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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무사의 귀환-4화 (4/114)

< 그림자무사의 삶 >

"뭐야, 사연 있는 사람처럼 왜 이래? 이름이 없다니. 그냥 18호 아냐? 성은 십. 이름은 팔호."

"설마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구나. 입꼬리 올라간 거 다 보이거든요?"

"흠흠. 안 그래도 그게 너무너무 궁금해서 내가 널 직접 데리러 왔잖냐."

"뭐가요?"

"아니, 십 년 전쯤부터 너처럼 숫자로 된 이름이 저승명부에 올라오길래. 데려온 차사들한테 물어봐도 모르겠다고만 하니 이 몸이 직접 오셨지. 영광인 줄 알아라. 십팔 ㅎ..."

"안 돼! 안 돼요, 이거 세 번째!"

"아차차, 미안미안. 아, 그렇게 노려보지 말고. 내가 현장을 뛴지 하도 오래돼서 깜빡했다."

나는 펄떡 놀란 심장을 가라앉히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내 인생은 마지막까지 이리 꼬인단 말인가!'

"야야, 그래도 나 정도 되니까 너한테 이렇게 시간도 주고 네 얘기도 들어주고 하는 거야! 다른 놈들 같았어 봐. 만나자마자 이름 세 번 딱딱딱 부르고! 바로 염라대왕님 앞으로 데려가는데."

"네네, 감사합니다. 그럼 귀한 시간 주셨으니 전 이제 우리 황녀님 얼굴 좀 봐도 될까요?"

"그래, 뭐. 그러든지.. 대신 있다 꼭 얘기해 줘야 한다, 응? 네 이름이 왜 그 모양인지."

"네에, 형님."

나는 저승에서 온 형님에게 대충 대답하고 황녀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 우리 황녀님은 어쩜 저렇게 우는 얼굴까지 예쁜 건지. 그보다 우리 황녀님, 계속 울다가 탈진할까봐 걱정이네.'

'나 같은 놈이 뭐라고 저렇게까지... 아니 근데 저렇게까지 우는 거 보면 진짜 황녀님이 날 정말 좋아하긴 한 것 같은데..'

'아직도 믿기지가 않네. 그리고 그.. 입맞춤도. 엄청 부드럽고 촉촉했던 것 같은데 너무 짧게 스쳐 지나가서..'

나는 그녀와의 입맞춤을 떠올리며 손을 들어 입술을 더듬으려 했지만, 이미 몸을 빠져나온 상태에서 느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몸뚱이도 없는 놈이 황홀한 추억에 빠진 모양새가 퍽 웃겼던지 노인이 나를 놀려댔다.

"풋! 너 숫총각이었냐? 입맞춤도 처음이고?"

"아 진짜 다시 생각해도 열 받네? 그 중요한 순간에 명줄을 끊다니!"

"어허, 말이 짧다? 열 받는다고 막말을 하다가 나중에 후회한다 너."

"그래도 나랑 황녀님이랑 사랑을 확인하자마자 죽는 건 너무 하잖아요! 염라대왕 이 몹쓸.."

"야야 그게 왜 내 탓이냐. 네놈이 몹쓸 명운을 타고나서 그렇지."

"네네, 제가 전생에 나라라도 말아먹었나 보죠."

세상 억울한 마음에 퉁퉁거리는 나를 보며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쯧. 말하는 본새하고는. 근데 생각해보니 네놈은 참 특이한 놈인 것 같다?"

"또 뭐가요?"

"보통 열에 아홉은 저승사자가 찾아오면 살려달라고 하거든."

"..그럼 나는 열에 하나인가 보네요."

"왜? 넌 이승에 미련이 없어? 아까 황년지 뭐시긴지는 그렇게 애틋하게 바라보더만."

"아니 뭐, 황녀님을 하루라도 더 볼 수 있다면야 당연히 좋지만.."

"좋지만?"

"그냥 뭐..."

나는 삶의 끝자락에서 처음 느껴본 선선한 밤바람을,

독으로 온몸이 불덩이 같은 상태에서도 도리어 평온해졌던 마음을 떠올렸다.

"뭐야. 말을 왜 하다 말어? 괜히 더 궁금해지게."

"그다지 행복했던 삶은 아니라서요."

"왜? 뭐 하고 살던 놈인데?"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한 후 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까 내 이름이 왜 이러냐고 물어봤었죠?"

"어!! 왜왜? 네가 하는 일이랑 이름이 무슨 관련이라도 있어?"

"네, 전 그림자 무사거든요. 평생을 어둠 속에서만 살아야 하는 존재들."

"어둠 속? 음지에서 못된 일이라도 하는 건가?"

"아뇨.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분들을 지키는 일을 하죠."

"그런데 왜 어둠.. 아! 주로 밤에만 일하는 거구나?"

노인은 대단한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신난 표정으로 손뼉을 쳤다.

