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무사의 귀환-55화 (55/114)

< 내분 >

다음날 우리가 예상한 대로 상단의 꽤 많은 이들이 전날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

상단주가 건재할 때는 보이지 않던 균열이 상단주의 부재 상황이 되자 표면으로 올라와 크고 작은 충돌을 만들어냈다.

"1단계는 계획대로 가는 거 같으니 2단계를 진행 시켜야겠네요."

"그러네요. 이렇게 빨리 1단계에서 2단계로 넘어갈 줄은 몰랐네요."

내 방에서 수향 소저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하진이가 들어왔다.

"형님, 상단이 시끄러워졌네요.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지 않나요?"

"안 그래도 수향 소저와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곳은 준비가 된 거니?"

"네. 그곳에 친분이 있는 분이 계셔서 잘 말해 놓았어요. 제가 모시러 가면 그분이 바로 오실 거에요."

"오늘 바로 그분을 모셔 오는 게 좋겠다."

"그럼 말 나온 김에 지금 다녀올게요."

하진은 곧장 내 방을 나섰고 방안에는 다시 우리 두 사람만 남겨졌다.

"초아 소저, 하오문에서는 별다른 소식이 없었나요?"

"어제 하진 공자님께 받은 명단을 하오문에 보내 그들의 최근 행적을 조사해 봤는데 특별한 것은 없었다고 하네요."

"그럼 어제 선동한 이들이 직접 나섰다고 보기는 힘들겠군요."

"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이 밀고 있는 후계자를 세우려 세력 싸움을 하는 것 같고요. 실제로 그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다른 이가 있겠죠."

"2단계가 진행되면 그자도 결국 모습을 드러내겠죠."

갑자기 소향 소저가 날 빤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소협께서는 이미 범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가 있군요?"

"의심하는 자가 있기는 하지만 아니길 바라고 있죠."

"소협의 표정을 보니 의심이 아니라 거의 확신을 하고 있네요."

"제 표정이 그렇게 티가 납니까? 그런데 그자가 범인이라면 이런 행동을 한 이유를 모르겠어요."

"저에게 의심하고 있는 사람을 말해주어야 그 뜻을 이해하죠."

나는 조용히 귓속말로 그녀에게 말했다.

"음.. 저도 약간 의심은 했지만 소협처럼 확신은 갖지 못하겠네요."

"그자가 범인이라면 하진이가 화산파에 있을 때 상단주를 제거했으면 되었는데.. 왜 이렇게 길게 끌었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일단 2단계가 시작되고 나면 그자든 그 윗선이든 움직일 테죠. 그런데 윗선이 저나 소협이 생각하는 그곳일까 봐.. 그게 더 두렵네요."

'저도 그들이 아니길 바라지만.. 맞다 해도 싸워서 이길 거에요.'

"일단은 그들이 누구든 걸어온 싸움이니 피할 수는 없어요. 우리의 힘만으로 힘들면 도움을 받을 곳을 찾아야겠죠."

"보통은 어려운 싸움은 피하려 하는데 소협은 일단 부딪쳐보자는 생각인 것 같네요. 보기보다 더 위험한 남자였군요."

"그러고 보니 제 일생이 안전한 삶과는 거리가 머네요."

우리 둘이 대화를 한참하고 있을 때 밖에서 쿵 하는 소리와 검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수향소저가 급히 밖으로 나가보니 상단의 많은 이들이 이미 한데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소란의 원인을 찾아 눈길을 돌리니 주강 행수가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운선 행수와 두호 행수가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운선 행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무리 화가 났다고 주강 행수를 갑자기 공격하여 저리 내동댕이칩니까?"

"두호 행수, 아무리 생각이 달라도 해도 될 말이 있고 안 되는 말이 있습니다. 주강 행수는 하진 공자가 상단주 자리를 탐내 대방어른이 저리되도록 만들었다는 막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아직 모르는 일이지요. 대방 어르신이 이대로 못 깨어나신다면 가장 이득을 보는 이는 첫째 공자시니까요."

"아니, 이 사람들이 정말!"

운선 행수가 노기가 차올랐는지 검을 들고 두호 행수에게 달려들어 맹렬히 휘둘렀다.

두호 행수는 그가 자신을 공격할 줄 예상하고 있었는지 생각보다 침착하게 잘 피해내고 반격할 준비에 들어갔다.

