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독된 상단주 >
하진이를 따라 천하상단 안으로 들어간 나는 그가 자신의 아버지께 문안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나를 소개 시키겠다고 하여 그를 따라 안채로 향했다.
'밖에서 볼 때보다 직접 안으로 들어와 보니 생각보다 규모가 더 크구나. 이런 상단을 직접 일구어 내신 하진이의 아버지는 어떤분일까?'
안채로 지나는 길목마다 만나는 모든 상단 사람들이 돌아온 상단주의 첫째 아들 천하진을 환대하며 인사를 했다.
"대방 어르신이 첫째 도련님 돌아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셨는데 드디어 오셨네요."
"우리 첫째 도련님이 오셨으니 잔치상이라도 차려야겠네요."
"모두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에 보니 더 반갑네요."
"저희야 항상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죠. 도련님은 5년 사이 더 의젓해지시고 더 늠름해지셨는데요."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리인 거 알아요. 아버지는 어디 계시죠?"
"대방 어르신은 화원에서 화초에 물 주시고 계실 거에요. 그쪽으로 가 보세요."
"알겠어요. 나중에 봐요."
화원으로 이동하면서 하진이는 상단의 이곳저곳을 설명해주었다.
화원에 도착하니 한 중년인 사내가 화초에 물을 주고 있었다.
"아버지, 소자 돌아왔습니다."
하진이의 목소리를 들은 중년인이 고개를 돌리고 그의 얼굴을 확인한 중년인이 물조리개 내려놓고 하진이 그에게 달려갔다.
"아니.. 하진아 네가 정말 온 것이냐?"
"네. 아버지."
자신의 아버지를 껴안은 하진이 갑자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 어떻게 된거에요. 뼈 밖에 안 남았잖아요. 어디가 아픈 거에요?"
"나도 이유를 모르겠구나. 이년전부터 자꾸 살이 빠지더니 이제는 기력도 점점 쇠약해지는구나."
"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거요? 다른 병이 있는 건 아니고요?"
"많은 의원들을 불러서 진맥을 받고 했는데 다들 내 몸에는 이상이 없다는구나."
"이상이 없다는 어떻게 살이 계속 빠질 수가 있죠?"
하진의 아버지는 스스로 느끼기에 큰 병이 걸린 것 같은데 자신의 병이 무엇인지 아는 의원이 한명도 없으니 답답해 보였다.
"나도 몇 년째 이유를 모르고 살이 빠지고 기력이 쇠해지니 답답하구나."
"그래서 제가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셨던 거에요?"
"그래. 내가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니.. 너에게 상단 일도 가르쳐 줘야 하기도 하고 마음이 약해져서인지 네가 더 보고 싶더구나."
"아버지..제가 그 이유를 찾아낼게요. 오래 사셔야해요."
"그래. 꼭 그러마. 네가 자리 잡을 때까지는 옆에 있어주마."
하진과 그의 아버지는 서로 끌어안고 회포를 풀었다.
'하진이의 말을 들어보면 원래는 풍채가 좋으셨던 분 같은데..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리 뼈만 앙상하게 남으신 걸까?'
오랜만에 부자 간의 정을 나눈 하진은 내가생각났는지 나를 쳐다보고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말을 했다.
"아, 아버지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요."
"누구를 말이냐? 아, 저기에 서 계시는 분을 말하는 것이냐?"
"네. 아버지. 저기 있는 사람은 무영 형님이에요."
"형님, 이쪽으로 오세요."
하진이 손짓과 함께 나를 불렀다.
나는 하진이의 아버지 앞에 서서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방 어르신. 무영이라고 합니다."
"예의가 아주 바른 청년이군요. 난 하진이의 아비되는 천하성이라 하오."
"대방 어르신. 하진이의 아버지이시니 저에게 편히 하대 하십시오."
"그래도 되려나.. 그럼 자네도 날 대방 어르신이라 부르지 말고 자네가 하진이의 형님이니 날 그냥 하성 아저씨라 부르게나."
"하성 아저씨요? 그래도 천하상단의 상단주이신데...정말 그렇게 불러도 되나요?"
"자네는 상단 일로 이곳에 온 게 아니고 하진이와 친분으로 왔으니 나도 이곳 상단주가 아닌 그냥 하진이의 아비일세."
'대형 상단의 상단주면서도 자신의 지위나 권세로 상대방을 깔보거나 낮추려 하지 않는 걸 보면 하진이가 좋은 아버지 밑에서 잘 교육 받고 자랐구나.'
"네. 그럼 저도 상단주라는 걸 잊고 하진이 아버지로만 대하겠습니다. 하성 아저씨."
"말이 통해서 좋구만. 하진이랑 무영이는 어떻게 알게되어 이곳에 함께 왔느냐?"
하진이 나와 있었던 일들을 천하성에게 말해주었고 그도 나의 일을 듣고는 내가 찾고 있는 사람을 빨리 찾도록 도와주겠다고 하였다.
