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진족 정벌전 >
식사 후 한 시진이 지났을 무렵 당직 사병이 조장들에게 일각 후 점호를 한다는 걸 알렸다.
일각이 지나고 송겸 단주가 1조부터 야간 점호를 시작했다.
1조와 2조 점호를 마치고 우리 조의 점호 차례가 되었다.
조원들은 침상의 끝에 바른 자세로 앉아있고 나는 중앙에 서서 단주에게 보고를 했다.
"3조 인원 보고 총 10 열외 무."
"쉬어. 특이사항 있나?"
"없습니다."
"야간불침번은 아직 안 정했지?"
"네. 그렇습니다."
"조장이 밤에 한 시진씩 교대로 야간불침번을 설 인원을 정하거라. 매일 다섯 명이면 된다."
"알겠습니다."
"다른 거 묻고 싶은 건 없나?"
송겸 단주는 생김새가 날카롭고 까탈스러워 보여서 다들 쉽사리 질문을 못 하고 있었다.
조장인 내가 조원들을 대신하여 손을 들고 질문을 하였다.
"내일부터는 어떤 훈련을 하게 됩니까?"
"당분간은 훈련은 없다. 조별로 지시사항이 내려올 테니 아침 식사 후에 대기하고 있으면 된다."
"알겠습니다."
"점호 끝. 피곤할 텐데 일찍 자라."
말을 마친 송 단주가 나가고 불침번을 서는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조원들이 침상에 누웠다.
"훈련이 없다니 의외네. 전쟁터에 오면 매일 훈련을 강하게 할 줄 알았는데."
"그러게. 너무 풀어주니까 괜히 불안한데.."
"밤중에 여진족 놈들이 쳐들어오거나 하진 않겠지?"
"그런 재수 없는 소리하면 밖으로 내쫓아버린다."
"내가 말만 하면 넌 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
"재수 없는 소리하면 그 일이 일어나니까 그러지."
"흥.. 재수탱이."
석견은 또 예현에게 핀잔을 먹고 삐쳐 있었다.
'두 녀석은 진짜 허구한 날 싸우네. 저러다 정들겠어. 하긴 이제 열여섯 밖에 안 먹은 놈들이니..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두 사람 다 그만하고 얼른 자. 안 그럼 내가 너희 둘 다 밖으로 내보낼 테니."
내 말에 두 사람은 말싸움을 멈추고 조용해졌다.
'저 두 녀석과 생활하다 보니 자식새끼 키우는 것 같네. 좀 더 시간이 지나 녀석들과 헤어지면 지금 이 순간이 많이 그리워지겠지.'
다음 날 아침, 마지막 불침번이 근무를 마치면서 모든 조원을 깨웠다.
가볍게 씻고 4개 조가 막사 주변 공터에 모여 송겸 단주와 아침 조회를 하고 아침 식사를 위해 이동했다.
처음에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보통 100여 명인 다른 중대에 비해 3중대의 숫자는 너무 적었다.
군부에서 넘어온 4개 조가 3중대라니 뭔가 이상했다.
"우리 중대는 인원은 우리가 전부인가?"
"그러게. 아무도 안 보이네."
"저기 다른 중대 사병이 밥을 먹고 있네. 내가 물어보고 올게."
내 옆에서 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던 4조 조장 수호가 밥을 먹고 있는 다른 중대 사병에 가서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한참을 대화를 나누던 수호가 돌아왔는데 표정이 살짝 굳어 있었다.
"물어봤어?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저번에 여진족이 이곳을 기습했을 때 3대대가 가장 타격을 많이 받았고 특히 우리 중대는 전원 몰살당했대. 다른 중대도 피해가 커서 많은 인원을 보충했지만 3중대는 전원이 사망해서 이번에 새로 부대를 만들었다고 하네."
"아.. 그래서 우리 막사에 먼지가 쌓여 있었구나. 한참 동안 막사가 비어있어서.."
"우리도 언제든 그들처럼 될 수도 있겠지."
