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대받지 않은 손님 >
'이놈은 다르다! 오 년 전 내 복부에 검을 쑤셔 넣었던 그놈보다도 한 수 위다.'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미 엄청나게 많은 양의 암기를 퍼부었는데도 상처 하나 보이질 않는 살수를 보며 난 속으로 욕을 삼켰다.
'아 씨.. 뭐 이런 괴물 같은 놈이 다 있어?'
막대한 내공만 소모하고 누구 하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싸움이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건곤일척의 승부를 이어가던 우리 둘은 불꽃 튀는 격돌 후에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황녀궁을 등지고 선 나는 긴장감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상대의 기색을 살폈다.
'저놈도 표정이 썩은 거 보니까 생각보다 내가 만만치 않아서 당황했나 본데?'
날 잠시 노려보던 살수가 입을 열었다.
"황궁에 있는 놈이 쓰는 무공마다 죄다 살수의 무공이냐.. 네 놈도 살수였나?"
"하! 살수? 어이가 없네?"
황궁에 초대도 없이 찾아온 밤손님 주제에 살수 운운하는 놈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참내, 나보고 뭐? 살수? 이래 봬도 난 황손의 곁을 지키는 정예 중의 최정예! 그림자 무사라고!'
한편으론 황당하고 다른 한편으론 그림자 무사로서 자존심이 상한 나의 미간에 실금이 생겼다.
"각종 살예 수법이 능수능란한데 살수가 아니라고? 이상한 일이군."
내가 불쾌한 기색을 띠는데도 그놈은 여전히 미심쩍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그 정도 경지에 오르려면 꽤나 오래 수련했겠어."
"네 놈도 자객치곤 제법인데."
"허, 뭐 이런 점잖게 미친놈을 봤나! 날 상대하고 살아남은 놈도 거의 없지만, 날 상대하고도 제법이라 말한 놈은 네놈이 처음이다."
"그동안 약골들만 상대했나 봐?"
"큭큭. 내가 이런 대우를 받는 날이 올 줄이야. 재밌군."
짐짓 여유로운 척 말했지만 저놈이 내가 그동안 상대했던 자객들과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살수인 것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살수의 시답잖은 질문에 장단을 맞춰 주고 있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앞서 소모한 막대한 내공을 일부라도 보충하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혹시라도 지원병력이 올 가능성을 기대하며 시간을 끌기 위함이었다.
'내가 살수와 이렇게 요란하게 싸우고 대화를 해도 아무도 안 보이는 걸 보면 아예 황녀궁을 지키는 호위를 다 죽이거나 혈도를 짚어놓고 온 건가?'
'그러니까 저놈도 저렇게 당당하게 나한테 말을 거는 거겠지? 하.. 세상 무식하게 생긴 놈이 은근히 치밀한 구석이 있네.'
원래 어중이떠중이들은 감히 황궁에 침입할 생각도 안 하지만, 어지간한 자객들은 다 황궁 호위에게 가로막히기 때문에 내가 지키고 있는 내궁까지 도달하기도 어려웠다.
'아무렴 황궁인데 아무나 들락거리는 곳은 아니지.'
황녀궁 가까이 접근해서 그림자 무사인 나를 만나는 이들은 대개 무림에서 이름 꽤나 날리는 유명한 고수들이었고, 실제로 그러한 침입은 일 년에 한두 번쯤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다.
문제는 약 삼 개월 전 황녀가 스물세 살 생일 맞아 이곳으로 처소를 옮기면서부터 무슨 월례 행사마냥 수시로 밤손님이 찾아오게 된 것이었다.
'얼마 전부터 느낌이 좀 싸늘하더라니..'
그렇다. 내가 호위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황제의 금지옥엽 막내딸이다.
황태자를 비롯해 3명의 오라비를 두고 태어난 그녀는 절세미인이라 불릴 만큼 고운 용모로도 유명했지만, 어려서부터 황제의 끔찍한 사랑을 독차지한 것으로 더 유명했다.
황제가 황녀궁에 출입하는 인원을 철저히 제한한 탓에 그녀의 실물을 직접 본 사람은 거의 없었고, 급기야 십 수년간 베일에 휩싸인 그녀가 실제로는 추녀가 아니냐는 헛소문까지 돌기 시작했다.
