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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무사의 귀환-3화 (3/114)

< 수상한 저승사자 >

"18...호 무사님? 제 말 들리시죠?"

"...예, 황녀님."

뜬금없는 그녀의 부름이 몹시 당황스러웠지만 모시는 이의 말을 무시할 순 없었다.

"어디 계셔요?"

"....여기 있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그림자 무사는 호위하는 대상을 포함하여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존재를 알고 있었다.

또한 존재 자체가 은밀한 만큼 항상 은신술을 펼치고 호위를 했기 때문에 이렇게 황손이 직접 부르거나 자객들과 싸울 때 외에는 그 모습을 드러내는 일도 거의 없었다.

어쨌든 황녀가 나를 찾는 것 같길래 재빨리 은신을 풀고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 아뇨. 특별한 문제가 있는 건 아닌데..."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안절부절못하는 몸짓으로 한참이나 뜸을 들이더니 뒤따르던 궁인들을 잠시 뒤로 물리고는 개미만 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저기... 오늘이 제 생일인데요."

"네, 알고 있습니다."

"아... 알고 계시는구나. 어.. 음... 그러니까... 제가 특별히 뭘 받고 싶은 건 아닌데..."

"......네?"

'...뭐지? 설마 지금 나에게 생일축하라던가 선물 같은 걸 받고 싶으신 건가?'

"아! 내가 지금 뭐라는 거야, 정말~"

그녀의 얼굴이 어스름한 달빛 속에서도 확연하게 티가 날 만큼 새빨개졌다.

잠시 더 우물쭈물 망설이던 그녀는 갑자기 그렁그렁한 눈으로 날 째려보더니 빽 한번 소리를 치고는 내궁으로 돌아가 버렸다.

"...아니 그냥! 다른 사람들 말고 무사님한테 직접 축하받고 싶었다고요!"

'....응? 뭐야, 진짜 그런 거였어?'

나는 궁인들과 함께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청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잠시 후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부끄러움에 몸부림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라 입가를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 진짜 우리 황녀님을 어쩌면 좋을까. 진짜 억 소리 나게 예쁜 숙녀가 하는 행동은 또 왜 저렇게 귀여운 거야?'

나는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황녀궁 전각으로 돌아왔고 이후 밤새도록 그녀를 위해 무엇을 준비할까 고민한 끝에 소담한 꽃다발을 하나 만들어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 두고 나왔다.

세상의 온갖 진귀한 패물은 다 갖고 있을 테니 내가 줄 수 있는 거라곤 그녀가 좋아하고 그녀를 닮아 어여쁜 꽃들을 따다 주는 것뿐이란 생각에서였다.

하루가 지나고 다시 밤이 찾아왔을 때 그녀는 전각 후원에 나와 다시 한번 나를 불렀다.

"18호 무사님. 잠시만 나와보시겠어요?"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보니 그녀는 내가 준 꽃다발을 화병에 꽂아 두 손으로 소중하게 감싸 들고 있었다.

"이거... 무사님께서 주신 것 맞죠?"

"네, 맞습니다. 미리 챙겨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그리고 생일 축하드립니다."

"앗 아니에요. 오히려 이렇게 예쁜 선물도 주시고.. 고마워요."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래서 저도 무사님께 보답을 드리고 싶은데..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이름을 지어 드려도 될까요?"

"제 이름...이요?"

난 이름이 없다. 처음부터 이름이 없는 존재로 나고 자랐다.

'글쎄, 어쩌면 날 낳은 부모들이야 내게 이름을 지어줬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모든 삶 동안 난 아무 이름도 없는 그림자 무사였다.

다만 그림자 무사 훈련생 시절부터 서로를 구분하기 위해 썼던 번호만이 유일한 호칭으로 남아있다.

'하필이면 그게 18...호라는 게 문제지. 하.. 진짜 욕하고 싶다. 무경원에서 처음 번호를 부여받을 때도 동기들이 엄청 놀렸었는데. 운도 더럽게 없는 놈이라고.'

