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끼몰이 >
내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눈앞에 처음 보는 낯선 동굴이 보였다.
내 옆에는 수향 소저가 있었고 그녀가 내게 죽을 떠먹이고 있었다.
나는 중독되어 쓰러진 이후 정신을 잃어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기에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소저 어떻게 된 거죠? 제가 왜 이곳에.."
"무영 소협께서 오독교 담 넘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쓰러져 계셔서 제가 급히 동굴로 모셔왔어요."
나는 급히 몸 안에 진기를 돌려보며 혈맥이 막히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진기가 원활하게 도는 걸 보면 중독 증세는 사라진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제가 정신을 잃을 때 만해도 춘약에 중독된 상태였는데.. 지금은 증세가 다 나은 듯합니다. 혹시.. 제가.."
"아.. 그건 제가 가지고 있던 해독약을 먹였어요. 그리고 일부는 지금 소협 목에 걸려있는 피독주가 없애주었고요."
"아.. 그랬군요. 소저께서 해독약을 가지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네.. 다행이에요. 하루 동안 정신을 못 차리셔서 걱정했어요."
"벌써 하루가 지났나요?"
"네. 어젯밤부터 오후까지 정신을 잃고 주무시기만 했어요."
"그랬군요. 이제는 제 진기도 원활하게 돌고 상단으로 돌아가도 될 거 같습니다."
"그래도 독에 중독되어 정신을 잃고 이제 막 깨어난 거니, 오늘까지는 여기에서 죽을 먹으며 충분히 쉬고 내일 돌아가요."
수향 소저의 단호한 말투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가 떠주는 죽을 받아먹었다.
'누군가에게 간호를 받는다는 게 생소한 경험이라 어색하기는 하지만 나쁘지는 않군.'
"오늘은 다른 생각 말고 푹 자요."
나는 수향 소저의 말대로 죽을 배불리 먹고 다시 잠을 청했다.
자다가 누군가 내게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져 살짝 잠에서 깨어 몸의 근육을 바짝 긴장시켰다.
'이 향기는.. 수향 소저의 몸에서 나는 향기 같은데..'
다가오는 이가 수향 소저라는 걸 알고는 긴장을 푼 채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내게 점점 다가오더니 자신의 외투를 벗어서 나에게 덮어주고는 옆쪽으로 가서 누웠다.
'아픈 날 위해 자신의 외투까지 벗어 주다니.. 정말 마음이 따뜻한 여인이구나.'
다음 날 아침, 전날에 푹 자고 일어났더니 몸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잘 잤어요? 몸은 이제 아프지 않나요?"
"네. 소저 덕분에 아주 좋아졌습니다. 오히려 소저가 많이 피곤해 보이시네요. 어제 잘 못 잤어요?"
"아니에요. 저도 잘 잤어요. 다만 밖에서 잔 적이 처음이라 몸이 조금 불편했나 봐요."
"그러시군요. 저 때문에 소저를 노숙하게 만들어서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그렇지만 그렇게 미안하면 나중에 제가 원할 때 제 부탁을 들어주세요."
"네, 그럴게요. 제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제가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라면 꼭 들어드릴게요."
수향 소저는 나를 향해 생긋 웃어주었다.
'어? 이상하다. 오늘은 그녀의 웃음을 봤는데도 심장이 요동치지 않는다. 그녀가 웃으면 뭔가 참기 힘든 기분이었는데.. 이제 그녀 웃음을 보니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고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나는 그녀에 대한 이런 마음이 여전히 무슨 감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동굴에서 나온 우리는 즉시 천하상단으로 돌아가기 위해 움직였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더니 늦은 밤이 되어서야 천하상단에 도착했다.
천하상단에 도착하자 소식을 들은 하진이 뛰어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형님, 수향 소저 무사하셨군요. 어제 아침부터 형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는데 아무 소식도 없고 통 오시질 않아서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을 많이 했어요."
"미안하다. 내가 독에 중독되어 정신을 잃는 바람에.. 바로 올 수가 없었다."
하진이 놀라서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세상에! 독에 중독되어 정신을 잃었다고요? 형님, 지금은 괜찮은 거예요?"
"그래. 중독되고 정신을 잃었을 때 수향 소저가 날 발견하고 바로 해독약을 먹여 주셨어. 지금은 독기도 다 빠지고 괜찮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다."
