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목표
초아 소저가 차려준 아침밥을 먹은 후 숙소를 나와 그녀와 함께 하오문의 용병으로서의 하루를 시작했다.
"초아 소저, 오늘은 어디로 가서 받아내면 됩니까?"
"무영 소협, 의욕적으로 일하는 건 좋은데.. 얼굴까지 바뀌고 나니 살짝 고리대금업자 느낌이 나네요. 호호."
"뭐든.. 상관없어요. 빨리 빚 다 갚고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조용히 살다가 죽으렵니다."
나의 말에 초아 소저가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빚 다 갚으면 은거라도 하려고요?"
"뭐.. 이제 이생에 별 미련은 없으니까.."
"차라리 저희 하오문에 들어오는 건 어때요? 우리 하오문에 들오면 제가 좋은 자리에 추천해 줄게요."
"하오문에 들어가면 뭐가 달라질까요? 그녀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초아 소저가 살짝 망설이다가 내게 말을 하였다.
"그때 그들의 대화에서 듣긴 했지만 소협이 너무 힘들어해서 직접 물어보진 못했었는데.. 그 돌아가신 여인이 황녀님이신가요?"
"그래요. 그녀가 명나라의 유일한 황녀님이시죠."
"황녀님을 연모하신 건가요? 그녀의 높은 신분을 알면서도.."
"알면서도 연모했어요. 함께 할 수는 없는 사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옆에서 평생 지켜드리고 싶었거든요."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면서 소협이 삶을 살아가는 목표를 잃어버리신 거죠?"
"그래요. 내가 왜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나의 말에 초아 소저가 정색하며 말했다.
"그래서 하오문의 빚을 다 갚으면 다시 전처럼 술만 퍼마시면서 세상을 등지고 폐인 생활을 하시겠다고요?"
"......"
초아 소저가 진짜로 화내는 모습을 처음 본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럴 거면 차라리 지금 그녀를 따라 죽어요. 소협이 이렇게 한심한 남자인 줄 몰랐네요."
"초아 소저..."
"황녀님을 그렇게 돌아가시게 만든 자들이 누군지 밝혀내서 복수하거나 명나라 황궁을 점령한 반란군을 돕고 있는 무림인들을 찾아내서 복수해도 시원찮을 판에, 폐인처럼 방구석에 앉아서 술이나 마시며 떠나간 그녀를 그리워하며 살겠다고요?"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의 말이 다 맞다. 나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있어. 황녀님을 해친 자들에 대한 복수도 해야 하고 명나라를 전복시키려는 무림세력도 찾아야 하는데.. 그동안 이렇게 어리석은 짓만 하며 시간만 축내고 있었다니.'
"소저, 고마워요. 내가 그동안 정신을 놓고 있었는데 소저 덕분에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은 거 같아요."
정신을 차리자 복수를 위해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에 선명히 떠올랐다.
초아 소저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야 눈빛이 제대로 돌아왔네요. 당신을 처음 봤을 때처럼요."
"그런가요. 앞으로 다시는 전과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을 거예요. 이제 삶을 살아가야 할 이유와 목표가 분명해졌으니까요."
"너무 성급하게 움직이지는 말아요. 차근차근 준비해서 꼭 성공하길 바라요. 제가 옆에서 도울게요."
"안 그래도 앞으로 소저의 도움이 많이 필요할 거 같아요."
"뭐든.. 저에게는 편하게 부탁해도 되요."
"정말 고마워요. 초아 소저."
대화를 마친 나는 초아 소저와 함께 하오문의 빚을 받으러 금오문으로 가 적당히 손을 봐주고 수금하여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온 나는 본격적으로 황녀님의 복수와 반란군을 도운 무림세력을 찾기 위한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황녀님을 죽인 금의위의 지휘사 진유한에게 지시를 내린 동창의 수장 정화와 금위대 대장이라.. 정화는 전생의 기억으로 황궁 내 최고수 중 한 명이었지. 그리고 금위대 대장은 아직 누군지도 모르고.. 내가 지금 그들을 찾아 황궁에 쳐들어간다 해도 마땅히 제거할 방법이 없다. 내가 좀 더 강해져야 하고 또한 나에게도 그들과 맞설 세력이 필요하다. 그건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
그래서 나만의 세력을 만들기까지 황녀님의 복수를 조금 뒤로 미루고 반란군을 돕고 그들을 부추긴 무림세력부터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무림세력이 개입했는지 알아야.. 그와 반대편에 있는 세력을 내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먼저 하오문을 통해 어떤 세력이 반란군과 연줄이 닿아있는지부터 확인하고 움직여야겠다.'
생각이 정리되자 나는 초아 소저를 찾았다.
초아 소저는 내가 부르자 바로 내 방으로 와 주었다.