"네. 전 어둠 속에서 평생을 살았어요."

"평생을? 어릴적부터 말이냐?"

나는 이제는 가물가물한 유년 시절의 기억을 억지로 끄집어냈다.

"다섯 살 때부터였나. 대부분의 빛을 차단한 채 어둠 속에서 훈련을 받은 게..."

"황궁 지하에 희미한 등불 외에는 아무 빛도 들지 않는 깊숙한 동굴이 있어요. 무경원(貿景院)이라고 불리는. 그곳에서 무려 십 년 동안이나 어둠 속에서 모든 감각을 극대화 시키는 훈련을 받아요."

"뭐 그런 거지 같은 곳이 다 있어? 나 같으면 진작 도망쳤을 텐데."

"도망이라..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그곳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단 두 가지뿐이에요."

"그게 뭔데?"

그새 또 호기심이 동한 건지 노인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첫 번째는 도망이죠. 아무런 대책도 없이 1차 수련 기간을 못 넘기고 동굴 밖으로 뛰쳐나간 애들이 절반쯤 되려나?"

"오! 그래서 성공했어?"

"아뇨, 결과는 최악이었어요. 몇 년 동안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태양빛을 바로 본 순간 다들 비명을 지르며 눈을 부여잡고 쓰러졌고 그들을 다시 보진 못했어요."

"다 죽은거냐?"

"그건 아니지만 어디론가 보내졌다고 들었어요."

시종일관 장난스럽던 노인의 얼굴이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그럼 두 번째 방법은?"

"뭐, 결과는 비슷해요. 훈련과정에서 무사로서 도저히 써먹을 수 없을 만큼 재기불능이 되어 폐기되거나 사망하는 경우. 훈련에서 열외되고 남은 여생은 황궁에서 돌봐주죠."

"......"

적배지를 손에 들고 나타나서부터 쉴새 없이 떠들어대던 그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나는 십 년 만에 무경원에서 걸어 나와 처음 보름달을 쳐다봤던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빛이었건만 어둠에 익숙해진 내 눈에는 너무 밝게 느껴져 시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자 오히려 안정감이 찾아오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럼...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 지내온 게냐?"

"무경원에서 십 년, 나와서 삼 년 더 실전훈련 받고, 정식으로 그림자 무사로 배치받은 후에 또 십년이 지났으니까.. 벌써 이십 삼 년이나 흘렀네요."

스물여덟 인생의 대부분을 어둠 속에서 살아왔다는 나의 말에 노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 이름은? 이름은 또 왜 그 모양이고?"

"다섯 살에 처음 무경원에 끌려왔는데 그때부터 난 18호였어요. 아마도 들어온 순서대로 붙인 거 아닐까요?"

"아무리 그래도 설마.."

"뭐 새로 짓기 귀찮아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일부로 그렇게 지은 것 같기도 해요."

"왜?"

"음.. 아무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 위해서? 우린 세상에 존재한 흔적이 남으면 안 되거든요."

그림자 무사는 황궁의 병부에 공식적으로 기록하여 관리되고 있는 호위 병력과는 별개로 소수의 인원을 집중적으로 육성하여 황손의 밀착 호위로 투입하는 정원 외의 특수인력이다.

따라서 황궁을 찾아오는 밤손님들도 우리의 존재를 전혀 모를 수밖에 없었고 우리를 직접 만난 자객들은 전부 우리 손에 목숨을 잃었기에 비밀이 새어나갈 일도 없었다.

"우리는 대장 외에는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고 스스로 철저하게 고립되어야만 해요.

동기가 죽든, 내가 죽든, 그저 셀 수 있는 숫자가 하나 줄어들었을 뿐이죠.

유용한 장기말 하나가 죽었다고 해서 아무도 슬퍼하지 않아요.

내 자리가 비면 다른 그림자 무사로 채우면 되니까.

그래서 우리는 내 주인을 지키는 것과 내가 살아남는 것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밖에 없죠."

나는 좀 전에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느낀 미묘한 감정이 무엇인지 비로소 깨달았다.

그것은 일종의 해방감이었다.

"예전에는 이렇게 소모품처럼 살다 죽는다는 게 너무 억울하고 싫었는데..

막상 죽어보니 나쁘지 않네요.

이 허망한 삶과 굴레가 끊어졌다는 게."

내 기나긴 한풀이를 묵묵히 듣던 노인은 수염이 파르르 떨릴 만큼 성을 냈다.

"...지독한 놈들. 죽기만 해봐라. 전부 다 지옥 불구덩이에 쳐넣어 버릴 테다!"

"에? 그림자 무사들을요?"

"뭐라는 거야? 너넬 그렇게 만든 놈들 얘기지."

"아아, 난 또.."

제 일도 아니면서 저 혼자 성내는 노인을 내버려 둔 채, 나는 또다시 황녀님만 멍하니 쳐다보며 잠시간 평온한 시간을 누렸다.

