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무사의 귀환-2화 (2/114)

< 죽음의 그림자 >

사신기예 제1장 무흔장

혈비의 반격이 시작되고 그의 내력이 폭발하듯 증가하는 것을 보며 곧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혈비가 내력을 끌어올리는 것을 멈추고 검을 사선으로 비켜 올리며 발을 내디뎠다.

검의 궤적을 피해 몸을 움직이는 순간 혈비의 손바닥이 내 가슴 앞에 나타났다.

'헛! 내 눈이 저자의 움직임을 놓치다니..'

단번에 뇌리에 박힐 만큼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림자 무사가 되기 위해 가장 중점을 두고 수련했던 것이 어둠 속에서도 오감을 예민하게 발달시켜 상대의 움직임을 잡아내는 훈련이었는데..'

펄떡 놀란 심장과는 달리 오랜 수련의 결과를 반증하듯 나의 왼손은 본능적으로 가슴 앞으로 들어온 혈비의 장력을 쳐내고 있었다.

쿨럭.

준비가 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내기를 운용한 나는 피를 한 움큼 게워냈다.

"아니, 어찌? 무흔장을 막았단 말인가!"

혈비는 내가 무흔장에 받은 물리적 충격보다 심리적으로 더 큰 타격을 받은 것 같았다.

나는 창백해진 얼굴로 입가의 피를 닦아낸 후 혈비에게 물었다.

"하.. 이렇게 뛰어난 수법이 있는데 왜 계속 검으로만 상대한 거지?"

"무흔장은 일격필살의 수법이다. 검으로 시선을 끌고 장으로 마무리를 하는데, 실패한 것은 처음이라 솔직히 당황스럽군."

"일격필살이라.. 그 말과 잘 어울리는 수법이었다. 적만 아니었다면 박수라도 쳐주고 싶군."

"네 놈을 단번에 죽이지 못했으니 이미 일격필살의 신화는 끝나버렸다. 하지만 무흔장이 아니더라도 아직 널 죽일 수법은 많이 남아있어."

혈비의 경고에 내 마음에 처음으로 두려움이 엄습했다.

'젠장. 자칫하면 오늘이 내 제삿날이 될 수도 있겠구나.'

저놈과 나는 이미 수백 합을 나누면서 서로가 거의 같은 경지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찰나의 호흡 한번, 망설임 한번, 손끝 하나 차이만으로도 승패가 갈릴 수 있을 만큼.

나는 크게 한번 숨을 들이켜고 내쉬며 평정심과 함께 날뛰는 내력을 진정시켰다.

'후.. 내상까지 입었으니 이젠 어쩔 수 없다. 승부수를 띄워야겠구나.'

나는 비기로 아껴둔 공격 한방에 모든 것을 걸고 생사는 하늘의 뜻에 맡겨보기로 했다.

"하하 이것 참. 아무래도 오늘 내가 가진 밑천을 다 드러내야 할 거 같은데.. 혈비라고 했던가? 이게 내 마지막 공격이다. 받아라!"

사신검예 제2장 사신멸겁

사신멸겁은 워낙 패도적이고 강맹하여 실전에서 쓸 일은 거의 없었지만 생사 대적을 상대할 때 내가 가장 자신 있게 펼칠 수 있는 무공이었다.

사실상 위력만 놓고 보자면 사신검예 중 제3장 사신무형검이 으뜸이지만 내공 소모도 워낙 크고 사실멸겁에 비해 숙련도도 낮아 현재 내 몸 상태로는 그 위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었다.

내가 사신멸겁을 펼칠 자세를 잡자 혈비의 눈빛도 달라졌다.

"사신멸겁이라.. 사신검예의 정수라 할 수 있지. 나도 이번에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군."

터질 것 같은 긴장감 속에 온몸의 근육을 일깨운 나는 더 지체할 것 없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사신멸겁은 한번 초식이 시작되면 북풍한설이 몰아치듯 끊임없이 공격이 이어지는 연환 초식이 그 특징이었다.

내 몸과 검이 하나가 되어 회전하기 시작하니 폭풍우가 몰아치듯 혈비에게 검풍이 쏟아져 내렸다.

