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무사의 귀환-18화 (18/114)

< 눈치싸움 >

5호의 말이 끝날 때쯤 난 11호에게 전음을 보냈다.

[11호, 저번에 네가 나에게 진 빚 지금 쓰자.]

[무슨 부탁인데?]

[1년 전 그때와 동일해.]

[정확히 뭘 가져다주면 되는 거지?]

[4호가 우리 이야기를 15호 전한 후 그가 4호에게 지시를 내리는 쪽지의 내용]

[그런 거라면 이번 건 그냥 들어줄게. 빚은 아직 유효하다. 그건 다음에 쓰도록 해.]

난 일 년 전에도 11호에게 무공을 가르쳐주는 대가로 4호를 감시하고 그가 15호와 접촉하고 있다는 증거를 가져달라고 부탁했었다.

11호는 우리 무리에 들어오던 날 나에게 그 증거로 쪽지를 몇 개 가져다주었다.

그 쪽지에는 4호가 15호에게 적어 보낸 우리의 정보와 15호가 다시 지시한 내용이 담겨있었다.

11호는 4호를 며칠 동안 한시도 놓치지 않고 감시하여 그들이 쪽지를 주고받는 위치를 찾아내었고, 그곳은 15호 파벌이 머무는 곳에 매우 가까워서 은신술이 뛰어나지 않으면 금세 발각될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 무리에서 은신술이 가장 뛰어난 11호였기에 그는 인내심을 갖고 기회를 엿보다가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같은 일을 부탁했는데 아무 조건 없이 해 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럼 나야 완전 봉 잡는 거지만.. 이 녀석이 왜 그러지?'

[나야 고마운데. 그래도 괜찮겠어?]

[그 정도는 나에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뭐. 그리고 어차피 우리 무리의 일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아무튼 고맙다.]

'이 이상한 감정은 뭐지? 11호 때문에 순간 울컥할 뻔했네. 1년 사이에 정말 많이 변했네.“

분리된 공간에서 생활하며 동료들과도 심적인 거리를 두었던 11호였기에 그의 이러한 변화가 신기하면서도 괜히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만약 잠시 후 15호가 4호가 말을 했는데도 우리에게 끝까지 도발한다면?]

[그럼 지금 이 부탁은 불필요하니 잊어버리고, 다 같이 죽어라 싸우면 돼. 간단하지?]

[이해하기 쉽네. 알겠다. 접수됐어.]

[그래. 너만 믿는다.]

11호와 전음을 마치고 말했다.

"자, 이제 나가볼까?"

나의 말에 동굴 안의 동기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걸음으로 동굴 밖으로 나갔다.

우리의 모습을 보고 15호가 말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진 않았군.“

5호가 별일 아니었다는 듯,

"간단한 질문이었으니까."

15호가 5호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럼 자수한 사람이 있었나?"

5호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 우리 무리에는 없어. 네가 잘못 짚은 거야."

"넌 그 상황에서 말한 너희 무리 훈련생들의 말을 전부 믿나?"

나는 알 수 있었다.

15호가 말을 하면서도 4호의 반응을 살피고 있다는 것을.

'이런. 4호가 초일류고수가 아니라 전음을 못해서 정보 전달이 제대로 안 되고 있구나.'

"그럼. 난 내 동료들을 믿는다. 넌 믿지를 못하나 보군."

5호의 말에 15호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난 그런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아."

"잘났군. 그래서, 뭘 어떻게 하자는 거지? 정말 오늘 끝을 보자는 건가?"

5호의 말에 15호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시선을 돌려 4호와 눈빛이 스치고 난 후 말했다.

"잠시 우리 무리 애들과 대화를 해 봐야겠다."

"얼마든지. 대화하고 와."

5호와 대화를 마친 15호가 무리로 돌아가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잠시 후,

"증거가 나오진 않았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지."

15호의 말에 5호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잘 생각했다."

15호는 돌아서서 자신의 무리로 걸어가며 말했다.

"하지만 너희에 대한 의심이 사라진 건 아니야. 우리가 항상 너희를 주시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마라."

5호는 전혀 신경 안 쓴다는 듯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우리는 상관없어."

그들이 자신들의 동굴로 돌아가자 우리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안도의 한숨을 쉬는 동안 나는 11호에게 전음을 보냈다.

