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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무사의 귀환-5화 (5/114)

< 회귀 >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그녀의 침상 곁으로 조용히 다가서는데, 내 상처에서 혈향이 느껴졌는지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무...사님?"

"헉!"

그녀가 보석처럼 새까만 눈으로 날 쳐다보는데 너무 깜짝 놀라서 심장이 다 벌렁거렸다.

지난 오 년간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신변을 보호해왔지만 이렇게 지척에서 눈을 마주친 건 처음이었고, 거의 인시(03시)에 가까운 시간이라 황녀가 깨어 있을 거라고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 혹시 제가 황녀님의 수면을 방해한 겁니까?"

"아니에요. 잠이 안 와서 깨어 있던 차에 밖이 조금 소란스러운 것 같아서.."

"..송구합니다."

보통은 황녀궁에 침입한 자객과 나의 실력 차가 큰 경우에만 그 자리에서 처리하고, 웬만한 실력자들은 소란을 최소화하고자 조금 떨어진 공터로 유인하여 싸운다.

오늘 침입한 놈은 실력도 대단했지만 장소를 옮길 틈도 없이 공격을 퍼붓는 바람에, 요란하게 사투를 벌이는 소리가 황녀에게까지 들린 것 같았다.

"그보다.. 어디 다치신 건가요?"

"아뇨, 괜찮습니다. 황녀님도 별고 없으신 걸 확인했으니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사실 출혈만 겨우 막아놨을 뿐이라 배도 계속 쑤시고 얼굴은 물론 등까지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나는 황녀에게 괜한 염려를 끼치기 싫어 황급히 인사를 하고 뒤돌아섰다.

"자, 잠시만요!"

그런 나를 불러세운 그녀가 침상 곁의 작은 약장에서 환을 하나 꺼내어 내게 다가와 건넸다.

"출혈까지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상처와 기력을 회복하는 데에 도움이 될 거에요."

"..감사합니다."

나는 두 손으로 공손히 환을 받아들고 그녀의 방에서 빠져나와 내 은신처인 전각 지붕 위로 올라갔다.

부상자에게 약을 준 것이 선물이라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처음 받은 걸 냉큼 사용해 버리기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잠시 주저하며 손에 쥔 환만 쳐다보노라니 복부의 통증이 점점 심해져서 두 눈 질끈 감고 환을 입에 넣었다.

확실히 황손이 먹는 진귀한 약이라 그런지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났다.

온몸에 활력이 솟고 출혈도 쉽게 잦아드는 게 우리가 평소에 쓰던 비상약과는 아예 차원이 달랐다.

나는 자상을 입은 부위에 다시 붕대를 감은 후 호흡을 가다듬고 앉아 약효가 온몸 구석구석까지 다 돌 수 있도록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이 각(30분) 정도 시간이 지나자 정상적인 몸 상태까지는 아니지만, 기력도 내력도 많이 안정된 것이 느껴졌다.

나는 운기조식을 멈추고 '오늘 내가 큰일 한 건 했다!' 하고 벌러덩 드러누워서 밤하늘의 보름달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휘영청 한 보름달 위로 좀 전에 마주친 그녀의 얼굴이 아른거리고 나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전의 오 년 동안은 사방으로 기감을 뻗치며 주위를 경계하다가 문득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면 한없이 공허하고 외로운 기분이 들었었다.

'내가 이렇게 목숨 걸어가며 지켜도 우리 황녀님은 내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겠지. 난 하루하루 그녀가 어떻게 커가는지 지켜보며 같이 울고 웃는데, 그 모든 추억은 오로지 나 혼자만의 추억이니까.'

그건 나뿐만 아닌 모든 그림자 무사의 숙명과도 같은 거였지만, 홀로 지새는 밤이 끊임없이 이어질 때면 가끔씩 그런 서글픈 감성이 치고 올라왔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그녀를 지키느라 다친 나를 그녀가 잠시 살펴준 것만으로도 그간의 고된 세월을 전부 보상받은 듯한 충족감이 든 것이다.

불과 일다경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그녀를 마주했을 뿐인데도 그녀의 얼굴, 표정, 목소리, 손끝의 온기까지 모든 게 생생하게 기억났다.

나는 다시 없을 추억이라 생각하며 그날의 행복한 기분을 만끽했고, 언제나 길게만 느껴졌던 밤이 그날따라 순식간에 지나갔다.

다음날, 황녀궁으로 가기 전 그림자 무사를 전담하는 의원에게서 외상을 치료받았다.

그는 척 보기에도 보통 자상은 아닌데 하루 만에 짐승같이 회복하고 있다며 신기해했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치료를 마치고 황녀궁 지붕 위로 올라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18호 무사님.. 계세요?"

내가 황녀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그녀의 방이나 주변을 오간 적은 있어도 그녀가 먼저 나를 찾은 적은 없었기에 이러한 호출이 무척 뜻밖이었다.