'두 사람 다 정말 좋은 사람이다. 한데 가까이에서 하성 아저씨의 기운을 느끼니 기가 중간중간 끊기는 느낌이 든다. 이건 독에 중독 된 거 같은데..'
"하성 아저씨, 제가 진맥 한번 해봐도 될까요?"
"네가 진맥도 할 줄 안단 말이냐?"
"형님, 의술을 익힌 거에요?"
"흠.. 그게.. 예전에 잠깐 배웠어요. 아주 잠깐요."
'그림자 무사 시절에 너무 자주 다쳐서 스스로 자주 치료하다보니 웬만한 돌팔이 의원보다는 정통하다고 볼 수 있지.'
천하성이 자신의 왼팔을 내밀고 나는 그의 손목을 잡고 진맥을 하며 양의심법을 운기하며 나의 진기를 그의 손목에 넣었다.
그의 손목으로 들어간 나의 진기는 그의 몸 전체의 혈맥을 타고 돌면서 그의 상태를 파악했다.
'음.. 하성 아저씨도 무공을 익혔구나. 내공의 양으로 봤을 때 일류 수준이고 역시나 기운이 중간 중간 끊기는구나. 이건 독에 중독 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야. 한데 이상하다.. 나의 진기가 하성 아저씨 혈맥 전체를 돌았는데 독이 모여있는 곳을 발견하지 못하다니...'
내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하성 아저씨가 궁금했는지 물었다.
"네가 진맥하기에는 내 몸의 상태가 어떠하니?"
"제가 의원이 아니라 정확하게는 말씀 못 드리겠지만 아저씨는 독에 중독 된 거 같아요."
나의 말에 하진이 놀라며 다급하게 물었다.
"독이요? 형님, 아버지가 무슨 독에 중독된 거에요?"
"독이라고 했느냐? 어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냐?"
"기운이 중간중간 끊기는 것은 전형적인 독에 중독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면 무슨 독인지도 알아냈느냐?"
"그게 좀 이상합니다. 보통 독에 중독되면 몸 속 어딘가에 독의 기운이 모여 있어서 그곳을 없애면 괜찮아지는데.. 하성 아저씨 몸에는 그게 느껴지지 않아요."
나의 말을 들은 천하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안 그래도 내 몸을 진맥했던 의원 중 가장 실력이 좋다고 소문나서 어렵게 모셨던 그 분 역시 너와 같은 말을 하였다. 하지만 그분도 내 몸에서 독의 기운이 모인 곳을 찾지 못했다며 자신이 진맥을 잘못 한 거 같다고 하고 가셨다."
"음.. 제게 며칠의 시간을 주시면 그 독을 찾아낼 방법을 알아오겠습니다."
"자네 정말 그게 가능하겠나?"
"정확치는 않지만 제가 예전에 접해본 독과 비슷한 듯 하여 그것을 찾는 방법을 알아내면 가능할 듯 합니다."
"설사 못 알아낸다고 하더라도 실망하지 않을테니.. 너무 부담 갖지 말고 하게나."
"네. 하성아저씨. 찾아보고 며칠 내로 말씀드릴께요."
하성아저씨는 하진이에게 나를 데려온 것을 칭찬하였고 그날 저녁에 진수성찬을 차려 나를 대접했다.
"형님이 그리 의술이 뛰어난 줄 몰랐어요."
"아니래두. 그냥 조금 배웠을 뿐이야."
"독에도 조예가 깊잖아. 단번에 아버지가 중독 되었다고 말하고.."
"그건 내가 독에 많이 중독 되어봐서 아는 거고.."
"형님, 과거 군에서 무슨 일들을 하셨길래.. 독에 중독될 일이 많았어요?"
"험.. 그건 기밀이라 말 못해.. 암튼 네 아버지의 몸에서 내가 아주 오래전 중독 되었던 독과 비슷한 느낌을 받아서 그게 맞는지 확인해 보려는거야."
"아무튼 형님 너무 고마워요."
"아직 확실치는 않는데.."
"그래도 형님 덕분에 나와 아버지께 희망이 생겼으니까요."
"일단 최선을 다해서 찾아볼께."
"네. 대신 오늘은 푹 쉬시고 내일부터 해요."
그 말과 함께 하진이 나를 데려간 곳은 천하상단에 방문한 귀한 손님들의 휴식을 위해 만들어 놓은 전각이었다.
그 전각에 있는 방 중에 가장 좋은 방을 나에게 내주어 그 곳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나는 침상에 누워서 내가 그 독을 경험했던 그 때를 떠올렸다.
'그림자 무사 시절에 저 독의 기운과 비슷한 느낌을 느낀 적이 있었는데 그때가 언제였더라..'
기억이 차츰 떠오르고 그 때 그날로 돌아갔다.
* * *
"이놈아, 넌 목숨이 몇 개는 되는 줄 알고 있는게냐?"
"어르신, 저도 제 목숨이 한 갠 줄은 알고 있어요."