"자칫하면 큰일 나실 뻔했는데.. 소저가 해독약을 가지고 계셔서 정말 다행이네요."
"그래. 수향 소저에게 해독약이 없었으면 큰 낭패를 당할 뻔했지."
하진이 내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희 아버지를 구해주시려다가 형님이 위험한 일을 당하셨네요. 제가 갔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아니야. 오독교는 내가 자진해서 다녀온 거니까. 그리고 어찌 됐건 이렇게 무사히 다녀왔으니 더 이상 내게 미안할 필요는 없어."
"형님, 정말 감사해요. 그리고..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죄송하긴 하지만.. 상사화는.. 구하셨나요?"
"아! 내가 미처 말을 안 했구나. 여기, 상사화와 대극이다."
나는 품 안에서 상사화의 꽃과 잎을 말린 것, 그리고 대극 뿌리 말린 것을 꺼내어 하진이에게 건네주었다.
이를 건네받은 하진은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며 나와 수향 소저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형님 덕분에 이제 아버지도 무사하실 수 있겠어요. 형님, 아버지께 이걸 다려드리면 곧 건강을 되찾으시겠죠?"
"그래. 내가 이미 경험했으니 분명 효과가 있을 거다. 얼른 탕약을 만들어서 가져다드려. 세 가지 재료를 혼합해서 다리는 대신 각각의 재료는 소량씩만 넣어야 한다."
"네, 알겠어요."
하진은 세 가지 재료를 가지고 탕약실로 가서 정성껏 다려 상단주의 방으로 들고 왔다.
상단주의 방에는 병상에 누워있는 상단주와 수향 소저, 하진이 그리고 나까지 네 사람이 있었다.
하진은 자신이 정성껏 다려 온 탕약을 상단주의 입에 넣어주었다.
잠시 후, 정신을 잃고 깨어나지 못하던 상단주 천하성이 입에서 탕약을 뿜어내듯 뱉어냈다.
"혀..형님! 아버지가 갑자기 왜 이러시죠?"
"처음에 몸 안의 독기와 새로운 독기가 부딪쳐 저런 반응이 나온다. 좋아지는 명현 반응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 남은 탕약을 다시 넣어드려요?"
"그래. 이번에는 뱉어내진 않으실 거다."
나의 말대로 하진이 상단주의 입에 다시 탕약을 넣었는데 이번에는 뱉거나 하지 않았다.
탕약을 다 넣은 후 하진이 자신의 아버지 얼굴을 한참 보더니 말했다.
"형님, 아버지 눈 밑에 검게 보이던 부분이 사라지고 얼굴의 혈색이 전체적으로 밝아졌어요."
하진이의 말을 듣고 상단주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정말 혈색이 좋아지고 있었다.
"너희 아버지 몸에 쌓인 독이 생각보다 양이 많지는 않았었나 보다."
"그렇다면 형님이 얘기한 것보다 좀 더 빨리 회복될 수 있겠네요."
"그렇지. 대신 너희 아버지가 호전되고 있다는 사실은 당분간 상단 내에는 알리지 말아야겠다."
"저번에 말한 범인을 잡기 위한 건가요?"
"그래. 네 아버지께서 깨어나시고 독을 제거할 방법까지 알았다는 걸 눈치챈다면 반드시 다음 행동을 할 것이니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범인을 잡아야지."
"일단 아버지가 깨어나시면 범인을 잡을 함정을 만들어야겠군요."
"그래. 오늘 중에 상단주께서 깨어나시면 이 일을 상의하고 범인을 제거해야지."
밤이 되자 상단주가 정신을 차리고 침상에서 일어났다.
"하진아.. 내가 며칠이나 누워있었느냐?"
"삼일 정도 누워계셨어요."
"아무래도 내가 이달을 넘기기 힘든 모양이구나."
"아니에요. 아버지, 무영 형님이 해독할 수 있는 탕재를 가져와서 탕약을 지었어요. 꾸준히 드시면 한 달 안에 완벽하게 나으실 수 있어요."
그러면서 하진이 그간 있었던 일들을 소상히 천하성에게 말해주었다.
"무영아, 정말 고맙구나. 가망이 없을 줄 알았는데 네가 날 살렸구나."