나는 재빨리 황녀의 방으로 들어가 그녀 앞에 부복했다.

"찾으셨습니까?"

"저기.. 이거."

"....."

그녀는 어제와 같이 나에게 작은 환을 하나 내밀었다.

'이거.. 효능이 엄청나던데. 이렇게 진귀한 영약을 또 받아도 되는 건가?'

어제는 정말 얼떨결에 주는 대로 받았었는데 오늘 또 받으려니 송구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덥석 받기도, 그렇다고 황녀의 호의를 거절하기도 몹시 애매한 상황.

나의 어색한 침묵에도 그녀가 다시 한번 권했다.

"절 지켜주시는 분이니까, 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앞으로도 절 지켜주시려면 하루빨리 회복하셔야 하고. 또.. 무사님이 다치시면 제가.. 속상하니까.."

"...감사합니다, 황녀님"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는 거의 기어들어 갔지만,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는 내 가슴 속에 큰 파동을 불러일으켰다.

'내 사람이라니..'

심장이 너무 쿵쾅쿵쾅 뛰어서

이러다 내 심장 소리가 그녀한테까지 들릴까 걱정될 지경이었다.

난 그녀가 내민 환을 받으며 나도 모르게 기쁨이 가득 찬 미소를 지었고, 그런 내 얼굴을 그녀는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그녀는 나를 불러 환을 건네주었고 열흘 가까이 지났을 무렵에는 더 이상 치료나 영약이 불필요할 만큼 몸 상태가 좋아졌다.

그날도 황녀의 부름에 방으로 찾아간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그녀에게 말했다.

"황녀님,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상처가 다 회복되어 이제는 환을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그래요? 좋아지셨다니 다행이네요."

그녀는 내가 회복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어딘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이었다.

더는 용건이 없어진 내가 인사를 하려는 찰나 그녀가 황급히 말했다.

"저기, 무사님! 어.. 실은 제가 무사님께서 다치신 그날 이후로 좀.. 밤이 무서워져서요."

"아.. 송구합니다. 제가 황녀님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불안에 떨게 만들었나 보군요."

"아,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저 당분간이라도 좀 더 가까이서 지켜주시면 안 될까요?"

"가까이...라면 어디를 말씀하시는 건지."

"여기.. 아니면 문밖이나. 아니면 그냥 하루에 한 번씩만 들려주셔도 돼요."

"...네, 알겠습니다."

원래도 그림자 무사는 황손의 지척까지 다가갈 수 있고 필요에 따라 방에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지만, 내가 맡은 황손은 어엿한 숙녀 다 보니 최대한 출입을 자제하고 행동을 더욱 조심했었다.

하지만 그 날 이후 나는 그녀의 공식적인 허락하에 매일 자시마다 그녀의 방에 들어가 그녀가 평안히 잠들었는지 확인하고 나오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그녀의 방에 잠시 다녀올 때마다 충족감을 느끼고 오늘도 열심히 그녀를 지켜야겠다며 의욕을 불태웠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게 끝이 없어서 그녀의 방에 드나들수록 점점 더 그녀의 얼굴을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보고 싶어졌다.

"야야! 그건 임무를 핑계 삼아 사리사욕을 챙긴 거 아니냐?"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을 흥미롭게 듣던 노인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니, 내가 뭔가 음흉한 생각이라던가 그런 게 있어서는 절대 아닙니다!"

"난 아무 말도 안 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거지."

뭔가 노인의 말재간에 휘말린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달리 반박할 말도 없었다.

"그래서, 황녀는 이름은 뭔데?"

"주소연이에요. 이름도 예쁘죠?"

"황녀에게 아주 제대로 빠졌구나."

"그러게요. 처음에는 솔직히 몰랐어요. 그녀를 바라보면서 심장이 콩닥거리는 이 마음이 무엇인지를. 물론 지금은 확실히 알고 있지만요."

내가 그녀를 처음 본 건 그림자 무사가 되기 위한 수련을 마치고 열여덟 살이 되던 해였다.

누굴 맡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확인하러 갔는데 그곳에는 열세 살의 귀여운 소녀가 있었다.

긴 머리에 인형 같은 눈매 하며 빵빵한 볼살까지도 사랑스러운 그녀가.

그때부터 매일 밤 그녀를 지켜주게 되었는데 난 그녀를 볼 수 있는 매 순간이 행복했다.

천진난만한 표정도 좋았고 피곤한 날에는 코를 골며 자는 모습마저 귀여워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소녀가 평생 소녀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어느새 자라서 어여쁜 숙녀가 되어버렸고, 그저 귀여운 아이라 생각했던 그녀에게서 어느 순간 여인의 향기가 나니 기분이 점점 묘해졌다.

괜스레 좀 쑥스러운 느낌이랄까.

자시마다 그녀의 방에 찾아갈 때도 가끔은 아찔한 기분이 들어 도망치듯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매일 밤 설렘과 긴장 속에서 애정을 차곡차곡 쌓아오는 동안 어느덧 오 년의 시간이 더 흐른 것이다.