하여튼 한평생을 번호로만 불려왔기에 내게 이름이 없다는 자각조차 이미 희미해졌었는데, 막상 황녀가 이름을 지어준다고 하니 무언가 울컥하는 기분이 치솟았다.

'...이름이라니. 뭔가 내가 당신에게 대단히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것 같아. 하지만... 당신은 나와 같은 마음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

나의 짧은 침묵이 부정적인 대답으로 보였던지 황녀가 말을 덧붙였다.

"아.. 싫으면 거절하셔도 돼요. 그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름 없이 산다는 게 안타까웠을 뿐이라서.. 그렇다고 동정하는 건 아니고요!"

"...그럴 리가요. 황녀님께서 제게 이름을 지어주신다면 평생의 영광으로 여기겠습니다."

내 대답에 그녀는 만개한 꽃처럼 찬란한 미소를 지으며 조만간 이름을 지어 알려주겠노라 말했다.

그날부터 나는 하루하루 설레는 마음으로 그녀의 호출을 기다렸으나,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자 실망감이 점점 커져 반쯤 포기한 상태가 되었다.

'그녀는 그냥 인사치레로 한 말이었는데 나 혼자 설레발 치고 있었던 건가?'

그게 삼 개월 전이었다.

'그녀도 잊지 않고 있었구나.'

"제... 이름이 무엇입니까?"

"무영(無影). 무영이에요. 무사님을 처음 본 십 년 전 그날 밤에도 그림자가 없었으니까요."

"무...영! 드디어 제게 이름이 생겼군요. 고맙습니다, 황녀님."

"너무 늦어서 미안해요. 그리고.. 비록 그림자는 없지만 항상 그림자처럼 제 곁을 지켜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아닙니다. 그게 제 본분... 쿨럭! 인걸요."

숨이 점점 가빠온다.

손발에 힘도 빠져나간다.

이런 내 변화가 그녀에게도 느껴졌는지.

"무..무사님? 이대로 가면 안 돼요. 나 아직 좋아한다고 고백도 못 했는데... 흐흑"

쿵!

두근두근!

내 심장에서 나는 소리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황녀님이 날.. 뭐?'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 한줄기를 훔치고 그녀가 다시 말한다.

"무사님.. 은애해요.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아주 오랫동안 당신을 은애해왔어요."

"절... 왜?"

쿵쾅쿵쾅!

그녀의 말이 가슴에 박힌 순간.

심장이 격렬하기 뛰기 시작한다.

터져 버릴 것만 같다.

무슨 말이든 해야겠는데 머리가 하얘져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하긴 한평생을 무공 바보로만, 그녀를 지키는 그림자 무사로만 사느라 연애 한 번 못 해봤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그런 나를 향해 그녀의 얼굴이 점점 다가온다.

'어어? 얼굴이 너무 가까운...데? 헉!!'

입술이.

그녀의 발갛고 촉촉한 입술이.

내 입술에 닿는 순간.

'심장이 멎을 것만 같...'

삐-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아. 이게 뭐지? 이 중요한 순간에... 아하하.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 내 흑백 인생에 유일하게 빛나는 마지막 순간이었는데!!'

한참을 씩씩대며 울분을 쏟다가 내려다보니, 우리 황녀님이 내 몸뚱어리를 끌어안고 서럽게 울고 있다.

'아..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

그녀가 날 위해 울어주는 게 기쁘고 황홀하면서도, 서글피 우는 그녀가 안쓰러워 안아주고 싶다.

'당신이 나를 품에 안고, 내가 그대를 마음껏 지켜볼 수 있는, 시리도록 아프고 행복한 이 순간이 영원히 멈춰버렸으면 좋겠다.'

그때,

난데없이 내 귀로 들려온 육두문자 한마디.

"시팔···호?"

'뭐야. 지금 욕한 거야?'

"이게 아닌가? 네 이름 이거 아니냐?"

'아.. 그냥 날 부른 거구나. 근데 이 할아버지는 누구지?'

고급스러운 흑의를 차려입고 회색빛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차림새만 놓고 보면 사대부 집안의 큰 어른 같은데 그의 눈빛에는 장난기가 흘러넘쳤다.

"어허, 할아버지라니. 말이 심하네."

