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사화를 찾아서 >
수향 소저의 설명을 듣고 나니 눈앞에 보이는 해남도라는 섬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해남도에 두 사람이 갔다면 어떻게 하죠?"
"그렇다면 한동안 찾기가 어렵겠죠. 우리의 눈과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라서요."
"전국 어디든 하오문의 눈이 있다고 했는데 해남도에는 손길이 닿지 않는다니요?"
"해남도가 섬 자체는 굉장히 큰 섬이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인지 객잔은 하나뿐이고 그마저도 해남파가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어요. 그리고 기루나 유곽 같은 곳은 해남파에서 일체 금하고 있어서 우리 하오문의 정보원이 상주하기 쉽지 않은 곳이에요."
'해남도 전체를 해남파가 직접 관리하고 있다고 해도 그 안에 하오문 문도를 하나도 심어놓지 못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군.'
"하오문 문도 중 하나를 해남파 제자로 만들어서 감시하면 가능하지 않나요?"
"당연히 하오문에서도 그런 생각을 하고 하오문 문도 중 한 명을 해남파의 제자로 넣었던 적도 있었죠. 하지만 해남파 자체가 워낙 폐쇄적인 성향이 강해서 섬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고 섬 안에만 생활하니 특별한 정보랄게 없어서 큰 성과가 없었어요. 그뿐만 아니라 해남파의 훈련 강도가 너무 강해서 그 문도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도망쳐 나왔고요."
"그랬군요. 해남파가 제자들에게 훈련을 엄청 강하게 시키나 보네요."
"아무래도 구파일방에 속한 다른 문파에 비해 적은 인원으로 그 자리를 지키려면 피나는 노력을 해야만 하겠죠."
'구파일방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도 언제 밀려날지 모르는 불안함에 매일같이 강도 높은 훈련을 하며 살아야 하다니.. 그들이 조금 안쓰럽군.'
"일단은 돌아가죠. 두 사람이 해남도로 들어갔다는 확신도 없고, 만약 그곳으로 들어갔다면 일단은 그녀들을 쫓던 적으로부터는 가장 안전한 곳으로 간 거니까요. 천천히 해남도에 사람을 보내 두 사람의 행방을 찾아보도록 하죠."
수향의 말에 우리는 발길을 돌려 다시 천하상단으로 돌아갔다.
문을 열고 천하상단 안으로 들어가니 많은 사람이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그 모습만 봐도 천하상단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건 우리 모두 알 수 있었다.
"형님, 상단에 무슨 일이 생긴 거 같아요. 저 먼저 들어가 볼게요."
하진이가 불안한 마음에 급하게 안채로 뛰어갔다.
내가 무리 지어 모여있던 상단 사람 한 명에게 다가가 무슨 일인지 묻자 그가 대답해 주었다.
"무슨 일이죠? 왜 이렇게 상단 사람들이 모여있나요?"
"대방 어르신이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어르신은 어디 계십니까? 의원은 왔습니까?"
"대방 어르신은 안채에 누워계시고 의원이 진맥 중입니다."
그와 대화를 마치고 나는 수향 소저에게 말했다.
"저도 하진이에게 가 봐야겠어요. 상단주께서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 것 같네요."
"저도 약간의 의술을 할 줄 아는데 같이 가도 될까요?"
"네, 그럼 저와 같이 가시죠."
난 수향 소저와 함께 안채로 들어갔다.
안채에 있는 상단주의 방은 전에 하진이와 함께 가 보았기에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상단주 방에 들어서니 천하성 대방이 침상에 누워 있고 의원이 진맥 중이었으며, 그 곁에 천하진과 그의 동생 천하문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대방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잠시 후 진맥을 마친 의원이 말했다.
"오늘 갑자기 쓰러지신 건 대방 어르신의 기력이 많이 쇠하셔서 그런 겁니다. 밥 잘 드시고 몸에 좋은 탕재로 탕약을 지어 드시면 괜찮아지실 듯합니다."
'저런 돌팔이를 봤나! 저건 중독으로 인한 건데.. 밥 잘 먹고 보약을 지어 먹으면 괜찮아질 거라니.'
"아버지 몸에 다른 이상은 전혀 없습니까?"
천하성 대방의 둘째 아들 천하문이 의원에게 묻자 의원이 대답해 주었다.
