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 더냐?"
"주 어르신, 저희는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그저 채무 관계로 얽혀있는 사이입니다."
나의 대답에 초아 소저가 살짝 굳은 얼굴로 말했다.
"..채무 관계 맞아요. 아무래도 인피면구 값도 제가 일단 내고 외상으로 달아놔야겠네요."
"네.. 그렇게 해요. 초아 소저."
주통 어르신이 내게 웃으면서 말했다.
"껄껄껄. 사랑싸움은 딴 데 가서 해라, 요놈들아."
"그런 게 아닙니다. 어르신.."
"나 원 참 녀석, 그리 둔해서야.. 그건 어따 써 먹을꼬."
"네? 무엇을 말입니까?
주통 어르신의 말에 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고, 초아 소저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내 눈길을 피했다.
"뭐 됐고. 일단 만들어주기는 할 텐데.. 인피면구의 단점이 있다."
인피면구를 쓰다
"단점이요? 어르신, 어떤 문제가 있나요?"
나의 말에 주통 어르신이 자신의 집에 들어가더니 두 개의 인피면구를 들고 나왔다.
"자, 만져보거라. 네가 감각이 뛰어나다면 두 개의 차이를 알겠지."
주통 어르신이 건네준 인면피구를 만져보았는데 두 개 다 진짜 살처럼 촉감이 비슷했다.
그래도 집중해서 만지다 보니 두 개의 차이점이 느껴졌다.
"하나는 본인의 얼굴로 본을 뜨고 그것으로 만든 거 같고요. 다른 하나는 동물의 가죽인 거 같습니다."
"오호. 감각이 제법인걸? 그걸 구분하지 못하는 자들도 많은데.. 그런데 반만 맞았다."
"반이요? 어떤 게 틀렸나요?"
"본을 뜨고 그걸로 만든 것은 맞는데.. 다른 하나는 동물의 가죽이 아니라 죽은 자의 얼굴 피부다."
"네? 죽은 사람의 피부를요? 그럼 부패하지 않나요?
"부패가 진행되기 전에 피부를 떴고 방부처리를 해서 괜찮다. 하지만 이건 오래 착용할 수는 없지."
주통 어르신의 설명을 듣고 다시 만져보니 질감이 확실히 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주통 어르신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두 개 모두 단점이 있는데.. 사체를 가지고 만든 인피면구는 얼굴에 붙였다 떼는 게 쉬운 반면, 아주 가까이에서 보거나 절정고수쯤 되면 어느 정도 떨어져 있어도 본인의 얼굴이 아니라는 걸 알 수가 있다."
"다른 하나는요?"
"다른 하나는 본을 떠서 너의 얼굴형에 맞춰서 제작되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러워 인피면구를 얼굴에 쓰고 있다는 걸 모르지. 다만 단점이 얼굴에 특수한 염료를 써서 붙이는 거라 얼굴과 완전히 밀착되어 그냥은 떼어낼 수 없다."
주통 어르신의 말에 내가 다시 한번 물었다.
"그냥 떼어낼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한번 인피면구를 얼굴에 붙이면 거의 영구적으로 쓸 수 있지만 떼어내려면 특수한 약품으로 서서히 한 달 정도 녹여야 이상 없이 제거할 수 있다."
"만약 그냥 벗겨내면요?"
"그냥 떼어내면 네 원래 피부가 다 벗겨져 버리지. 그런 멍청한 짓은 생각도 하지 말거라."
주통 어르신이 설명을 끝내고 나를 보며 말했다.
"자, 이제 선택해라. 사체의 피부로 만든 인피면구로 얼굴에 맞게 만들어줄지, 아니면 네 얼굴의 본을 떠서 만들어 줄지 말이다."
"그래도 다른 사람에게 걸리지 않으려면 두 번째가 좋겠네요."
"그래. 네가 그렇게 결정했다면 그걸로 해주마. 노파심에 다시 말하는데 한번 붙인 인피면구를 제거하려면 나를 직접 찾아오너라. 아니면 아까 초아가 말했던 인피면구를 잘 만드는 장인들 있지? 그 두 사람을 찾아가면 특수한 약품으로 제거해 줄 거다. 다른 곳에서는 하면 안 된다. 이것만 명심해라."
"네, 어르신."
"자, 그럼 네 얼굴의 본부터 뜨자. 침상에 누워라."
주통 어르신은 침상에 누운 나의 얼굴에 염료를 바르고 섬세한 손길로 내 얼굴의 본을 뜨기 시작했다.
"어르신, 얼굴형은 그대로 두어야 하지만 광대뼈 부분에 다른 걸 넣거나 눈썹의 위치 같은 건 변형이 가능하죠?"
초아 소저의 말에 주통 어르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아주 과도하게 뭘 집어넣어 부자연스럽게만 하지 않으면 조금씩은 변형할 수 있지."
"그럼 지금처럼 곱상하고 잘 생기게 말고 조금은 투박하더라도 남자다운 모습으로 바꿔주세요."