[네가 할 일이 생겼네. 잘 부탁해.]

11호는 차분한 목소리로 전음을 보내왔다.

[그래. 그런데 4호를 우리 무리에 계속 둬도 되는 거야? 다른 애들은 4호의 정체를 모르잖아.]

'와. 11호가 다른 애들을 걱정하는 날이 올 줄이야.'

[오! 난 네가 우리 무리에 대해 전혀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그런 부분까지 신경 쓰고 있었던 거야?]

[그래도 1년 사이 다른 애들은 4호랑 친해진 거 같은데.. 나중에 정체를 알면 배신감에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을까 해서.]

'살막의 무공에 대한 부작용은 이미 다 극복한 거 같네.'

[너 이제 나에게 양의심법을 더이상 배우지 않아도 될 거 같은데?]

나의 전음에 11호가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전음이 왔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왜 수련을 중단해?]

[이미 넌 살막의 무공에 대한 부작용은 극복한 거 같아. 그리고 양의심법도 내가 너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부분은 거의 다 가르쳐줬으니까.]

[......]

잠시 말이 없던 11호가 다시 내게 전음을 보내왔다.

[그냥 비사굴에 있는 남은 일 년 동안은 계속 같이 수련하면 안 될까?]

[그래. 네가 그걸 원한다면 그렇게 하자.]

[정말 고마워. 18호.]

'무뚝뚝하고 냉정해 보이던 11호가 지난 일 년 사이에 정말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네. 혼자서 외로이 지내다가 사람의 정을 느껴버리면 다시 홀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지.'

전음을 마치고 11호가 자신의 동굴로 돌아가면서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눈빛에 따뜻함이 가득 차 있었다.

'어쩌면 나도 너처럼 그런가 보다. 다시 혼자였던 그때로 돌아가긴 싫다.'

나도 그를 향해 따스한 눈빛과 미소를 보내주었다.

11호는 자신의 동굴로 돌아갔지만, 그의 귀와 기감은 4호를 향해 하루종일 열려 있을 것이다.

한차례 소동이 일어난 후 다시 며칠 동안은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그동안 수련하는데 정신이 팔려 무리의 애들을 자세히 보지 않았는데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아이들을 바라보니 일 년 사이 체형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여자애들은 이제 제법 소녀에서 여인의 모습이 나타나면서 몸매에 굴곡이 생기기 시작했다.

남자애들은 일 년 사이 키가 훌쩍 크고 매일 단련한 덕에 균형 잡힌 체격으로 발달하면서, 얼굴만 아직 앳될 뿐 신체만 봤을 때는 어른들에게도 밀리지 않을 만큼 급격히 성장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6호의 변화가 가장 놀라워. 원래부터 우람한 체격이 더 단단해지고 키도 커지면서 남자인 내가 봐도 감탄할 만큼 훌륭한 몸이 되었으니. 그리고 어리숙하던 성격도 일 년 사이 많이 성장해서 누가 봐도 준수한 남자가 되었으니 50호가 반할 만하지.'

요즘에 6호만 동굴에 나타나면 50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6호와 대화할 때는 얼굴도 못 쳐다보고 말까지 더듬는 걸 보면..

'열네 살 사춘기 소년에 대한 소녀의 풋풋한 짝사랑은 옆에서 몰래 지켜보는 재미가 있지. 큭큭."

하지만 이 모자란 내 제자 녀석은 50호의 마음을 모르고 아직도 먹을 것만 밝히니 사부로서 대신 나서서 도와줘야 하나 고민을 했다.

"50호, 너도 11호 동굴에서 우리와 함께 수련할래?"

나의 말에 50호가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말 고마워. 언제부터 가면 돼?"

"너 편한 대로 해."

50호 살짝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말했다.

"그럼.. 오늘부터 가도 될까?"

'하루라도 빨리 6호랑 함께 수련하고 싶은가 보군. 그 어리버리한 녀석에게 제대로 홀려버렸어.'

"그래, 지금 수련하러 가자."

11호의 동굴에 여섯 명이서 모여 수련을 시작했다.

다섯 명은 오랫동안 서로의 수련을 도와주며 합을 맞춰왔기에 일사분란했다.