"네, 전혀 없습니다. 제가 탕재를 적어 처방전을 써 보내 드릴 테니 사다가 잘 다려서 꾸준히 복용하시면 조만간 쾌차하실 겁니다."
"그렇군요. 의원님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의원이 방을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하진이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하진이 형, 안색이 많이 안 좋은데. 아버지 때문에 그래? 의원님이 아버지 큰 문제 없다고 탕약 드시면 곧 괜찮아지실 거라고 하잖아."
"그래.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셨다기에 너무 놀라서 그래. 아버지는 강한 분이시니까 곧 쾌차하시겠지."
천하문이 수향 소저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그런데 여기 서 계신 아름다운 여성분은 누구시죠?"
"전 수향이라고 해요. 천하진 공자와 무영 소협의 지인이에요."
"수향 소저? 어디선가 그 이름을 들어본 것 같은데.. 아! 선녀유곽.. 최고의 기생이 분명 수향이라고.."
천하문의 말에 상처를 받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어 나와 하진이의 시선이 동시에 수향 소저에게로 향했다.
"맞아요. 제가 그 수향이에요. 하진 공자와 무영 소협이 저희 유곽에 방문해서 아는 사이가 되었죠."
"아.. 그렇군요. 하진이 형 잠시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천하문은 싸늘한 표정으로 천하진을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역시 저를 바라보는 사내들의 눈빛은 딱 두 가지뿐이네요. 어찌 한번 넘어뜨려 볼까 하는 생각이 담긴 눈빛과 저의 신분을 알면 유곽에서 몸 파는 기녀라 천한 여자라는 경멸의 눈빛."
'그녀의 눈빛을 보니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녀는 여타 다른 기녀와는 다른 느낌이 드는데..'
"모두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 역시 수향 소저가 유곽에 있는 것이 좋아 보이지는 않지만, 본인의 의지가 아닌 타인에게 매여있는 것이기에 저는 수향 소저를 경멸하거나 천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영 소협, 절 위로하려고 너무 애쓰지 않아도 돼요. 원래 기녀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직업이니까요."
'꼭 예전의 나를 보는 듯하다. 그림자 무사 시절 황녀님 앞에서 초라해지던 내 모습.. 남들 앞에 나서지 못하고 어둠 속에 존재를 숨겨야 하는 나 자신이 초라하고 싫었던 적이 있었지.'
"수향 소저, 저도 한때 그런 적이 있었어요. 자존감이 떨어지고 초라하다고 느껴질 때가.. 그걸 극복하는 방법은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보다는 세상을 살아가는 게 조금 덜 힘들 거에요."
"제가 정말 그렇게 살아도 될까요?"
"그럼요. 제가 보기에는 당신은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요."
나의 어설픈 위로의 말에 수향이 환하게 웃자 그녀가 눈부시게 아름다워 보였다.
'아! 그녀를 보니 심장이 아플 정도로 요동치네. 요즘 들어 점점 심해지는데.. 혹시 나도.. 독에 중독된 걸까?"
내가 심장 부근을 움켜쥐며 힘들어하자 수향 소저가 다가와 말했다.
"무영 소협, 어디가 안 좋으세요? 얼굴도 창백하고.."
"괜찮아요. 가끔 이럴 때가 있어요."
"정말 괜찮은 거 맞죠? 그런데 저기 상단주님 모습을 보니 그냥 기력이 쇠하셔서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 혹시 중독된 상태인가요?"
단번에 상단주의 상태를 알아보는 수향 소저를 보며 난 깜짝 놀라 물었다.
"어찌 아셨습니까? 중독 증세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신 상태인데.."
"향주님께 상사화의 잎과 꽃 그리고 대극의 뿌리에 대한 정보를 구해달라고 하셨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걸로 대방 어르신의 중독을 알아내었다는 겁니까?"
"구하는 것들이 다 독초라 저 희귀한 독초를 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오늘 대방 어르신을 보니 독초가 어떻게 쓰일지 감이 오더군요. 이독치독."
'그녀는 외모도 아름답지만 머리도 비상하구나.'
"맞습니다. 그래서 그 독초를 찾으려 한 것입니다. 오늘 대방 어르신이 쓰러진 것을 보니 독이 퍼지는 속도가 빨라진 듯합니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하오문에서 그 정보를 찾아주어야 대방 어르신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정을 알았으니 제가 향주님께 부탁을 드리거나 아니면 향주의 옥패로 지시를 내려서 최대한 빠르게 정보를 구해오도록 할게요."
