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하상단과의 인연 >
그날 아침 나의 사정을 들은 후에 천하진이 내게 먼저 제안해 저녁 때 객잔에서 숙식 해결할 때 빼고는 아침과 점심은 건량과 육포로 대충 때우고 나머지 시간은 남쪽으로 달려가는데만 집중했다.
천하진이 말하기를 평상시라면 하남성 경계에서 광동성까지는 15일이 넘게 걸린다고 했는데 우리는 일주일 만에 광동성의 가장 큰 도시인 광주에 도착했다.
"형님 여기가 남부 지역 광동성의 제일 큰 도시 광주에요."
"하진아, 그런데 왜 이 곳 사람들은 옷차림이.. 험.. 눈 둘 곳이 없구나."
"그건 저 햇볕 때문이죠. 무지 덥잖아요."
"난 참을만 한데.."
광동성은 남부지역답게 이 곳에 들어서면서부터 햇볕의 강렬함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나는 한서불침의 경지라 그렇게 영향을 받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이 곳 토박이인 천하진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형님. 정말 안 더워요? 이상하네..일년 내내 거의 추운날이 없이 더위가 계속 되니 이 곳 사람들이 저렇게 짧은 옷을 입을 수 밖에 없는 거에요."
"그래도 여인들이 너무 낯뜨거운 복장이 아니더냐..."
전생은 황성 그것도 규율이 엄격한 황궁에서 살면서 본 여인의 옷차림은 꽁꽁 싸 맨 궁녀들과 황녀님 말고는 거의 없었다.
'황궁이 남쪽에 있었다면.. 이들처럼 입고 다녔을까? 아니겠지.. 아무리 더워도 이건..정말 아닌데..'
또한 과거로 돌아와서도 여인이라고는 그림자 무사 훈련생들이 전부였고 그들 또한 복장이 암행복으로 속살을 하나도 드러내지 않았기에 속살이 보이며 거의 헐벗고 다니는 듯한 광동성의 여인들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형님. 그만 좀 봐요. 그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보면 형님을 이상하게 생각할거에요."
"아니.. 난 그저 저 복장들이 신기해서.. 북방에서는 저렇게 짧은 옷을 본 적이 없었어."
"형님, 우리가 입은 복장 때문에 오히려 광동 사람들이 우리를 이상하게 쳐다봐요. 일단 옷부터 갈아 입어야겠어요."
천하진을 따라 옷을 파는 상점에 들어갔는데 그동안 황궁이나 북방에서 봐 왔던 옷들과 너무나 다른 옷에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천하진이 나에게 어울릴만 한 옷이라며 몇 벌을 골라 주었는데 처음 보는 형식의 복장이 어색하여 손사래를 쳤지만 강제로 손에 쥐어주어 입어 보게 되었다.
'하진이는 내게 왜 이런 민망한 복장을 입으라고 하는거지... 이럴수가..'
난 짧고 가벼운 복장을 입고 놀라고 말았다. 너무나 가볍고 시원한 느낌에 이곳 사람들이 왜 이런 옷을 입는지 알게 되었다.
하진이는 내가 옷을 입고 마음에 들어한다는 것을 표정에서 읽었는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형님, 잘 어울리세요. 제가 사는 지역이 방문했으니 옷은 선물로 사 드릴께요."
"아니야. 오히려 내가 널 사줘야지. 나 여윳돈 있어."
"아니에요. 그건 다음에 제 도움으로 형님이 찾으시는 분 만나시면 그때 저에게 선물 하나 제대로 해 주세요."
"그래. 알겠다. 그때 큰 선물 하나 제대로 할께."
우리 두사람 모두 옷까지 광동성 복장으로 입고 나니 더 이상 외지에서 온 사람 같은 느낌은 사라지고 이곳에 사는 현지인들과 쉽게 동화되는 것 같았다.
"형님이 찾으시는 그 분을 빨리 찾으려면 방문해서 의뢰 해야 할 두 곳이 있어요."
"그게 어딘데?"
"하오문과 개방이에요."
"그 무림 문파들에 대해 책에서 본 적이 있어.. 들어본 적도 있는 것 같고."
"그 두 곳은 무림인 치고 모르면 이상한 곳이죠."
'난 그동안은 무림인은 아니였으니까..'
난 나 자신을 단 한번도 무림인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전생에도 황궁에서 황손을 지키는 그림자 무사 그것 또한 나라의 녹을 먹는 관에 속한 자였고 얼마 전까지는 군부에서 나라의 녹을 먹는 군인이였으니..
