때 내 눈앞에서 초아 소저가 지긋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소협 이제 깨어났군요. 초절정 경지에 오른 것을 축하드려요."

'내가 초절정 경지에 올랐다고? 몇 년간 그렇게 수련을 하고 실전을 겪으면서도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았던 게.. 아저씨와 대화를 통해 이렇게 간단히 넘어섰단 말인가.'

"제가 초절정 경지에 오른 것을 소저가 어떻게 안 거죠?"

"소협이 명상에 들어갔다가 깨어나신 게 나흘만이에요."

"나흘이나요? 잠깐 눈을 감았다 깨어난 것 같았는데."

"하루가 넘어갈 때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어요. 소협이 이번에 깨어나면 하나의 벽을 더 넘을 거 같다고요. 그러고 나서 어제 소협 몸에서 노폐물들이 빠져나왔어요."

"제 몸에서 노폐물이요?"

나는 내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노폐물은 보이지 않았다.

'몸에서도 냄새가 나지 않는데.. 설마 소저가 치운 걸까?'

"아버지 말로는 초절정 경지에 오르면서 신체에 쌓인 노폐물이 빠져나가고 순수한 정기만 모이게 되는 과정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럼 그 노폐물은.. 어떻게 한 거죠?"

"아버지께서 치워주셨어요."

'다행이군. 소저가 아니라 아저씨가 치워주셨다니. 찾아뵙고 감사라도 드려야겠다.'

"아저씨께 여러 번 신세를 지네요. 감사를 드려야 하는데 어디 계시죠?"

"아버지께서는 다시 본인이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며 어젯밤에 떠나셨어요."

"그랬군요.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는데 벌써 가셔버렸네요."

"소협과 아버지가 인연이라면 다시 만나겠죠."

"네. 꼭 다시 뵙고 싶네요."

방으로 돌아와 운기조식을 하며 내 몸의 상태를 점검해보았다.

'초절정 경지에 오르고 나니 몸도 훨씬 가벼워지고 내공의 질도 좋아져 어떤 무공이든 마음껏 펼칠 수 있을 것 같다. 전생에도 초절정 경지에 올랐었지만 그때보다 지금의 몸 상태가 더 나은 것 같은데..'

하지만 나는 초절정 경지에 올랐다는 기쁨보다 아저씨와의 대화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한 것이 더 만족스러웠다.

앞으로도 조금씩 정신적으로 성장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달라진다면 무공 경지도 함께 높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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