검풍이 어찌나 강한지 황녀궁의 전각 문이 찢어질 듯 덜컹거리고 전각 주위를 둘러싼 나무들까지도 부러질 것처럼 크게 휘청거렸다.

"꺅"

전각 안에서 궁녀들의 비명소리가 작게 터져 나왔으나 나는 집중력을 흩뜨리지 않기 위해 등 뒤의 상황을 애써 무시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의 공격을 방어하던 혈비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부상을 감수하고 반격을 시도했다.

사신기예 제2장 만천화우

혈비는 가슴속에서 뭔가를 꺼내 양손에 쥐더니 나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쏘아 보냈다.

만천화우는 암기술의 극의로 강호에는 사천당가의 비술로 알려져 있었으나 사신회의 암기술은 사천당가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대단했다.

'아니, 오히려 순수하게 암기술만 놓고 보자면 사신회가 사천당가보다 한 수 위다. 사천당가는 독공에 우위가 있고 암기술과 독공을 합치니 더 위협적으로 느껴질 뿐.'

혈비의 손에서 빠져나온 암기들로 내 앞에 만천화우가 펼쳐지자 파고들 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사신검예를 멈추고 피할까도 고민했지만 어차피 피해를 감수하지 않고는 완벽히 막을 방법도 공격할 방법도 없어 보였다.

'그래, 이제 이판사판이다!'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내력을 더욱 쏟아부으며 사신멸겁의 위력을 높여 혈비와의 간격을 좁혀 나갔다.

팅 팅 팅

내 검과 몸이 점점 더 빠르게 회전하며 암기와 맞부딪치자 검을 쥔 내 손바닥이 충격을 이기지 못해 갈라지며 핏물이 진득하게 배어 나왔다.

'여기서 멈추면 죽는다. 죽더라도 혼자 죽을 순 없어! 황녀님을 위해서라도 저놈은 반드시 내가 저승으로 데려간다.'

나는 비산하는 암기와 찢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도 독하게 검을 움켜잡으며 혈비를 향해 나아갔다.

강력한 의지로 만천화우를 뚫고 혈비의 지척까지 도달한 나의 형형한 눈빛을 보며 그놈은 당황스러운 낯빛을 감추지 못했다.

혈비는 암기를 포기하고 황급히 검을 뽑아 나의 사신멸겁을 막아보려 했지만 내 검은 이미 그놈의 가슴 깊숙이 파고 들어가 있었다.

자신의 몸뚱이에 꽂힌 검을 내려다보며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던 혈비는 가슴에서부터 번지는 끔찍한 통증에 신음을 내뱉었다.

"끄윽.. 살왕이.. 다시 재림했구나..."

내가 천천히 검을 회수하자 혈비의 신형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만천화우의 암기 세례를 온몸으로 받은 나 역시 무사할 순 없었다.

검을 앞세워 회전하며 중심축이 되었던 머리와 몸통은 상대적으로 양호했지만 팔다리에는 크고 작은 암기들이 박혀 출혈이 매우 심했고 전신에 있는 내력도 모두 고갈되어 서 있을 힘조차 남지 않았다.

나는 혈비의 시체 옆에 대자로 드러누워 시커먼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비록 죽을 것같이 아프지만 어쨌든 살아남았다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려 했다.

하지만.

'아... 망했네? 이 쓸데없이 치밀한 시키. 독까지 발라 놨었구나.'

몸 안에서 서서히 독기가 발작하는 걸 느끼며 나는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내기가 조금이라도 남아있었더라면 독기를 밖으로 내보내며 지원이 올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보겠건만 이미 텅텅 비어버린 단전으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 뭐 같이 죽을 각오로 덤벼들었으니 죽을 수도 있긴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그녀를 보고 싶다.'

독이 온몸의 혈관을 타고 돌면서 화끈한 열기가 올라왔으나 내 마음은 스스로도 놀라울 만큼 고요하고 평온했다.

그림자 무사가 되는 과정에서도 되고 나서도 수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겼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쳤었는데, 막상 진짜 죽음을 앞두고 나니 삶에 미련 둘 이유가 거의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 밤바람이 원래 이렇게 시원했던가?'

그림자 무사는 황손을 지키는 숱한 밤마다 끊임없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위를 경계해야만 한다.