'뭐야. 지금 내 생각이 들리나? 나 지금 소리 내서 말했나?'

"아니아니, 그냥 내가 좀 능력이 출중해서 뭐. 네놈 생각 정도야 눈감고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지."

'...지금 저걸 믿으라고 하는 소린가? 그냥 또라이인가?'

"뭐? 또라이? 이런 싹수없는 놈을 봤나. 귀엽다고 봐줬더니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먼?"

'헉! 진짜인가 보네.'

난 상대의 생각을 읽을 줄 아는 흑의의 노인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근데 어르신은 누구세요? 아, 혹시 저승사자. 뭐 그런 건가요?"

"흠, 그런 잔챙이들과 비교할 수 없는 귀한 몸이긴 하다만. 뭐, 네놈을 저승길로 인도하러 나온 참이니 그렇다고 치자."

"아.. 진짜 그런 게 있었구나. 아니 근데 보통은 이름 세 번 부르고 바로 데려가는 거 아니에요?"

"에잉, 인간미 없게 바로 데려가면 쓰나. 그래도 인생 한번 돌아볼 시간도 주고, 마음 정리하고 이생이랑 깔끔하게 이별할 수 있는 시간도 주고 해야지."

'오, 꼬장꼬장하게 생겼는데 보기보다 배려가 있네?'

내가 노인의 신비한 능력을 깜빡한 채 무심결에 속으로 중얼거리자,

"후.. 꼬장꼬장... 됐다, 그냥 가자. 십팔호. 십..."

"으아아! 죄송해요, 어르신! 제가 실언했어요."

"어르신?"

"아뇨아뇨! 멋지고 아량 넓은 우리 형님!"

"크흠흠. 그래! 내 특별히 인심 써서 정리할 시간 딱 일다경만 주마."

"일다경...이요?"

겨우 차 한잔 마실 만한 시간에 급격히 어두워진 내 얼굴을 보고 노인이 말했다.

"그.. 그럼 반 시진?"

"한 시진...은 어려울까요?"

"야, 한 시진은 양심 없는 거 아니냐? 기껏해야 이십팔 년 살아놓고 정리할 게 뭐 있다고."

"...젊은 나이에 죽는 것도 서러운데 어떻게 그런 말씀을."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에이, 뭐 그래! 한 시진 그 까짓거, 내 친히 기다려주마!"

"감사합니다!"

저승사자와 극적 타결을 이뤄낸 나는 원 없이 그녀를 쳐다보기로 했다.

'이제 두 번 다시 못 본다고 생각하니, 벌써 시간 가는 게 아깝다.'

"근데 저 여잔 너랑 무슨 사이냐? 설마... 연인?"

"흠흠. 저랑 우리 황녀님이랑 잘 어울리나요?"

"아니, 그다지."

한 치 망설임도 없이 나온 대답에 잠시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도리어 그가 큰소리를 친다.

"아니 딱 봐도 쟤는 있는 집 자식이고! 넌 내놓은 자식 같구만!"

"내놓은 자식이라.."

너무 정곡을 찌르는 말이라 할 말이 없다.

"맞아요, 생각해보면 우린 소모품 같은 존재였어요. 쓰다 버리고 다 쓰면 다시 새로운 놈으로 채우면 되니까."

"아... 아니, 난 그렇게까진 얘기 안 했..."

"죽음으로 그 쓸모를 다했으니 이제 쓰레기통에 처박힐 일만 남은 건가?"

침울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내 말에 노인은 괜스레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야야.. 너 왜 갑자기 혼자 땅 파고 그러냐."

"아니 뭐. 불쌍한 내 인생을 한마디로 딱 정리해주시니까요."

"아니, 난 그런 뜻으로 한 게 아니... 아씨. 뭐야? 뭔데? 뭐가 그렇게 불쌍해? 세상만사 새옹지마고 사람 인생도 다 도긴개긴이지."

"글쎄요. 우린 삶의 흔적은 물론이고 사랑하는 이에게 남길 이름조차 없는 그림자 무사니까요."

난 아직도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그녀를 씁쓸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 수상한 저승사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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