수호의 말을 듣고 나니 내가 있는 이곳이 전장이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
북방 군영으로 온 후 일주일간은 특별한 훈련도 없이 조별로 군부에서 배운 것들로 자체 훈련하며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군부에서 배운 창술이나 각종 병장기를 연습하며 실전에서 쓸 때를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은 이곳이 전쟁터라는 걸 잠시 잊을 만큼 평화로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토벌군이 조직되면서 북방 군영의 분위기가 일순 달라졌다.
모두들 전쟁 준비를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단주님, 토벌군에 저희 대대도 참여하는 겁니까?"
"그래. 1사군부터 10사군까지 10만명이 북방 토벌군에 합류하기로 결정되었다."
"적의 숫자는 얼마나 되는 겁니까?"
"적은 20만명이다."
"20만이나 된다고요? 정말 엄청나네요."
"많기는 하지. 하지만 전쟁에서 숫자가 전부는 아니다."
`20만이라니...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인데 정말 괜찮나?'
"그런데 저희 토벌군의 두 배나 되는데 정말 괜찮은 겁니까?"
"저들의 병력은 원래 40만명이었다. 하지만 각 부족들에서 어중이떠중이들을 다 모아서 숫자만 불려놓은 거라 대장군의 지휘 아래 20만명이 격퇴되었다. 이제는 그 절반 밖에 안 남은 패잔병들이 뭐가 무섭겠느냐. 10만명이 아니라 5만명으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송겸 단주가 토벌군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단주의 이어진 설명에 의하면 만주에 뿌리내리고 있는 여진족 또는 말갈족으로 불리는 그들은, 완안부족의 아골타가 부족을 통합하고 중원까지 통일하여 금나라를 세웠다가 원나라에 망한 뒤 다시 부족으로 흩어졌다고 한다.
그 이후 아직까지 통합되지 못하고 여전히 여러 부족으로 갈라져 있어서 숫자만 많을 뿐 제대로 훈련된 군대는 없다고 하였다.
"그럼 언제 토벌군이 여진족을 정벌하러 떠나는 것입니까?"
"내일이다. 만주 쪽은 추위가 심하니 두꺼운 여벌의 옷들을 챙겨 가야 한다. 그리고 이번 정벌은 시일이 좀 걸릴 테니.. 모두들 단단히 각오하고 가야 한다."
"알겠습니다."
단주의 말에 조원 모두가 긴장하며 우렁차게 대답을 하였다.
단주가 말을 마치고 나가자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첫 출전부터 원정이라니 쉽지 않구나. 과연 그곳에서 우리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조원들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인지 표정이 썩 밝지 못했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때 석견의 한마디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만주에 콩가루떡과 신선로라는 음식이 그렇게 맛있다는 게 이번에 가서 먹어봐야지."
"뭐라고?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이 상황에서 참 대단하다. 석견이 너는 못 말리겠다. 하하하."
"도대체 그건 또 어디서 주워들은 거냐?"
"석견아, 만주 가서 꼭 먹고 와라. 크크"
"헤헤. 내가 또 말실수했나."
조원들 모두가 웃으며 석견이에게 한마디씩 했다.
석견은 계면쩍은지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막사에 흐르던 긴장감과 비장했던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졌다.
조원들이 모두 흩어져 침상에 눕거나 개인적으로 시간을 보낼 때 석견이 내게 조용히 다가왔다.
"싸부, 내가 실없는 소리 해서 화난 건 아니지?"
"아니야. 네 덕분에 분위기가 좋아졌는걸."
"다행이다. 막사 안의 분위기가 너무 처지는 거 같아서 말을 꺼냈는데. 헤헤"
"진짜? 일부러 그런 거라고?"
"응. 나도 목숨이 한 개인데, 목숨 걸고 싸우러 만주 가면서 가서 맛있는 거 먹는다고 좋을 리가 없잖아."
"이 싸부가 미안한데.. 그동안 제자를 너무 어리게만 봤네."
"괜찮아, 싸부."
'이 녀석, 뼛속까지 어리버리한 줄 알았는데.. 그동안 다 일부러 그런 건가?'