"고맙습니다. 수향 소저."
대화를 마친 우리는 상단주 방에서 나와 나는 먼저 숙소로 돌아갔고 수향 소저는 하오문 지부가 있는 선녀유곽으로 떠났다.
그녀가 선녀유곽에 다녀오고 삼일 뒤 하오문에서 보낸 문도 하나가 정보를 가지고 천하상단에 방문했다.
"향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향 소저의 간곡한 부탁과 이번 일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최대한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빠르게 정보를 수집해 의뢰품을 가장 빨리 구할 수 있는 정보를 보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향주님께 고맙다고 전해주십시오."
하오문 문도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나에게 서찰을 건네고 떠났다.
서찰 속의 내용이 궁금하여 하진과 수향도 부르지 않고 먼저 서찰을 열어 보았다.
'상사화는 잎이 떨어진 후 꽃이 자라나 두 가지를 단번에 얻을 수가 없고, 추운 북방 지역에서 자생하나 상사화를 본 사람은 많지 않은 희귀 독초다. 하여 직접 채취하는 건 어렵다.'
나는 상사화의 설명에 대한 부분을 읽다가 마음이 급하여 서찰의 다음 장을 넘겨보았다.
'하여 이를 구하려면 상사화 잎과 꽃을 말린 걸 가지고 있는 곳에 찾아가 얻어내는 게 유일한 방법이다.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알려진 곳은 사천당가와 독곡, 오독교이다. 이 말은 이 세 곳 중 한 곳에 가서 무조건 얻어내야 한다는 거군.'
나는 서찰을 다 읽고 하진과 수향 소저 두 사람을 불러 서찰의 내용을 말해주었다.
"세 곳 중 한 곳을 가야 한다면 어디가 좋을까?"
"무영 형님, 독곡과 오독교는 사파라 우리를 만나주지도 않을 텐데.. 사천당가로 가서 부탁해야지 않을까요?"
"독이 유출된 게 당가인데 우리에게 상사화를 내줄까?"
나와 하진이 의견을 주고받을 때 수향이 슬며시 말을 했다.
"그것보다 대방 어르신의 상태가 언제 갑자기 나빠질지 모르니 최대한 가까운 곳에 가서 부탁하든 뺏어오든 해야지 않을까요?"
"듣고 보니 수향 소저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세 곳 중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어딥니까?"
"사천에 당가, 남만에 독곡, 그리고 광서에 오독교. 셋 중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오독교는 여기에서 하루도 채 안 걸리는 거리에 있으니 그곳으로 정하죠."
"오독교에서 순순히 상사화와 대극을 내어 줄 리가 없으니 가서 몰래 훔쳐 와야겠네요. 그건 아무래도 저 혼자 조용히 다녀오는 게 좋겠어요."
나의 말에 하진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형님,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희 아버지를 위한 일인데 그 위험한 일을 형님 혼자서 하겠다니요. 저도 갈 거예요."
"하진아, 내가 이런 말 하면 서운할지 모르겠지만 네 무공 실력으로는 도움이 되기보다는 짐이 될 가능성이 높아. 그러니 그냥 상단에 남아 아버지를 보살펴 드리거라. 금방 다녀올 테니.."
나의 직접적인 말에 하진은 속은 쓰리지만 곧바로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고맙고 미안해요. 부탁 한 번만 드릴게요. 꼭 구해주세요."
"그래. 어떻게 해서든 꼭 구해오마."
그때 가만히 있던 수향이 내게 말했다.
"저도 같이 가겠어요."
"네? 소저가요? 왜 그 위험한 곳에 가려고요?"
"무영 소협, 상사화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아요? 그리고 대극 뿌리는요? 독초에 대해 알고 있는 제가 가야 해요."
수향 소저의 말을 듣고 나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같이 가죠. 대신 제 뒤에 딱 붙어 다녀야 해요."
우리는 그날 아침부터 이동하여 늦은 밤이 되어서야 광서 지역에 있는 오독교에 도착했다.
"자, 시작해 볼까요?"
"좋아요."
우리 두 사람은 야행복에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오독교의 담을 넘었다.
< 상사화를 찾아서 > 끝
ⓒ 청운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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