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무사의 귀환-60화 (60/114)

< 빚 청산 ---여기까지가 무료분입니다. >

황녀의 죽음으로 인해 나는 삶의 의지가 사라져버렸다.

정신적 충격에 갑자기 기혈이 역류해 피를 토하자 온몸에 힘이 빠져버린 나는 서 있을 힘조차 없었다.

눈앞이 뿌옇게 보이면서 그대로 앞으로 쓰러져 점점 정신을 잃어갔다.

무경원에서 고된 훈련과 전장에서의 목숨을 건 힘겨운 전투 속에서도 버틸 수 있던 힘은 오로지 그녀였는데..

'난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 거지.. 과거로 돌아온 이유는 뭘까? 전생도 이생도.. 삶이 정말 고단하구나.'

"무영 소협! 정신 차려요."

"무영아, 정신을 차려 보거라."

쓰러져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들었던 건 초아 소저와 초일 형님의 걱정 어린 목소리였다.

'이대로 쉬고 싶다. 영원히.. 깨어나지 않았으면..'

하지만 나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난 다시 눈을 떴다.

주변을 둘러보니 천하상단 내 나의 방안이었고 초아 소저가 내 옆에서 간호 중이었다.

"소저께 또.. 폐를 끼쳤군요."

"무영 소협, 일어나셨군요. 오래 못 일어나셔서 걱정했어요."

"제가 얼마나 이곳에 누워있었습니까?"

"오늘이 5일째였습니다."

"5일이나요? 제가 그렇게 오래 누워있었나요?"

"네. 의원을 불러서 진맥을 했는데 몸에는 큰 이상이 없다는데 도통 깨어나시질 않아서 다들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랬군요. 초일 형님은 화산파로 돌아가셨나요?"

"네. 소협이 쓰러지고 이틀 정도 곁은 지키다가 떠나시면서 저에게 소협이 깨어나시면 화산파로 연통을 달라 하셨어요. 소협에게는 서찰을 따로 남기셨고요."

초아 소저가 가져다준 서찰을 받아서 읽어보았다.

'네가 깨어나는 것도 보지 못하고 떠나서 미안하구나. 상심이 매우 큰 듯하니 마음을 잘 추스르고 몸이 좀 나아지면 화산파에 꼭 들리거라.‘

'..초일 형님도 정이 많으시구나. 작별 인사도 못 하고 보내서 미안하군.'

"하진 공자와 상단주께서도 걱정이 많으셨어요. 제가 나가서 알리고 올게요."

"고맙습니다. 초아 소저."

초아 소저가 소식을 알리려고 밖으로 나가고 혼자 있으니 다시 공허함이 밀려왔다.

그러자 그 날 잿더미 속에서 발견했던 사체 두 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황녀님과 함께 있던 건 분명 7호겠지.. 7호야, 나와 약속을 잊은 거니? 10년 안에 내가 찾아간다고 했잖아. 그렇게 떠나버리면 나는 어떡해야 하니..'

삶의 목표와 방향을 완전히 잃어버린 나는 천하진과 천하성 상단주가 방문하여 잠시 이야기를 나눈 것 외에는 일절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한 달 가까이 방에서 두문불출하는 나를 초아 소저가 가끔씩 찾아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다 갈 뿐이었다.

한 달이 지나고부터는 날짜와 시간 감각이 무뎌져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몰랐다.

하진이를 통해 내방에 주기적으로 넣어주는 술병이 쌓여있는 걸 보고서야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걸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초아 소저가 다시 날 찾아왔다.

"무영 소협, 벌써 두 달이나 지났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술에 취해 계시네요."

"초아 소저, 이렇게 누추한 곳에는 또 어쩐 일이신가요?"

"그동안은 너무 괴로워하시는 거 같아 말씀 안 드렸는데.. 의뢰비는 내셔야죠. 언제까지 외상으로 달아두실 거에요?"

'아.. 하오문의 의뢰비를 안 냈구나. 이대로 술이나 퍼마시다 죽으려 했는데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되네.'

나는 술에 취한 정신을 억지로 깨우며 그녀에게 물었다.

"금액이 얼마지요?"

"제가 하루에 보통 금화 5냥을 벌었는데 저같이 고급인력을 한 달 이상 쓰셨으니 150냥에 각종 경비를 더해 200냥은 내셔야 해요."

'군에서 받은 걸 다 합쳐도 금화 50냥뿐인데.. 이걸 어쩌지?.'

"금화 200냥이요? 지금 내 수중에는 50냥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죠?"

"천하상단의 하진 공자에서 빌려서 갚으셔도 돼요."

"그럼 하진이에게 빌려보겠습니다."

일어나서 하진이에게 가려는 순간,

'지금 내가 두 달 이상을 여기에 죽치고 있는 것도 엄청나게 폐를 끼치는 건데 염치없이 돈까지 빌릴 수는 없지.'