"어디부터 가는 게 좋을까?"
"개방은 워낙 방도의 숫자가 많으니 사소한 정보라도 얻을 수 있고요. 양질의 정보라면 하오문을 통하면 얻을 수 있어요."
"그럼 하오문이 좋지 않을까?"
"그들에게 의뢰를 하면 양질의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좋기는 하지만 비용이 적지 않게 들 겁니다."
"비용이 많이 들까? 그래도 찾을 수만 있다면 괜찮아."
"그럼 하오문으로 가시죠."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강호의 경험이 풍부하고 아는 지식이 많은 천하진을 굳게 믿으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그가 유곽에 날 데려가자 그에 대한 믿음이 무너져 내렸다.
"하진아, 여기는 왜 온 거야? 잘못 온 거 아냐?"
"따라오세요. 이곳에 아는 분이 계세요."
하진이가 유곽 안으로 먼저 들어가고 나는 망설이다가 그를 쫓아 안쪽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유곽 안에 들어섰을 때 하진이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유곽 안에는 겉옷을 까먹고 안 입은 여인들만 가득했다.
'군부에서 있을 때 듣기로 유곽에 속옷만 입고 돌아다니는 여인들이 있는데 그녀들에게 홀리면 빠져 나올 수 없다고 조심하라 했는데.. 그날이 오늘인가 보구나.'
여인들이 향긋한 분향을 풍기며 내게 다가오자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난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때 나의 손목을 잡고 끌고 가는 손길이 있었다.
'하진이인가? 다행이다.'
잠시 눈을 감은 채 끌려다가 눈을 떴을 때 방안에 들어와 있었고 내 앞에는 아리따운 여인이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제가 왜 이곳에 있는 거죠?"
"호호호, 제가 손목을 잡으니 순순히 따라오신 분이 이제 와서 절 모른 척 하시는 거에요?"
"그건 내 아우 하진이로 착각했습니다. 혹시 못 보셨나요?"
"아, 총관님의 손님으로 오신 그분을 말씀하시는 가 보군요."
'아, 하진이는 이곳 총관을 만나러 왔구나. 하오문으로 가자며 그를 만났다는 건 총관이 하오문 사람이거나 그들을 잘 아는 자 겠구나.'
"네. 절 그 쪽으로 안내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 방으로 오셨는데 그냥 바로 나가시면 전 어찌 합니까? 유곽에서 방에 들어온 손님 그냥 나간다는 건 기녀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이지요. 특히 이곳에서 제일 가는 기녀인 저 수향에게는요."
"그렇습니까? 이런 곳은 처음이라.. 몰랐습니다. 그럼 어찌해야합니까?"
"그냥 잠시 이곳에 계시다가 가시면 됩니다. 일행 분께는 형님이 이곳에 계신다고 말씀 드려놓겠습니다."
"그럼 잠시만 있다가 나가겠습니다."
나의 말에 그 기녀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앉아있는 것은 서로가 불편할 것 같아요. 이왕 제 방에까지 들어오셨으니 제 춤이나 보고 가세요. 돈은 받지 않을 것이니 편히 보시면 되요."
"소저가 편할대로 하세요. 전 어차피 잠시 있다가 나가면 되는 것이니.."
그 기녀가 춤을 추기 시작하는데 난생 처음인데다 아름다운 여인이 그것도 바로 내 앞에서 춤을 추니 나도 모르게 시선이 여인에게 고정되었다.
'선이 어찌나 고운지 선녀라고 해도 믿겠구나. 이런 곳에 있기에는 참으로 아까운 여인인데..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으니 참으로 안타깝구나.'
일각(15분)정도 지나자 기녀의 춤을 멈추고 내게 물었다.
"제 춤사위가 어땠나요? 괜찮았나요?"
"제가 본 춤사위 중에 제일 훌륭했습니다."
나의 말을 들은 그 기녀의 안색이 굳어지며 목소리에 당황함이 묻어 나왔다.
"아...그랬군요.."
"제가 말실수를 했나요? 소저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아니에요. 제 춤을 끝까지 다 보시고도 저의 손끝 하나 건드리려 하지 않는 분은 처음이라 조금 당황했네요."
솔직히 그녀의 춤을 보는 내내 음욕이 들끓어 힘들었다. 하지만 황녀님을 생각을 떠올리며 버텼고 그러자 종반부 쯤부터는 그녀의 춤이 더 이상 내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았다.