'황녀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데 추녀라니..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서...'
소문은 돌고 돌아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이에 격분한 황제는 스물세 살 황녀의 생일에 맞춰 황궁 외곽에 있는 엄청난 규모의 정원에 둘러싸인 전각을 하사하면서, 황궁에서 황녀의 생일 축하연을 성대하게 열어 신하들에게 그녀의 미모를 과시했다.
특히나 황제의 과보호로 황궁에 거의 갇혀 지내다시피 한 황녀의 유일한 취미는 원예였는데, 그런 딸을 위해 황제가 무려 1년에 걸친 시간과 돈을 쏟아부어 만든 게 이 정원이었기에 그 규모는 일반인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이게 어딜 봐서 정원이냐고! 그냥 숲이지 숲! 하여간 진짜 더럽게 넓어가지고...'
그림자 무사로서 황녀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하는 만큼 나는 그녀의 생일에 대한 황제의 처사가 그 무엇 하나 마뜩치 않았다.
'아니, 황제 폐하께서 황녀님을 아끼는 마음까진 백번 이해하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세상 이목을 다 주목시켜 버리면 어쩌자는 거냐고요!'
신하들의 입에서부터 시작하여 전국으로 퍼진 황녀의 미모에 대한 찬사와 황제가 하사한 궁궐의 엄청난 규모에 대한 소문 탓에 미처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겼으니, 황녀에 대한 세간의 관심과 함께 자객들의 이목까지 끌게 되면서 그녀가 황태자보다 더 위험에 노출되어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황녀의 스물세 번째 생일 이후 그녀를 납치하기 위한 밤손님은 급격히 늘어났고, 그에 반해 황녀궁의 규모는 지나치게 커진 탓에 호위병력을 3배로 늘렸음에도 상대적으로 경비가 허술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 내가 황녀님 거처 옮기면서 호위도 최소한 5배로 늘려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결국은 이렇게 구멍이 나는구나.'
심지어 면적도 너무 넓어서 호위망을 촘촘히 구성하기에도 한계가 있고, 무슨 문제가 발생해도 다른 궁에서 이를 쉬이 알아차리거나 지원병력이 오기도 힘든 여건이 된 것이다.
'하긴 뭐.. 저놈 정도 실력이면 어차피 일반 호위들이야 거의 있으나마나한 존재긴 하지만..'
나는 큰 부상 없이 이길 자신도 없고 절대 져서도 안 되는 상대를 바라보며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삼켰다.
'후우.. 젠장. 나까지 무너지면 진짜 끝이다. 일단 어떻게든 반 시진을 더 버텨보고, 정 안되면 그땐..'
조금만 더 버티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다른 그림자 무사가 상황에 따라 직접 오거나 지원병력을 보낼 것이다.
그러니 남은 반 시진 동안 눈앞의 이놈을 쓰러뜨리지는 못하더라도 최대한 방어에 치중하며 시간을 끌거나 그조차 여의치 않으면 최후의 수단으로 동귀어진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이십팔 년 인생에서 맞닥뜨린 최강의 적 앞에서 속으론 죽음을 불사하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면서도 겉으론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허세를 이어 나갔다.
"자! 우리 서로 간은 볼 만큼 본 것 같고.. 이제 슬슬 실전으로 들어가 볼까?"
난 앞서 놈을 상대하면서 다 망가져 버린 낫을 휙 던져 버리고 예리하게 벼린 검을 뽑아 들며 사신검예를 가볍게 펼쳐 보였다.
"사.. 사신검예? 살왕님의 무공을 네놈이 어찌?"
나의 무공을 단박에 알아본 살수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대장이 사신검예는 백 년 전 천하제일 살수였던 살왕의 무공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오래된 무공을 바로 알아본 걸 보면 아무래도 사신검예와 깊은 인연이 있는 놈이겠지?'
나의 머릿속에 살수의 정체가 대강 그려졌다.
"이야! 대단한걸? 이 무공을 알아볼 줄이야."
감탄하듯 툭 던진 내 말에 살수는 잠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화가 난 듯 씩씩대며 다시 물었다.