"왜? 그게 네가 좋아하는 남성상이냐?"
'초아 소저가 전형적으로 상남자다운 모습의 남성상을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아니요. 전 무영 소협의 지금 모습이 더 낫다고 생각해요."
"그럼 왜 굳이 그런 모습으로 바꿔 달라는 것이냐?"
"너무 잘생긴 얼굴로 인피면구를 만들면 오며 가며 만나는 여인들이 다 무영 소협에게 달라붙어서 저희 일을 하는데 방해될 거 같아서요."
"껄껄껄. 좋은 건 너 혼자서만 차지하겠다는 게로구나."
"......"
'주통 어르신이 초아 소저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시는구나.'
"초아 소저는 제가 하오문 일을 돕는데 방해가 될까 그러는 것이니, 소저를 짓궂게 놀려 곤란하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 어르신."
나의 말에 주통 어르신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초아 소저에게 말했다.
"뭐라? 껄껄껄.. 초아야, 네가 앞으로 이 녀석을 가르치려면 고생깨나 하겠구나."
"어르신, 그만 해요. 자꾸 놀리면 아버지께 이를 거예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알았다. 그 친구는 요즘 어디 뭐하고 있나? 언제 한번 이곳에 놀러 오라고 해라. 안 본 지 너무 오래됐구나."
"사실 저도 아버지를 못 뵌 지 오래됐는데.. 연락이 잘 안 돼요. 워낙 바람 같은 분이시니까 어디선가 잘 지내고 계시겠죠."
'그러고 보니 초아 소저에게 아버지가 누군지 물어본 적이 없네. 주통 어르신과는 친우신 거 같은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물어봐야겠구나.'
일각 정도 지났을 때 주통 어르신은 본뜬 걸 특수한 약품에 담그더니 한참 뒤에 꺼내서 말렸다.
그러자 제법 그럴싸한 모양의 인피면구가 만들어졌다.
"이제부터 중요한 작업이니.. 둘 다 숨소리도 내지 말거라."
"네."
주통 어르신은 자리에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인피면구에 눈썹부터 한땀 한땀 심고 있었다.
그렇게 반시진이 지났을 무렵 주통 어르신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허리를 쭉 펴며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인피면구를 가져와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어떠냐? 기가 막히지? 응? 감쪽같지?"
난 주통 어르신이 만든 인피면구를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의 남자다운 사내 얼굴이었다.
"와.. 너무 잘 만드셨네요. 실제로 어딘가에 있는 사내 얼굴 같아요."
"그래야 인피면구인 걸 눈치 못 채지. 자, 이제 다시 눕거라."
내가 다시 침상에 눕자 주통 어르신이 내 얼굴 전체에 특수한 염료를 바른 후 조심스럽게 인피면구를 덮어 씌었다.
처음에는 내 얼굴에 뭔가 덮여있어서 어색하고 불편한 느낌이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염료가 마르면서 인피면구와 내 피부가 밀착되는 느낌을 받았다.
'이럴 수가. 인피면구가 내 얼굴로 흡수되어 진짜 피부가 된 느낌이다. 이렇게 달라 붙어버리니 떼어내기도 어렵지만 다른 사람도 이게 내 본 모습이라 생각할 수밖에. 주통 어르신은 정말 엄청난 장인이시구나.'
"자, 얼굴 표정을 지어보거라."
주통 어르신 말에 웃는 표정도 짓고 찡그리는 표정도 지었는데 자연스럽게 표정이 지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역시 실력 하나는 최고예요. 정말 무영 소협의 원래 얼굴처럼 표정 하나하나까지 자연스러워졌네요."
"훗. 네가 중원 최고라고 말했잖아."
초아 소저의 칭찬에 주통 어르신이 꽤나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어르신, 감사합니다."
"무슨 사정으로 인피면구를 쓰는지는 모르겠다만.. 빨리 문제를 해결하고 네 본 얼굴을 찾거라. 안 그러고 시간이 너무 지나면 나중에 네 스스로가 지금 그 얼굴이 네 얼굴인지, 과거의 얼굴이 진짜 네 얼굴인지 헷갈려 혼란을 겪을 거다. 주변 사람도 마찬가지고."
"네, 어르신. 명심하겠습니다."
"이제 가 보거라. 오랜만에 집중해서 진력을 쏟았더니 피곤하구나."
"네. 이만 가 보겠습니다. 편히 쉬세요."
"어르신. 다음에 들릴게요. 아버지께도 연락 닿으면 안부 전해 드릴게요."
"그래. 잘 가라."
주통 어르신은 방으로 들어가고 우리는 천하상단으로 향했다.
천하상단에 도착해서 먼저 천하진을 찾았다.
"초아 소저, 함께 오신 이분은 누구신가요?"
"나다. 무영이."
"목소리는 무영 형님이 맞는데.. 얼굴이.."
"인피면구를 쓰고 있어."