"아니에요. 아저씨,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아니다. 아무나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일을 하지는 않지. 앞으로 나와 우리 천하상단은 무영이 네가 무슨 일을 하든 네 편이 되어 적극적으로 도와주마."
"감사합니다. 아저씨."
상단주가 정신을 차리고 나자 본격적으로 이 일을 일으킨 범인을 잡기 위한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작전 회의를 하고 어느 정도 계획을 잡은 우리는 다음날부터 이를 실행하기로 하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수향 소저를 붙잡고 말했다.
"초아 소저, 제가 하오문에 의뢰한 세 번째 정보를 조금 빨리 받아볼 수 있을까요?"
"아마 지금쯤이면 어느 정도 조사가 되어 있을 테니, 조금 빨리 앞당기는 것도 가능할 거에요."
"그럼 초아 소저, 부탁 좀 하겠습니다."
"무영 소협, 저에게 빚진 게 꽤 많다는 건 알고 있죠?"
"아.. 네. 이번에 목숨도 빚을 졌고 여러모로 초아 소저께 갚을 게 많네요."
"알고 계시니 다행이네요. 나중에 이자까지 쳐서 두둑이 받아낼 거에요."
"네, 알겠어요. 이만 들어가셔 쉬어요. 오늘 하루종일 움직이느라 힘들었을 테니."
"소협도 가서 좀 더 쉬세요. 중독된 건 나았지만 몸이 정상은 아닐 거에요."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하진이가 상단사람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아버지께서 아직까지 깨어나고 있지 못하고 계시니 천하상단 대방의 장자로서 앞으로의 상단 운영에 대해 전반적인 논의를 하려고 여러분을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상단주님이 영영 안 깨어날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겁니까?"
"대방 어르신이 아직 살아계신데 무슨 상단 운영을 논의한답니까?"
하진의 말에 천하상단에서 잔뼈가 굵은 두호 행수와 주강 행수 두 사람은 크게 반발하였다.
"두호 행수님 그리고 주강 행수님, 첫째 공자님의 말뜻이 그게 아니라는 걸 알잖아요."
"운선 행수님이 전부터 무조건 첫째 공자의 편만 드는 건 상단사람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은 일공자께서 나설 일이 아니십니다."
"맞아요. 대방께서 첫째 공자에게 후계자 자리를 주려 할 때는 무공을 배운다면서 화산파의 속가제자로 들어갔다가 5년 만에 돌아오자마자 상단 주인 행세를 하면 안 되지요."
상단의 많은 이들이 천하진의 복귀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있는 듯했다.
"여러분의 말이 맞습니다. 전 상단을 이끌 자격이 없지요. 하지만 아버지께서 누워계시는 동안은 자식된 도리로 상단이 잘 돌아갈 수 있게 누군가는 앞장서야 하기에 이러는 겁니다."
"대방 어르신을 대행하려면 첫째 공자가 아니라 항상 대방 어르신을 옆에서 보좌했던 둘째 공자가 맡아서 하는 게 맡지요."
상단은 첫째 하진이를 지지하는 쪽과 둘째 천하문을 지지하는 쪽으로 갈려서 논쟁을 하고 있었다.
하진이는 그들을 한번 둘러보더니 한마디 말을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저는 어느 쪽으로 결정 나더라도 그 뜻에 따를 테니 여러분께서 서로 의견을 나눠보시고 알려주세요."
그곳을 빠져나온 하진이가 나와 수향 소저에게 말했다.
"형님이 하라고 해서 하기는 했는데 이렇게 하면 두 패로 나뉘어 상단사람들만 더 혼란에 빠지지 않을까요?"
"분명 너희 아버지께 독을 하독한 자는 원하는 것이 있어서 몇 년 동안 그렇게 한 것이니 혼란이 발생하면 분명 그자가 다음 행동을 옮길 것이다."
"그럼 우리는 기다리기만 하면 되나요?"
"일단 덫은 놓았으니 그가 함정에 빠지기만 기다려봐야지."
듣고 있던 수향 소저가 몇 마디 더 말을 보탰다.
"공자님, 저에게 상단주님의 음식이나 탕약에 접근할 수 있는 이들의 명단을 주세요. 그들의 최근 행적을 따로 알아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소저."
그렇게 범인을 잡기 위한 덫을 놓으면서 토끼몰이가 시작되었다.
< 토끼몰이 > 끝
ⓒ 청운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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