한참을 씩씩대던 노인이 제풀에 지쳤는지 내 곁으로 바짝 다가와 말했다.

"야야, 그런 우울한 과거 말고 황녀랑 너랑 어떤 사이인지나 좀 얘기해 봐봐."

"아이고, 형님. 또 호기심 발동 걸리셨어요?"

"당연한 거 아냐? 원래 남의 연애사가 제일 재밌는 거야."

"연애는 무슨. 그냥 나 혼자 가슴 깊이 품어온 외사랑인데."

"외사랑이고 뭐고 간에. 그래서, 어쩌다 좋아하게 된 건데?"

"음..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이니까 스물세 살 때 일이었어요."

"오, 한창 혈기왕성할 때였구먼."

"그렇죠. 날아다녔죠, 그땐."

내가 황녀궁에 배치된 지 오 년이 지나던 해 가을이었다.

그날 밤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황녀궁 지붕에서 은신하며 주위를 경계하던 중이었는데, 무림인 몇 놈들이 황궁에 침입한 게 느껴졌다.

황궁에는 황손이 여럿이니까 부디 다른 쪽으로 가길 빌었는데 그들은 하필 내가 있는 황녀궁으로 왔다.

"몇 놈이나 쳐들어왔는데?"

"전부 다섯 놈이었는데 그중에 한 놈은 집중해도 기감이 잘 잡히지 않을 정도로 강자였어요."

그놈들이 기척을 숨기며 내가 지키고 있는 전각 지붕에 내려앉아 기왓장을 연 순간, 난 무형독이 발라져 있는 침을 미세한 소리조차 나지 않을 만큼 정교하게 그놈들에게 뿌렸다.

"전 그거 한방이면 싹 다 마무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놈은 확실히 좀 다르더라고요.

한 놈이 용케 그걸 알아채고 피해버렸고 나머지 네 놈은 그대로 염라대왕님께 보내드렸죠."

"그놈이 대장이었나 보구나."

"아마도요? 그놈은 자기 동료가 죽은 걸 보고 화가 났는지 엄청난 위력의 마공으로 공격해 왔어요. 너무 미친놈처럼 돌진해 오니까 살짝 겁이 날 정도였죠."

그놈의 마공을 피하고 나서 이 각(30분) 가까이 공수를 주고 받았는데, 싸움이 길어질수록 정면승부로는 쉽사리 승부가 날 거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놈이 내 공격 범위 안쪽까지 깊숙이 들어올 수 있도록 일부로 빈틈을 내보였다.

"오! 몸만 쓸 줄 아는 놈인 줄 알았더니, 머리도 제법 쓰는구나."

그놈은 내 허점을 발견하는 즉시 내게 출검을 했고, 난 이미 예상한 공격이라 가볍게 피하고 그놈을 제압하려 했다.

하지만 완벽히 피했다고 생각한 그놈의 공격은 내 생각이나 육체적인 반응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했고 난 그놈의 검에 복부를 찔리고 말았다.

단발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난 복부에 박힌 그놈의 검을 한 손으로 부여잡고 다른 한 손으로 그자의 목에 내 단검을 찔러 넣었다.

"와, 이거이거. 엄청나게 독한 놈이었구먼."

"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복부가 욱신거려요."

그놈은 목에 단검이 박힌 채로 자기는 광마라며 내 이름을 물었다.

숨이 다 넘어가는 주제에 내 이름이 왜 궁금한지 모르겠지만, 곧 죽을 사람 부탁도 못 들어주나 싶어 간결하게 18호라 답했다.

그놈은 욕지거리라 생각했는지 두 눈을 부릅뜬 채 끝까지 부들거리며 죽었다.

죽은 놈의 복면을 벗겨보니 눈도 시뻘겋고 얼굴까지 뭉개져 있었다.

거기다 나와 싸우면서 별의별 이상한 마공을 다 쓴 걸 보면, 확신할 순 없지만 마교 출신이었던 것 같다.

"마교 놈들이 황궁엔 뭐하러?"

"글쎄요. 그자가 왜 침입했는지까지는 확인 못 했어요. 물어본다고 말이 통할 것 같지도 않았지만, 거의 미친 소처럼 달려들어서 대화할 틈도 없었거든요."

"하긴 미친놈과 대화는 힘들지."

하지만 그날 난생처음으로 복부에 커다란 자상을 입었으니 실력 하나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꽤 많은 자객들과 싸우면서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지만, 거동이 불편할 만큼 크게 다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난 복부에 박힌 검을 제거하고 점혈한 후 무복 끝자락을 찢어 임시로 복부에 둘러 감았다.

그리고 다친 몸을 이끌고 황녀의 안위를 살피기 위해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 그림자무사의 삶 > 끝

ⓒ 청운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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