"아는 놈이 네 몸을 그리 다루냐.. 그림자 무사들 중에서 네 놈이 여기를 제일 자주 와.. 그것도 아주 상태가 안 좋게.."
"그건..제가 맡고 있는 분이 여기저기 인기가 많아서요. 저도 좀 피곤하네요.."
"이놈이 농을 할 정신 머리가 남은 걸 보니 멀쩡하구나. 돌아가."
"어르신, 진짜로 제 몸이 이상해요..이유 없이 자꾸 기운이 빠지고 중간 중간 끊기는 느낌도 들고요. 꼭 독에 중독된 사람처럼 그래요..그런데 독기는 안 느껴져요.."
"손이나 내밀어 봐."
한 손으로는 내 손목을 잡고 진맥을 하며 백발에 긴 수염을 쓰다듬고 있는 이 분은 그림자 무사들만 전담으로 맡고 있는 의원이신 당평 어르신이었다.
중원에는 삼대 신의가 있는데 이분은 그 안에 속하지는 않지만 실력은 그 세분보다 뛰어나다고 대장이 내게 말해주었다.
대장이 이분을 모셔오는데 많은 노력을 했다고 했다.
'실력은 나도 인정하지만 약간 성격이 지랄 맞다고 하야하나.. 암튼 치료를 받으려면 매번 욕을 먹어야하지만 어르신께 치료를 받으면 몸을 다치기 전보다 더 건강한 상태로 만들어 놓아서 중독된 듯 어르신을 찾게 된다는 거지.'
내 손목을 통해 내 몸의 혈맥을 살핀 어르신이 내게 말하였다.
"아주 고약한 독에 걸려왔구나."
"어르신 이게 무슨 독이에요? 전혀 독기가 느껴지지 않는데.."
"그건 무형독이라고.. 당가에서 만들었는데 만들고도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사용을 금지한 독인데 이게... 왜 네 몸에서 느껴지는게냐?"
"무형독이요? 처음 들어보는데요."
"만들고 사용한 적이 없는데.. 처음 들어보는게 당연한거지."
"그럼 이거 해독은 가능한 거에요?"
"무형독은 해독약이 없어."
해독약이 없다는 말에 나는 얼굴이 창백해졌고 어르신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네? 그럼 저 이대로 죽는거에요?"
"하지만 나는 해독이 가능하지."
"무형독은 해독약이 없다면서 어르신은 가능하다고요?"
"그래. 내가 무형독을 만들고 사용 금지도 내가 시켰으니 굳이 해독약이 필요없었지."
어르신의 말에 난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르신에게 되물었다.
"어르신이 만든 거라고요? 무형독을요?"
"그래. 그러니 해독약을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지. 내가 없었으면 넌 죽었을텐데..넌 운이 참 좋은 놈이야."
"얼른 해독약을 만들어주세요."
"보채지 말거라. 내가 무형독을 만들 때 무색 무취로 만들고 몸에 독 기운까지 남지않게 만드느라.. 아주 서서히 몸에 퍼지게 만들어 놨기 때문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을 지는 몰라도 급작스럽게 급사는 안할 거니까.."
"아주 위안이 되는 말씀이네요."
며칠 후 당평 어르신이 무형독 해독약을 만들어 주셨고 나는 그것을 한달 이상 먹으니 몸 안에서 느껴지던 무형독의 중독 증세가 말끔하게 사라졌었다.
그 뒤 나는 오히려 어르신께 무형독을 만들어 달라고 한참을 졸라서 무형독을 얻을 수 있었고 요긴하게 잘 썼었다.
"어르신 혹시 제가 다시 무형독에 걸렸는데 어르신이 안 계시면 어쩌죠?"
"아주 나보고 빨리 뒤지라고 고사라도 지내지 그러냐.."
"그게 아니라.. 나중에요.. 아주 나중에.."
"무형독은 만들기는 어렵지만 해독약은 간단해. 무형독의 성분을 상쇄 시키는 독들이 있는데 그것을 섞어서 장기 복용하면 된다."
"그 독들이 어떤 독인데요?"
"맨입으로는 말 못해주지.."
"뭘 해드리면 되요?"
"요즘들어 어깨가 결리는구나."
나는 즉시 어르신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여기가 불편하신거에요? 시원하세요?"
"시원하기는 한데.. 겨우 하루 한번 받아 가지고 얼마나 유지 되겠느냐?"
"그럼 일주일?"
"한달은 해야지.."
"네..아침에 퇴근해서 이리로 올께요.."
"그래..무영독의 해독법을 알려주마. 상사화의 잎과 꽃 그리고 대극의 뿌리를 말린 후 찧어서 차처럼 내려서 마시면 된다. 대신 아주 소량만 먹어야한다. 한달에서 반년 사이 증세가 사라지면 그만 먹어도 된다."
난 그 때의 기억을 모두 떠올려 해독법을 찾아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잠이 들었다.
< 중독된 상단주 > 끝
ⓒ 청운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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