"소저, 빌려서 갚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겠습니까?"

"그럼 소협이 직접 몸으로라도 때우셔야죠."

"몸으로 어떻게요?"

"하오문에서 시키는 일을 해주시면 돼요."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언제부터 하면 될까요?"

"일단 깨끗이 씻고 오늘은 절대 술 마시지 말고 푹 잔 다음 내일 아침 일찍 선녀유곽으로 오세요."

"그리 하겠습니다."

초아 소저가 나가고 나는 방문을 열어 환기부터 시키고 방안의 술병을 치우며 정리를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묵은 때를 벗기고 수염도 다 깎고 냄새나는 옷을 빨아 입고 방으로 돌아왔다.

'죽을 때는 죽더라도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말고 가야지. 일단 빚을 갚을 때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하오문에서 시키는 일만 하자.'

초아 소저의 말대로 술도 마시지 않고 일찍 자고 일어났더니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씻고 바로 선녀유곽으로 향했다.

선녀유곽은 아침이라 문이 열려 있지 않았는데 내가 온 걸 어찌 알았는지 초아 소저가 나와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약속을 지키셨네요. 그런데 이렇게 말끔한 모습이 하도 오랜만이라 낯설게 느껴지네요. 호호호"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웃음에 나도 모르게 같이 미소를 짓게 되었다.

'정말 오랜만에 그녀의 웃음을 보는군. 초아 소저와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그만큼 자주 보고 편해져서 그런 거겠지.'

"오늘부터 무슨 일을 하면 될까요?"

"저와 같이 하오문에 의뢰를 하고 떼어먹은 자들에게 가서 빚을 받아낼 거에요."

"그런 사람이 많나요?"

"금액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의외로 많이 있어요. 계약금만 선납이고 나머지는 의뢰를 수행하고 정보를 넘기면서 받는데.. 종종 외상으로 하는 경우가 있어서요."

"저처럼요?"

"네, 뭐.. 비슷하죠. 호호."

"그렇군요. 전 아직 잘 모르니 초아 소저께서 가르쳐주세요."

"그럼 지금부터 절 잘 따라 다니세요."

초아 소저를 따라 광동성에 있는 사자방에 도착했다.

"이곳 사자방은 광동성에 있는 사파 문파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문파에요. 문도 수도 많고 사자방 방주가 절정고수라 하오문에 빚을 지고도 안 갚고 버티고 있어요."

"제가 들어가서 달라고 하면 되는 겁니까?"

"그냥 달라고 하면 안 되고, 하오문에서 왔다고 이야기하고 금화 30냥을 달라고 하면 돼요. 그래도 안 주면 적당히 손 봐주고 나오면 되고요."

"죽여도 됩니까?"

"이왕이면 죽지 않을 정도만 패 주시고, 정 안되면 죽이시든 알아서 하세요."

"알겠습니다."

나는 사자방으로 정문을 지키는 사자방 문도에게 하오문에서 왔다고 알렸다.

"하오문에서 사자방에는 무슨 일이지?"

"여기 방주님이 하오문에 빚이 있으셔서요. 빚 받으러 왔습니다."

"하오문 사람들이 꽤나 겁이 없어졌군. 사자방까지 찾아와서 이렇게 큰소리를 치고 말이야."

아직까지 하오문의 진정한 실력을 모르는 자들은 하오문이 그저 정보만 팔고 무공실력은 낮은 자들이라 생각을 했다.

하오문의 구성원이 주로 점소이나 기루의 여인들처럼 천대시 하는 자들이었기에 사자방 같은 사파 문파에서조차 하오문을 무시하고 있었다.

"방주님을 직접 뵙고 싶습니다."

"우리 방주님은 아무나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이곳에 더 있다가 혼나기 전에 썩 돌아가라."

"아니, 빚을 지고도 이리 당당하다니.. 사자방 사람들은 다들 양심도 없습니까?"

"이 자가 매를 버는군."

화가 난 사자방 문도가 나에게 주먹을 내지르자 나는 그의 팔을 꺾은 채 그를 끌고 정문을 지나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사자방 장원 안에는 사자방 문도가 바글바글거렸다.

'첫날부터 제대로 몸을 풀게 생겼군.'

데리고 들어온 문도의 팔을 풀며 밀어버렸더니 그대로 꼬꾸라졌다.

"웬 놈이냐?"

"좋은 말로 해서는 말을 안 듣는군. 하오문에서 빚 받으러 왔다니까."

"하오문? 그것도 혼자서 사자방에 쳐들어와서 빚을 갚으라니. 푸하하. 이 자가 단단히 미쳤구나. 얘들아 쳐라!"

사십 명이 넘는 사자방 문도가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움직임을 볼 때 일류고수 이상은 없는 듯했다.