"소협, 절 찾았어요?"
"네. 소저께 부탁할 게 있어서요."
"무슨 부탁이죠? 편히 말씀해 보세요."
"황궁 내 하오문의 정보원들이 들어가 있나요?"
"원래는 꽤 있었으나 반란군이 황궁을 장악한 이후로는 아주 소수만 남아 있을 거예요."
"현재 반란군이 장악한 황궁의 정보도 알 수 있나요?"
"정보원이 소수고 중요 직책은 아니라서 중요 정보까지는 접근이 어렵고 황궁이 돌아가는 상황 정도는 파악할 수 있어요."
'그럼 금위대 대장이 누군지는 알아내기 어려우려나..'
"금위대 대장의 신분과 황궁 내 중요기관 수장들의 정보는 알 수 있을까요?"
"일부러 신분을 감추고 다니지만 않는다면 그 정도 정보는 접근 가능할 것 같아요."
"그럼 그것과 반란군과 연줄이 닿은 무림 문파들을 알아봐 주세요."
"알겠어요. 황궁 정보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겠지만 반란군과 연줄이 닿아있는 무림 문파를 찾는 건 아마 시일이 오래 걸릴 것 같아요. 그들도 들키지 않기 위해 은밀히 움직일 테니까요."
"네. 당장 급한 건 아니니까 천천히 알아봐 주세요. 이번 정보료도 외상으로 부탁해요. 열심히 일해서 일당으로 갚을게요."
나의 말에 초아 소저가 웃으면서 말했다.
"빚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요. 이러다가 평생 하오문의 용병으로 살겠어요. 호호호"
"열심히 일하다 보면 일당도 오르겠죠. 설마 계속 금화 1냥만 주실 생각은 아니시죠?"
"안 그래도 소협이 너무 일을 열심히 잘해줘서 향주님이 금화 5냥으로 올려주신다고 하셨어요. 무영 소협, 축하해요. 호호"
"오호. 금화 5냥이라.. 그러면 빚도 금방 갚겠네요."
"소협께서 지금처럼 계속 빚을 늘리면 쉽지 않겠지만요."
"흠흠.. 그렇군요. 제가 좀 더 열심히 일해야겠군요."
"그랬다가는 혈귀라는 악명이 광동성 지역뿐만 아니라 중원 전체로 퍼질 거에요."
"무림에서 얻은 첫 별호가 혈귀라서 좀 그랬는데.. 훗.. 그것도 듣다 보니 점점 익숙해지네요."
***
오늘도 금오문에 쳐들어갔을 때 정문을 지키는 자에게 하오문에서 빚을 받으러 왔다고 했더니 그자가 날 보자마자,
"하오문의 용병.. 혈귀?"
"그렇다면?"
그자가 황급히 안으로 뛰쳐들어가더니 외치고 다녔다.
"비상! 혈귀가 나타났다!!"
잠시 후, 오십 명쯤 되는 무리가 몰려나왔다.
내 악명이 꽤나 쌓였건만 여전히 나에게 달려드는 불나방 같은 자들이 많았다.
나는 그들을 보고 피식 한번 웃어주고 달려갔다.
이제는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을 지나가면 몸이 먼저 반응하며 무의식중에 상대의 급소를 가격하여 일수에 한 명씩 쓰러뜨렸다.
피를 보지 않고도 얼마든지 제압할 수도 있으나 어느샌가 혈귀라는 별호에 익숙해져서인지 항상 일을 마치고 나면 온몸이 피칠갑이 되어있었다.
***
"무영 소협에게 이제는 다른 일을 맡겨야겠어요."
"네? 다른 일이요? 그 일이 몸도 풀리고 제법 적성에 맞는데.."
"소협이 이대로 계속 악명을 쌓다가는 하오문이 무림의 공적이 되겠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살짝 당황해하며 말했다.
"흠흠. 그 정도는 아닌데.. 어떤 일을 맡길 생각이죠?"
"우리는 정보로 먹고 사는 문파에요. 남들이 알기 힘들고 구하기 힘든 정보일수록 가치가 높죠."
"그건 저도 알고 있죠. 그래서 제가 어떤 일을 하면 되는 건데요?"
"소협이 은신술이 뛰어나다는 것은 오독교 때도 알 수 있었고.."
"아.. 다시 생각해도 오독교 때는 정말 아찔했어요. 다시 한번 고마워요."
초아 소저는 오독교 때를 떠올렸는지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한 박자 늦게 대답을 했다.
"...네."
"그래서 제 은신술로 뭔가 정보를 얻어오라는 건가요?"
"맞아요. 무림 고수들의 회합이나 중요한 인물들끼리 만날 때 그 장소에 미리 가서 숨어있다가 정보를 가져오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건 매일 있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럼 빚 갚기가.."