"형님 진짜예요? 너무 감쪽같아서 모르겠는데.."
천하진은 바뀐 내 얼굴이 신기한지 자꾸 만져보고 당겨보았다.
"아아.. 아..! 하진아, 세게 당기지 마. 진짜 아프다고."
"아이고. 형님, 죄송해요. 너무 신기해서. 헤헤"
초아 소저는 그런 우리 두 사람을 보며 미소를 짓다가 하진이에게 말을 했다.
"하진 공자님, 무영 소협이 인피면구를 쓰고 있다는 건 상단주님 이외는 비밀로 해주고요. 상단주님께도 비밀을 지켜달라고 전해주세요. 무슨 뜻인지 알죠?"
"그럼요. 형님이 쫓기는 신세니 비밀을 알고 있는 자가 적을수록 안전한 거니까요. 그런데 형님이 천하상단에서 쓰던 방을 새로운 얼굴을 가진 형님이 쓰시면 의심을 할 거고, 거기에 목소리가 똑같으니까 꽤 많은 상단 사람들이 알게 될 거 같은데.. 이 참에 방을 옮기고 다른 이름으로 묵으실래요?"
'하진이의 말이 맞다. 미처 그것까지 생각을 못했네.'
하진이의 말을 들은 초아 소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안 그래도 그동안 너무 오래 천하상단에 머물기도 했고 인피면구가 다른 상단원에 들킬 수도 있고 해서.. 저희 하오문 내 숙소로 옮기는 게 어때요? 무영 소협."
"어디로요? 하오문 숙소라면.. 설마.. 선녀유곽으로요?"
나의 말에 하진이는 살짝 부러운 눈초리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형님이 가신다면 서운하겠지만 초아 소저 말대로 그곳에서 묵는 게 형님에게는 더 안전할 수 있겠네요. 자주 놀러 갈게요. 매일 갈 수도 있어요."
"그래. 매일 와도 된다. 너는 언제든 환영해주마."
초아 소저가 우리 대화를 듣고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무영소협, 그곳에서 생활하면 밤새 잠 못 들 텐데 유곽에 어떻게 재워요. 호호호."
"그럼 어디에?"
"선녀유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하오문 광동 지부 숙소가 따로 있어요."
"아.. 그랬군요. 제가 오해했네요."
"풉. 무영 소협 뭔가 아쉬운 표정인데요."
"아니에요. 아쉽다니요. 오해에요."
"알겠어요. 믿을게요. 말 나온 김에 짐 싸서 바로 옮기자고요."
내가 짐을 싸서 나오자 하진이는 내가 천하상단을 떠나는 게 많이 아쉬운 듯 보였으나 먼 거리로 가는 건 아니기에 오래 붙잡지는 않았다.
초아 소저를 따라 하오문 숙소가 있는 전각에 들어섰다.
"생각보다 전각이 크네요. 여기에 하오문 문도들이 많이 살고 있나요?"
"아니요. 몇 명 안 살아요. 이곳은 하오문 광동 지부의 수뇌부들이 사는 곳이에요."
"몰랐네요. 초아 소저도 하오문 수뇌부 중에 한 명이에요?"
"네.. 그런 편이죠.. 호호호."
"하긴 그 정도 무공 실력을 지니고 하오문에서 평범한 직책을 맡고 있을 리가 없죠."
나의 말에 초아 소저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호호. 저를 너무 높이 평가해 주시네요."
"이곳에 와서 보니 오히려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하오문에서 초아 소저가 더 대단한 지위를 갖고 계신 게 아닐까 싶네요."
"흠흠. 전 그냥 향주님과 가까운 사이여서 그런 거예요."
"그런가요? 향주님도 이곳에서 생활하세요?"
"그렇긴한데.. 사람을 만나는 걸 원체 싫어하셔서 아마 이곳에 사셔도 마주칠 일은 없을 거예요."
"그렇군요.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하는데.. 다음에 뵐 일이 생길 때 해야겠군요."
초아 소저의 안내에 따라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고 침상에 누웠다.
천하상단에 썼던 방도 높은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만든 방이라 좋은 편이었지만 하오문 수뇌부들이 쓰는 방이라 그런지 방안의 모든 것들이 고급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침상에 누웠는데 너무나 부드럽고 편하여 이곳에 누우면 언제든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시 침상이 누워 눈을 감으니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
'방안에서 좋은 향이 나네. 어디선가 맡아본 향기인데.. 너무 좋은 느낌이 드는 향이다.'
눈을 뜨고 침상에서 일어나려다가 그 향에 취해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다음 날 아침까지 푹 자다가 날 깨우는 고운 목소리에 잠이 깼다.
"무영 소협, 아침밥 해 놨어요. 일어나요."
"네. 얼른 씻고 갈게요."
편한 침상에서 향기로운 향이 취해 푹 자고 일어나니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다 아침밥까지 차려놓고 기다리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으니 살면서 이런 호강을 언제 다시 누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