운선 행수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지만 예리함이 떨어져 두호 행수의 몸 근처에도 닿지 못했다.

'둘 다 일류고수로 실력은 비슷한 듯한데, 한쪽이 너무 흥분해서 일방적으로 밀리게 생겼군.'

다시 한번 운선 행수가 검을 두호 행수의 복부를 향해 내질렀을 때 두호 행수는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나며 피해버렸다.

운선 행수가 자신의 검을 거두기 전에 두호 행수의 검이 그의 오른팔을 향해 날아들었다.

상단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곧 운선 행수의 팔이 잘려나갈 거라 생각하는지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운선 행수도 자신의 팔을 빼기에는 이미 늦은 걸 알기에 체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진이를 지지하는 사람이든 상대측이든 너무 심하게 다치는 건 천하상단의 앞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난 품 안에서 동전을 꺼내 두호 행수의 검을 향해 암기처럼 던졌다.

내 손을 빠져나간 동전은 직선으로 쏘아져 나가 두호 행수의 검면을 때렸고, 검의 궤적이 전혀 다르게 바뀌어 허공을 가르며 헛손질을 했다.

"감히 나를 방해하는 자가 누구냐?"

"손속이 너무 과한 듯하여 제가 나섰습니다. 같은 상단 사람끼리 피를 보는 건 피하셔야죠."

"첫째 공자가 데려온 객이군. 지금 여기는 상단 내부의 일이니 그대가 낄 자리가 아니오."

"전 상단주이신 천하성 대방을 아저씨라 부르고 그분께서 하진이를 도와주라 하셨으니, 저와 천하상단은 인연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저씨라 부른다고? 대방께서 누워계신다고 거짓부렁을 지껄이는구나.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나대면 제 명을 못 채우고 죽는다."

'이 자는 천하상단에 도움이 되지 않겠다. 정신을 차리게 혼내 줄 필요가 있겠어.'

"그럼 저에게 한 수 가르쳐 주시지요."

"굳이 좋은 술 놔두고 벌주를 마시겠다면 내 한 수 가르쳐주지. 다만 난 자네가 첫째 공자 친우라고 봐 줄 생각 따위는 없네."

"저의 검에도 눈이 없으니 알아서 조심하십시오."

'내가 익힌 무공들은 다른 사람 눈에 띄면 곤란하니, 최대한 나의 무공을 숨기면서 싸워야겠구나.'

두호 행수의 실력은 아까 운선 행수와의 대결에서 어느 정도 파악했기에 긴장이나 떨림 같은 감흥이 전혀 없었다.

'실력 차이가 많이 나니 이번에는 내 스스로에게 제한을 걸고 싸워 봐야겠다.'

나는 일부러 눈을 감고 오로지 기감만으로 두호 행수의 검을 피하기로 마음먹었다.

'과거로 돌아와서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지만, 전생에서는 질리도록 이런 훈련을 해봤으니 낯설지는 않다.'

눈을 감고 기감으로 그자의 검이 내게 날아오는 것을 느끼고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려 막으면서 위치를 파악했다.

그다음부터는 검으로 막지 않고 오직 기감으로 느껴서 그자의 검이 내 몸에서 한치(3센티)씩만 빗겨나가도록 피했다.

한참을 그렇게 피하니 이제는 눈을 감고 있어도 눈을 뜨고 보고 있는 것처럼 그자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내게 느껴졌다.

두호 행수도 계속해서 자신의 검이 조금씩 빗나가는 것에 대해 이상함을 느꼈는지 내게 외쳤다.

"네 놈 무슨 사술을 부리는 것이냐!"

"사술이라니요. 전 행수께서 제가 첫째 공자인 하진이의 친우라고 손속에 사정을 두시는 줄 알았는데요."

나의 말에 모여있던 상단 사람들 중에서 두호 행수를 비웃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떤 사술을 익혔는지는 모르겠지만 눈까지 감고 싸워서 날 제대로 망신주려고 작정한 듯하니 나도 더 이상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 주강 행수 나오게."

주강 행수가 걸어 나오고 그들은 나를 상대로 합격술을 펼칠 준비를 했다.

'두 사람이 함께 공격한다고 해도 피하는 것 정도는 기감만으로 상대할 수 있겠지?'

일류고수인 두 사람이 펼치는 합격술은 생각보다 위력적이었다.