오늘도 나는 자시가 되어 그녀를 보기 위해 방으로 내려갔고 잠시간 행복한 시간을 누리는데 혈비라는 불청객이 찾아온 거였다.

지붕 위에 있을 때는 항상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데, 황녀방에만 내려가면 그녀에게 집중하느라 채 주변을 살피지 못하곤 했다.

"자칫하면 침입자의 기척을 놓칠 뻔했어요. 그놈의 은신술이 워낙 대단하기도 했고요. 하여튼 다행히도 그놈이 전각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제가 먼저 그놈의 기감을 포착하고 얼른 밖으로 나갔어요."

"은신해 있다가 공격하지 왜 밖으로 나가?"

"아무리 황녀를 지키려는 거지만 그녀 방에서 침입자랑 칼부림을 할 순 없잖아요."

"그래서 전각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놈에게 암기를 던지고 앞뜰에서 치열하게 싸웠는데.. 싸움은 이겼지만 저도 그놈 때문에 이렇게 죽고 말았으니, 결국 양패구상으로 끝난 거죠."

"사연이 없는 죽음은 없지만 네 놈의 인생도 참으로 기구하구나. 쯧쯧"

저승사자와 내가 한창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에 갑자기 나의 몸 안고 있던 황녀가 옆으로 픽 쓰러져버렸다.

"어어?! 황녀님이 왜 쓰러지신 거예요?"

그는 황녀와 나를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네 놈 몸뚱이가 독기로 가득 차 있는데 그런 널 만지고 입까지 맞췄으니 중독되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그럼 저 때문에 황녀님까지 죽는다는 거예요?"

"장담할 순 없지만.. 화타 같은 신의가 옆에 있지 않는 한 저 아이의 명은 여기까지 일 거 같구나."

"제길! 난 그녀를 지켜야만 하는데 오히려 내가 그녀를 죽게 만들다니.."

"너무 자책하지 말아라. 그녀 또한 너의 상태를 알고도 그리한 것이니 결코 네 탓이 아니다. 죽음 또한 그녀의 선택이었다."

"저승사자님, 정녕 그녀를 살릴 방법은 없나요?"

"나는 그저 명부에 적힌 망자를 저승으로 데려갈 뿐이니 달리 무슨 방도가 있겠느냐."

"그럼 누구에게 부탁해야 하나요?"

"미련을 버려라. 어차피 너 또한 이승을 떠날 망자가 아니냐."

노인의 손에 갑자기 또 다른 저승 명부가 나타났다.

복잡한 표정으로 적배지를 들여다본 그는 짐짓 단호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안타깝지만 더는 네 사정을 들어줄 시간이 없구나. 이만 떠나야 한다."

"네.. 가시지요."

나는 저승사자의 뒤를 따라 희뿌연 안개 속을 한참을 걸었다.

앞서 걷는 저승사자의 도포 끝자락도 잘 안 보일 만큼 안개가 짙어졌을 때 그가 돌연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여기가 저승 문턱이다. 이곳을 넘으면 다시는 이승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곳을 지나면 염라대왕님 앞에서 심판받는 건가요?"

"그렇지. 넌 이승에서 제법 의로운 일을 했고 불행하게 살았으니 지옥에 가진 않을 거 같구나."

"그럼 얼른 가시지요."

무기력한 모습으로 발걸음을 떼려는 나를 그가 멈춰 세웠다.

"이승에 미련은 전혀 없느냐?"

"그녀도 없는 이승에 남아봐야 좋을 일이 뭐 있겠습니까?"

"황녀를 다시 볼 수 있다면? 아니, 너도 그녀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어찌할 테냐?"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기에 곧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하느냐."

"글쎄요.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때는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습니다. 황궁에서 그림자 무사로서의 삶이 아닌 새로운 삶이요."

그는 나의 대답이 상당히 의외였나 보다.

"다르게 산다라.. 그러면 황녀를 못 만날 수도 있는데?"

"제가 이전과 같은 삶을 산다면 그녀도 오늘처럼 비극적인 죽음을 맞을 테니까요. 그녀에게까지 저의 불운을 나누고 싶지 않아요."

"그녀를 위해 아예 인연을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구나."

"네."

"훌륭하구나. 연모하는 여인을 위해 자신이 떠나겠다니."

"그런데 이런 건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 아닙니까?"

"흐흐. 원래대로라면 그렇지."

저승사자가 짧은 주문을 외우자 내 등 뒤로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그는 익살맞은 미소를 지으며 툭! 하고 나를 떠밀었다.

"잘 가거라."

"네에?!"

"다시 사는 삶은.. 부디 불행하지 않길 바란다."

끝이 보이지 않는 구멍 속으로 빠져들며 정신을 잃기 전 들은 그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 회귀 > 끝

ⓒ 청운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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