단번에 이렇게 많은 자들과 싸운 것은 전장에서 여진족과 싸울 때 말고는 없었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것은 그때는 검으로 상대를 한 명씩 죽여서 줄여갔다면, 이번에는 이 많은 인원을 죽지 않을 정도로 패서 제압해야 한다는 어려운 과제가 있었다.

24반 무예 박투술.

내가 익힌 무예 중 사람을 죽이지 않고 제압할 목적으로는 24반 무예 중 박투술 만한 게 없었다.

내게 밀려드는 사자방 문도들의 발을 넘어뜨리고 주먹으로 치고 머리로 박치기하고 내 온몸이 흉기가 되어 한 명씩 피투성이로 만들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전에 석견이에게 외공을 가르치면서 나도 조금은 외공을 익혔었는데 그게 박투술을 쓰는데에 도움이 되었다.

일각이 지났을 무렵, 사십여 명의 사자방 문도들은 모두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너부러졌다.

안쪽 내원으로 들어가니 사자방 수뇌부 네 명이 보였다.

"너는 누구지? 몰골이 말이 아니구나."

"방주는 어디 있나?"

"뭐야. 이 자식. 방주님을 노리고 왔구나. 바깥에 우리 애들이 있었을 텐데."

"다들 피곤한지 바닥에 누워있더군."

"여기까지는 용케 왔다만 이곳은 통과 못 한다."

네 명은 호기롭게 나에게 달려들었는데 몇 초식을 상대해보니 네 명 모두 초일류 고수였다.

보통은 초일류 고수 세 명이면 절정고수 한 명을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절정고수도 그 경지에 따라 초일류 고수 4명도 제압할 수 있었다.

이들 네 명 정도면 능히 절정고수 한 명은 제압할 만한 실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너희들은 상대를 잘못 만났어. 난 초절정을 눈앞에 둔 절정고수라고.'

이들을 24반 무예 중 박투술로 상대하기에는 벅차 보였기에 무공을 전환했다.

'오랜만에 열화신공과 한빙신공을 동시에 써 봐야겠군.'

내가 양손에 각각 열화신공과 한빙신공의 내기를 모으자 그들은 긴장하며 나를 상대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장기인 사자권과 사자신장을 쓰며 나를 압박했지만 한빙신장과 열화신장으로 반격하자 상황은 역전되었다.

두 사람은 나의 한빙신장을 상대하면서 머리카락이 하얗게 얼어붙으며 몸이 점점 차갑게 굳어 가는 걸 느끼고 있었다.

반대로 나머지 두 사람은 땀을 뻘뻘 흘리며 뜨거운 용암 옆에 있는 듯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몸이 타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세상에 이런 무공이 다 있다니.."

"그러게 말일세. 양손에 서로 다른 무공을 쓰는 것도 모자라 극양, 극음의 무공을 같이 쓰다니!"

"이분은 우리의 상대가 아닌 것 같네. 고수님, 살려주세요!"

"사.. 살려 주십시오."

사자방 수뇌부 네 명은 승산이 없다는 걸 일찌감치 깨닫고 싸움을 멈추고 내게 살려달라고 빌었다.

내가 진기를 멈추었지만 이미 그들 몸속에 침투한 한기와 화기는 계속해서 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하오문 고수님.. 너무 괴롭습니다. 저희 좀 살려주세요."

"고수님. 저희 몸에 한기 좀 빼 주십시오."

"저.. 저도 화기 좀 빼 주세요. 제발"

나는 친절하게 그들의 화기와 한기까지 제거해 줄 생각이 없었다.

"그 정도로 죽지는 않아. 한동안 정양하며 내공으로 한기와 화기를 다스리면 몇 달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그 말을 하고 나는 방주를 찾아서 장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안쪽으로 들어가 방주의 방으로 보이는 곳의 문을 열자 아침부터 여인과 방주가 민망한 행위를 하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옷을 가지고 뛰쳐나갔고 방주는 헐레벌떡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입고 외쳤다.

"웬 놈이냐?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하오문에서 빚 받으러 왔다. 문이 열려 있으니 들어왔지."

"밖에 아무도 없느냐?"

"다들 바빠서 여기 오기 힘들 거야."

"넌 내가 누군지 알고도 이러는 것이냐? 하오문 놈들이 정말 미쳤구나. 사자방을 이리 무시하고도 광동성에서 니들이 살아남을 성 싶으냐?"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일단 빚부터 갚아. 지금 당장."

사자방의 방주 사일섭은 극도로 흥분했는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자신의 침상 옆에 걸려 있는 사자도를 꺼내 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그에게 한마디 했다.

"어휴. 사자방에는 말로 해서 들어 처먹는 놈들이 없군."

< 빚 청산 ---여기까지가 무료분입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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