내가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소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런 일은 매일 있지는 않죠. 대신 위험한 일이고 가치가 높은 정보를 얻는 거니까 한 건당 금화 15냥으로 쳐줄게요."
"그럼 일이 없는 날은.."
나의 말에 초아 소저가 슬쩍 다른 곳을 바라보며 넌지시 말했다.
"그날은 쉬면서 무공 수련을 하셔도 되고, 정 심심하시면 저와 함께 밖으로 나가 여기저기 구경 다녀도 되고요."
"알겠어요. 그럼 일이 잡히는 대로 알려줘요."
'초아 소저가 친구가 전혀 없어서 많이 심심한가 보구나. 저번에 그녀와 같이 다녀보니 바깥 구경 나가는 걸 좋아하던데.. 그간 개인적으로 신세진 것도 많으니 가끔은 내가 동행해 줘야겠군."
나의 말에 초아 소저는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어요. 일이 잡히면 바로 말해줄게요."
초아 소저가 나가고 나는 침상에 누워 잠시나마 생각을 멈추고 명상에 빠져들었다.
생각이 정리되어서인지 오랜만에 깊은 명상으로 들어가 깨달음을 얻으려는 찰나였다.
나의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기척에 명상에 깨어났다.
'초아 소저가 할 말이 남아서 다시 왔나?'
당연히 초아 소저라 생각하며 눈을 떴는데 생전 처음 보는 중년인과 눈이 마주쳤다.
중년인은 하얗고 긴 머리카락에 수염까지 하얗게 되어서 언뜻 보기에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피부를 보면 주름이 거의 없어서 많게 봐도 오십세가 안 될 것 같았다.
중년인과 나 사이에 서로 당황스러운 눈빛이 오갔다.
"!! 누구세요?"
"!! 그러는 자네는 누군가?"
"제 방에 불쑥 들어오셨으니 어르신이 먼저 신분을 밝히시는 게 맞지 않을까요?"
"여기가 자네 방이라고?"
"네. 어제부터 제가 이 방을 쓰기 시작했어요."
나의 말에 어르신이 더욱 당황하며 말했다.
"아.. 방이 바뀌었나 보군. 미안하네."
"어르신께서 방을 잘못 찾아오셨나 보군요."
"원래 이 방을 쓰던 아이와 잘 아는 사이라.. 이 방을 쓰던 아이는 어디로 갔는지 아는가?"
"아.. 그랬군요. 전 어제 이곳으로 새로 들어와 전에 이곳을 누가 썼는지는 모릅니다."
나의 말에 어르신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여기는 하오문 수뇌부의 숙소인데.. 자네는 이 방을 썼던 아이를 모른다고?"
"네. 예정에 없다가 갑자기 이곳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자네.. 하오문 사람은 맞나?"
"지금 하오문의 일을 돕고 있기는 하지만.. 어르신께서 하오문 소속이냐고 묻는 거라면 아닙니다."
"하오문 사람도 아닌데.. 이곳에 방을 내 주었다?"
"네. 초아 소저께서 이곳을 써도 된다고 하셔서.."
"초아가 자네에게 직접 이 방을 내주었다고 하였는가?"
'초아 소저를 알고 있으신가 보구나. 보아하니 하오문에서 초아 소저보다 더 윗분 같은데..나 때문에 그녀가 피해를 보면 안 되는데.'
"네. 하지만 그게 문제가 된다면 지금 바로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말에 어르신이 웃으며 말했다.
"흠흠. 아니, 나도 하오문 사람이 아니네. 그러니 내가 자네더러 어찌 나가라마라 하겠는가. 허허허."
"어르신도 하오문 사람이 아니십니까?"
"나도 한때는 하오문을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지금은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객이네."
"그럼 초아 소저와는 전에 하오문에 계실 때 알던 사이십니까?"
"뭐..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 자네는 초아랑 무슨 사이인가?"
"제가 초아소저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초아가 도움을 준다고.. 그냥 말인가?"
"그건 아니죠. 정보료를 받기는 하는데.. 제가 돈이 없어서 몸으로 때우고 있습니다."
"모.. 몸으로?"
나의 말은 들으신 어르신의 심기가 조금 언짢아 보였다.
"네. 하오문의 용병으로 이것저것 하고 있죠."
"아.. 그걸 말한 거였군. 자네 근골을 보아하니 무공을 꽤나 수련한 듯한데.. 밖에서 나와 몸 한번 풀어보지 않겠나?"
'어르신이 처음 내 방으로 들어오셨을 때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는데.. 한 수 배워보는 것도 좋겠지."
"네, 어르신. 나가시죠."
"어허허. 요즘 젊은이 같지 않게 뒤로 빼지 않고 나의 제안을 화끈하게 받아들이다니. 그건 내 마음에 쏙 드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