하지만 50호는 11호의 동굴에 처음 와 보기도 했고, 좋아하는 6호 앞이라 그런지 더 긴장해서 어리버리한 모습을 보였다.

'여자 6호 같은 느낌이네. 은근 잘 어울리는데?'

그때 6호가 나서서 50호를 도와주며 수련에 잘 참여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써 주었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6호가 의외로 아주 눈치가 없진 않아.'

7호가 6호의 행동을 바라보다가 나에게 말을 했다.

"제자가 스승보단 백배 낫네."

'저런 어리버리한 녀석과 날 비교하다니..'

"뭐야, 어딜 봐서? 6호보단 내가 훨 낫지. 흠."

7호는 6호와 50호를 바라보며 부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6호가 50호에게 하는 행동 봐라. 넌.. 그냥 말을 말자."

"너 6호 좋아하냐? 50호에게 잘해줘서 질투하는 거야?"

나의 말에 7호가 상기된 얼굴에 날카로운 눈빛으로 날 노려보았다.

"이런.. 너 미친 거야?"

'음. 내가 또 7호의 역린을 건드린 것 같은데.. 이 아이는 도통 모르겠다. 어느 날은 부드러운 여인이 되었다가 어느 날은 차가운 얼음마녀가 되고.. 여자란 도통 알 수 없는 존재야.'

"미안. 잘못 했어."

"네가 뭘 잘못했는데?"

"......"

"뭘 잘못한 줄도 모르고 사과부터 하는 거야? 넌 진짜 나한테 혼 좀 나야겠다."

7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내가 6호를 수련할 때 두들겨 패는 몽둥이를 집어 들고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애들아 나 좀 살려줘. 7호가 날 죽이려 해."

하지만 27호와 11호는 옆에서 멀뚱히 우리 두 사람을 지켜보면서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일 년 넘게 함께 생활하다 보니 이제 이 아이들이 내 가족 같은 느낌이 든다. 5살 때부터 느껴보지 못한 가족의 정. 그것을 지금 느낄 줄이야.'

나는 7호의 몽둥이를 피하면서도 행복한 감정이 들었다.

27호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나에게 말했다.

"11호가 안 보이네. 언제 사라진 거지. 혹시 나가는 거 봤어?"

나와 7호가 티격태격하는 사이에 조금 전까지 우리 옆에 있던 11호가 조용히 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11호가 갑자기 사라진 걸 보니 4호가 움직였나 보군.'

"좀 전에 급하게 나가더라. 11호가 볼일이 급했나 봐."

나는 대충 둘러대고 나머지 애들과 수련하며 11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11호가 동굴로 들어왔다.

27호가 천천히 걸어오는 11호를 보고 말했다.

"무슨 볼일을 그리 오래 보고 와?"

11호는 날 보고 살짝 미소를 지은 후 27호에게 말했다.

'11호가 성공했나 보구나.'

"잘 안 나오는 날도 있잖아. 확실히 처리하려고 좀 걸렸지."

7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더러운 이야기는 그만해 줄래?"

"오늘 공동 수련은 여기까지 하자. 난 11호 수련 좀 도와주고 갈게. 먼저 돌아가."

"알겠어."

나의 말에 다들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수련을 마무리하고 동굴로 돌아갔다.

11호 동굴에는 나와 11호만 남았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어?"

그가 가슴 속에서 쪽지를 꺼내며 말했다.

"여기 필사해 왔으니 읽어봐."

두 개의 쪽지였는데 하나는 4호가 15호에게 보낸 쪽지였고, 다른 하나는 15호가 4호에게 답하는 쪽지였다.

4호가 보낸 쪽지에 이번 옥패 건은 아까 5호가 말 한 것처럼 우리 무리와 관계없는 일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15호의 답장은 자신들도 옥패의 행방을 따로 알아볼 테니 4호에게도 우리의 움직임을 주시하라고 적혀 있었다.

"이것을 보면 이번 옥패 사건은 15호가 꾸민 일은 아니라는 게 분명해졌네."

내 말에 11호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쪽지의 내용을 보면 다른 누군가가 훔쳐간 건 맞는 거 같은데.. 그게 누굴까?"

'전생에는 없었던 일이고, 의심 가는 자조차 없다. 낭패로군.'

< 눈치싸움 > 끝

ⓒ 청운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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