일 년에 밤손님이 한두 번밖에 찾아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황궁의 촘촘한 호위망을 뚫고 내궁까지 찾아온 고수 앞에 그림자 무사가 무너지는 순간 황손의 안전은 끝난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풀잎이 짓밟히는 소리, 나뭇잎 흩날리는 소리 사이에서 살수들의 기척을 찾기 위해 매일 밤을 긴장으로 지새우느라 미처 느끼지 못했었던 선선한 밤바람이 피로 물든 내 머리와 옷깃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온몸의 감각이 마비되어 가듯 몽롱한 기분을 느끼며 그녀가 머무는 황녀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럼 이제 우리 황녀님은 누가 지키려나? 7호 아니면 1호? 아... 15호는 속내가 시커먼 놈이라 절대 안 되는데..'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느릿하게 끔벅거리며 황녀를 걱정하고 있는데 흐릿한 시야 사이로 하나둘씩 움직이는 인영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때,

"무... 무사님!!"

전각 문이 벌컥 열리며 황녀가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나를 향해 황급히 뛰어왔다.

'와 신기하네. 황녀님은 저렇게 정신없이 뛰어도 한 마리 나비처럼 우아하구나. 언제 저렇게 커서 숙녀가 되셨을까. 어릴 땐 좀 더 활발했던 것 같은데..'

그녀가 열세 살이 되던 해, 내가 황녀궁의 그림자 무사로 배치되어 처음 그녀를 모시게 된 날에도 저렇게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짧은 다리로 오도도 달려왔었다.

젖살이 남아 오동통한 두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활짝 웃던 그녀의 앳된 얼굴이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 위로 겹쳐 보였다.

'...잠깐만. 눈...물?'

나는 다소 비현실적인 기분으로 내 곁으로 다가온 그녀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황녀의 뒤로 줄줄이 따라붙은 궁인들이 피로 물든 앞마당과 혈비의 시체 곁에 나란히 누운 나를 발견하고는 기겁하며 그녀를 뒤로 물리려 했다.

"마마! 가까이 가시면 아니 되옵니다."

"모두 뒤로 물렀거라!"

"하오나..."

"어허! 내 말이 허투루 들리느냐?"

황녀가 처음 듣는 엄한 목소리로 호통치자 궁인들은 난처한 기색으로 서로 눈치만 살폈다.

황녀를 적극적으로 말리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는 궁인들을 향해 황녀가 다시 한번 명령했다.

"김 상궁, 발이 가장 빠른 자를 보내어 당장 어의를 모셔오게. 백 내관, 자네는 저놈의 시체부터 멀리 치우게. 나머지는 내가 다시 부를 때까지 백 보 밖으로 물러있거라. 어서!"

"...명 받사옵니다. 마마."

마지못해 명을 받든 궁인들이 분주한 걸음으로 흩어지고 멀찍이 물러선 궁인들을 제외하곤 황녀궁 앞뜰에 그녀와 나, 둘만 남게 되었을 때 그녀가 내 곁에 살며시 주저앉았다.

내 얼굴을 향해 조심스레 손을 뻗은 그녀는 섬세한 손길로 내 볼을 감쌌다.

뜨거운 내 얼굴에 차게 식은 그녀의 손이 닿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화.. 황녀님! 제 몸에 이리 손을 대시면... 쿨럭! 안 됩...니다."

나는 행여나 황녀의 옷자락에라도 독이 묻을까 싶어 무거운 팔을 들어 올려 그녀의 손을 밀어냈다.

"흐흑. 무사님. 이렇게 가시면 안 돼요. 제가 무사님께 드리려고 이름도 지어 놨는데..."

"이름...이요? 잊고 계신 줄 알았는데..."

나는 삼 개월 전 그녀의 생일날 밤을 떠올렸다.

처음 옮긴 처소에서 쉬이 잠이 안 왔던지 자시(23시)경 그녀가 가벼운 옷차림으로 궁녀 몇을 이끌고 산책을 나왔다.

나는 주변에 수상한 움직임이 없는지 꼼꼼히 살피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녀를 따랐다.

일각(15분)쯤 지났을까.

그녀가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특유의 청초한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 죽음의 그림자 > 끝

ⓒ 청운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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