합격술을 펼칠다고 무조건 실력이 배가 되는 건 아닌데 이들의 공격은 한 명이 공격에 들어가면 나머지 빈 공간을 다른 한 명이 공격하면서 좀 더 짜임새 있고 날카로운 공격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까 두호 행수를 상대할 때보다 배 이상으로 힘들어졌군. 두 사람이 함께 합격술을 연마한 지 오래된 건가.'

눈을 감고 기감으로 상대하는 건 계속하고 있었지만 두호 행수를 상대할 때만큼 여유는 없었다.

'괜히 여유 부리다가 낭패를 당할 순 없지. 슬슬 반격을 시작해야겠다.'

두호 행수의 검을 피한 뒤 그 옆으로 다가가 그의 오른쪽 다리 발목을 걸어서 들어 올렸다.

이건 24반 무예의 박투술에 한 가지로 단순한 듯하지만, 이것에 걸리면 공중으로 살짝 뜬 상태로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지는 게 다반사였다.

두호 행수 역시 공중으로 붕 떴다가 바닥으로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 모습을 본 주강 행수가 검을 휘두르며 나를 살짝 물러서게 만든 후 두호 행수를 보고 말했다.

"두호 행수 괜찮습니까?"

"......"

두호 행수는 많은 사람 앞이라 창피해서 그런지 아니면 정말 아픈 건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쓰러진 그 상태로 있었다.

주강 행수는 자신이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걸 인식했는지 과감한 공격을 하지 못했다.

나는 이 싸움을 길게 끄는 게 좋지 않다고 생각하여 주강 행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주강 행수는 갑자기 내가 공격을 해오자 당황하며 뒤로 물러서려 하였다.

나는 그가 물러선 만큼 더 바짝 다가가 그의 옷깃을 잡아채 두호 행수가 있는 곳으로 그대로 던져버렸다.

두 행수는 크게 다치진 않았으나 많은 상단원들 앞에서 망신을 당해서인지 한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싸움이 싱겁게 끝나자 상단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운선 행수가 나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고 다가왔다.

"소협, 저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협께서 나서주지 않으셨다면 외팔이로 살 뻔했습니다."

"하진이를 대변하기 위해 나서시다가 그리되신 것이니 당연히 도와야지요."

"하진 공자의 친우 분께서 이리 대단한 고수인지 몰랐습니다. 앞으로도 하진 공자를 많이 도와주십시오."

"네. 저도 하진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상단 내부의 소란이 대강 마무리가 되었을 때쯤 하진이가 외부 문파 사람을 데려오면서 다시 분쟁이 시작되었다.

"나는 홍가장의 장주 홍희관이요."

그가 이름을 밝히자 상단원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홍가장은 대문파는 아니었지만 남부지역에서는 나름 위명이 있는 문파였고 특히 광동성에서는 수위를 다투는 문파였다.

그런 문파의 장주가 하필 상단주의 부재로 혼란스러운 상황에 방문하였으니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이공자인 천하문이 앞으로 나서 귀빈을 맞았다.

"아니. 홍가장 장주님께서 여기까지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난 하진 아우가 5년 만에 화산파에서 돌아왔다기에 오랜만에 아우와 담소도 나눌 겸해서 같이 들렀소이다."

"아, 하진 형님과 친분이 있으셨군요. 전 천하상단의 둘째 천하문입니다."

"하진 아우의 동생이었구먼. 반갑네."

그의 말에 일공자를 지지하는 쪽은 환영하는 듯했고 반대로 이공자를 지지하는 쪽은 굳은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네, 장주님. 한데 지금은 아버지께서도 편찮으셔서 상단 내 분위기가 안 좋습니다. 그러니 다음 기회에 방문하셔서 담소를 나누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자네가 지금 나에게 축객령을 내리는 것인가? 하진 아우가 초대한 손님의 거취를 허락도 없이 자네 마음대로 결정한단 말이야?"

홍희관이 노기가 찬 음성으로 말하자 다들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저 시기가 좋지 않다는 말을 했을 뿐인데.. 그리 노하실 일은 아닌 듯합니다."

"자네가 하진이를 무시하고 상단에서 안하무인으로 지낸다는 소리는 내 전부터 주변 사람들을 통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네. 그렇다고 감히 나까지 무시하러 들다니 윗사람으로써 자네를 따끔하게 혼을 내줘야겠군."

그의 말에 천하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뒷걸음질을 칠 때 그의 앞으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 내분 > 끝

ⓒ 청운검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