"춤은 아주 훌륭했어요. 하지만 소저께선 그 춤은 남자들 앞에 서는 안 추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춤을 보면서 남자들이 소저에게 달려드는 이유를 알 것 같았거든요."
"고마워요. 저에게 그렇게 진정성 있게 조언 해주시는 분은 소협이 처음이네요."
그녀의 얼굴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까와는 조금 다른 듯 했다.
"이제 이만 나가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죠. 아..마지막으로 성함을 물어봐도 될까요?"
"전 신무영입니다."
"신무영... 이름이 잘 어울리시네요. 제 이름은..
"아까 수향이라 들었습니다."
"그건 이 곳에서 쓰는 가명이고 진짜 이름은 .신.초.아..에요. 잊지마세요."
나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그녀의 방을 빠져나왔다.
나와서 입구를 찾으려 하는데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무영 형님, 한참을 찾았습니다. 어디 계셨던거에요?"
"하진아 넌 이곳 총관을 만나고 있지 않았느냐?"
"형님 그건 어찌 아셨어요? 제가 총관과 아는 사이 인걸?"
"이곳 기녀가 알려주더구나. 그와 만난 일은 잘 되었어?"
"네. 며칠 내로 하오문 사람과 직접 만나게 해 주겠다고 하네요."
"잘 되었구나. 하진아, 나머지 이야기는 여기 나가서 하기로 하고 속히 이곳을 나가자."
속히 나가자는 나의 말에 천하진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형님, 혹시 이곳에서 무슨 일 당하신 건 아니죠?"
"아니다. 하지만 이런 곳은 이런 일로도 자주 오면 안될 것 같다."
"아무리봐도 여기서 뭔가 있었던 거 같은데..혼자 알지 말고 나에게도 말해줘요."
"그런 거 없다니까.."
내가 살짝 정색하듯 말하자 천하진이 당황하며 말했다.
"형님, 안 놀릴께요. 저희 집으로 가서 쉬어요. 아버지께서도 형님을 좋아하실거에요."
"내가 너희집까지 가는 건 큰 폐를 끼치는 일인데.. 그냥 난 객잔으로 갈께."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 집에 형님을 안 데려가고 객잔에 재우면 제가 마음이 편치 않아요."
천하진의 사정에 나도 어쩔 수 없이 그의 집으로 따라갔다.
천하상단.
그가 안내한 곳에 도착하니 멀리서 보더라도 엄청나게 큰 전각과 주택들이 둘러쌓여있고 입구에는 나무 현판으로 천하상단이라 써 있었다.
"여기가 너의 집이야?"
"네. 형님. 저희 집에서 편하게 쉬어가요."
'천하상단? 하진이 아버지께서 광동성에서 상단을 하신다고 하더니 상당히 큰 규모의 상단을 운영하시는구나. 하진의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무림인보다는 자신의 가업을 이어 받기를 바라실 수 있겠구나.'
"이 정도 규모면 중원에서 상단 규모로는 어느정도 되는거지?"
"중원에 있는 상단을 통틀어 볼때는 십대 상단에는 못 들어가나 강남에 있는 상단들로만 봤을 때는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죠."
"엄청나구나. 이런 대형 상단의 부잣집 도련님을 몰라봤네."
"왜 그래요..형님, 이건 아버지가 이룬 부이지.. 저는 상단을 이끌고 싶지 않아요. 상재가 뛰어난 건 동생이니 그 아이가 맡는 게 맞아요."
"그럼 넌 무림인으로 쭉 살고 싶은 거야?"
"네.. 화산파 속가제자로 비록 아주 많은 것은 배우지 못했어도 수련을 열심히 해서 무림의 고수가 되고 싶어요."
나도 하진의 진지한 모습에 그의 꿈을 더 응원하게 되었다.
"그래. 나도 그 꿈이 이뤄지길 바라마. 너의 아버지는 네 생각을 알고 계시니?"
"아니요.. 아직.. 그래도 이번에는 제 뜻을 아버지께 확실히 말하려고요."
"그래. 너의 그 진정성을 너의 아버지께서도 아신다면 허락해 주시겠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 천하진과 그의 아버지의 충돌이 곧 일어날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진이가 날 도와줬으니 내가 큰 힘은 못 되겠지만 하진이 옆에서 그를 응원하며 도와줘야겠구나.'
< 천하상단과의 인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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