"그럼 그동안 전부 일부러 그런 거야?"
"응? 그건 아닌데.. 이번만 그런 건데. 헤헤."
"뭐라고?..."
'하.. 이 녀석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네. 정말 어리숙한 건지, 아니면 그냥 그런 척하는 건지. 무공을 습득하는 걸 보면 영특한 거 같기도 한데.'
누가 봐도 석견은 무공에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말이나 행동거지만 놓고 보면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을 때가 훨씬 많아서, 몇 년이나 함께 생활했음에도 속내를 파악하기 어려운 놈이었다.
그날 저녁 조원들은 두툼한 옷과 여러 가지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며 긴 원정길을 떠날 준비를 마쳤다.
다음날, 군영 앞.
토벌군에 속한 10만 대군이 도열을 했다.
시작점과 끝을 알 수 없는 군사들의 모습은 장관이 따로 없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중대원들도 이렇게 많은 장병들은 처음이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인파 속에서도 누가 봐도 이곳에서 최고로 높은 사람이 입을 것 같은 화려한 금빛 갑주를 입고 단상에 올라서는 이가 있었다.
'저렇게 화려한 금빛 갑주를 입을 사람은 대장군밖에 없겠지. 그런데 저런 갑주를 입고 전쟁에 나가면 화살받이가 될 거 같은데..'
대장군 원숭환은 명나라 최고의 명장으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불패의 신화를 가진 장군이었다.
그는 모든 군사들의 존경의 대상이자 황제에게 가장 신임을 받는 자였다.
"장병들은 듣거라.
우리는 그동안 여진족의 공격을 주로 방어를 하는 것에 주력해왔다.
하지만 북방의 안정을 위하여 여진족을 아예 토벌하려 한다.
황제 폐하께서 이번 토벌군에게 큰 기대를 갖고 계신다.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여진족들을 제압하여 명나라의 깃발이 온 천하에 휘날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대장군이 자신의 장검을 뽑아 들며 10만 대군이 모두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말하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북방 토벌군이여! 황제 폐하와 대 명나라를 위해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와~ 이기자!"
대장군의 위엄있는 말에 10만 대군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얼마나 함성 소리가 큰지 땅이 울릴 정도였다.
'대장군님을 처음 봤는데 얼굴이 왜 이렇게 낯이 익은 걸까? 전생 때 황궁에서 본 적이 있나? 아닌 거 같은데..'
아주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 먼 거리는 아니었기에, 대장군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는데 아무리 봐도 낯이 익었다.
"너희들 대장군님 얼굴 보여?"
"어, 아주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아도 보이지."
"그럼 너희는 대장군님 얼굴이 낯익지 않아?"
나의 말을 들은 조원들이 좀 더 자세히 대장군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대장군님을 오늘 처음 보는데 묘하게 낯이 익네."
"나도 그러네. 누굴 닮은 것 같긴 한데.. 누구더라? 음.."
'아! 대장님과 닮았구나. 설마.. 대장님의 아버지?'
"무경원의 대장님과 닮았어."
"맞다! 그러고 보니 대장님과 정말 닮았는데."
"대장님과 무슨 사이지? 대장군님께 물어볼 수도 없고 궁금하네."
"부자지간이 아닐까?"
'나는 전생에 대장님과 함께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도 대장님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구나.'
조원들은 대장과 대장군이 너무 닮아서 신기하다며 대장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출정식이 끝나고 대장군이 화려한 금빛 갑주 대신 검은 갑주로 바꿔입고 나왔다.
그가 선두에 서서 군영을 빠져나가고 1사군부터 차례대로 그 뒤를 따랐다.
1사군 만 명이 군영을 빠져나가는 것만도 반 시진(1시간)이 넘게 걸렸다.
10만 대군은 워낙에 많은 인원이라서 그들이 모두 군영을 빠져나가는 데에는 아주 긴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몇 년이 걸리게 될지도 모르는 북부 토벌군의 여진족 정벌전이 시작되었다.
< 여진족 정벌전 > 끝
ⓒ 청운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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