"이익! 누가 할 소릴! 똑바로 대답하지 못하겠느냐! 네 놈이 사신회의 초대 회주셨던 살왕님의 사신검예를 어떻게 얻은 거지?"
"글쎄다? 나도 직접 얻은 건 아니라서. 그보다 오래전 사라진 살왕의 무공을 알아본 걸 보니.. 네 놈은 사신회에서 왔겠군?"
슬쩍 떠보는 말에도 살수는 크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이놈. 살수라는 놈이 표정관리 하나 못해.'
"어차피 넌 여기서 죽을 놈이니 내 정체를 말해주마. 난 당대 사신회의 회주 혈비다!"
정체를 들켜서 잠깐 주춤했던 놈이 돌연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자기소개를 한다.
'진짜 웃기는 놈일세. 딱히 이름까지 물어볼 생각은 없었는데..'
무공실력은 뛰어난데 반해 허술한 구석이 많은 걸 보니 진짜 무공실력 하나만으로 사신회 회주자리에 오른 놈인 것 같았다.
이번엔 내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말이야, 보통 회주 정도 되면 다리 뻗고 누워서 밑에 놈들 부리지 않냐? 대체 여긴 뭐하러 온 거냐?"
내 질문에 혈비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네 놈은 모르는 것이냐? 황녀가 구음절맥이라는 걸."
본디 구음절맥은 음기가 너무 강해 대부분 십대를 무사히 넘기지 못하고 절명한다.
하지만 내가 모시고 있는 황녀는 어려서부터 황제가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는 영약이란 영약은 다 구해다 먹인 덕에 음양의 균형을 얼추 맞출 수 있었다.
"알고는 있지. 한데 열 살 이전에 영약으로 고쳤다고 들었는데?"
나의 대답에 혈비가 또 한 번 한심한 놈 보듯이 날 쳐다보았다.
'아오. 이놈의 시키. 진짜 마음 같아서는 콱 죽여버리고 싶은데.'
"쯧쯧. 무림인이 구음절맥의 여인을 취하면 내공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특히 나같이 음기의 무공을 익힌 자에게는 천고에 다시 없을 최고의 영약임을 정녕 모르느냐?"
'뭐.. 뭐? 최고의 영약? 감히 우리 황녀님을 영약 취급하다니!'
내가 어처구니가 없어 잠시 침묵하는 사이에도 그놈은 주둥이를 계속 나불거렸다.
"게다가 황녀가 그렇게 끝내주는 미인이라면서? 흐흐.. 막대한 내공을 얻으면서 미녀까지 취하는 일이니 힘 있는 사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
뚝.
내 인내심이 끊어지는 소리다.
'가암히! 누가 누굴 취해? 우리 황녀님을 겁탈할 생각을 품다니! 넌 오늘 뒤졌다.'
"네 이 노옴!!"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와 함께 투기가 들끓어 올랐다.
이미 막대한 내공을 소모한 후였는데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내공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사신검예 제1장 혈화난무
사신검예는 총 3장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중 혈화난무는 살왕을 천하제일 살수로 불리게 만들어 준 사신검예 첫 번째 장에 있는 무공이다.
나 또한 수많은 적들을 상대할 때 유용하게 써먹었던 검술이 바로 혈화난무다.
쾌검술의 극의가 담겨 있어 적들은 자신의 몸에 난 혈선을 보고서야 베였다는 것을 인지할 만큼 빠르고 아름다운 검술이었다.
나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혈비의 선혈이 뿌려지며 붉은 꽃잎이 휘날리듯 그의 주변이 붉게 물들어 갔다.
내 공격을 완벽히 막지 못한 그놈의 옷이 너덜너덜해지고 자잘한 상흔이 생겼지만, 그 또한 보통 고수는 아니었기에 내가 기대한 만큼 깊은 상처를 입힐 순 없었다.
"살왕님의 무공을 내가 직접 상대하게 되다니, 이것 참 영광이군."
온몸이 핏빛으로 물든 상태로도 진심으로 기쁜 듯이 웃는 혈비의 모습은 괴기스러울 지경인지라 나는 오싹한 기분을 느끼며 긴장감을 더욱 높였다.
"하지만 살왕님은 우리 사신회의 회주셨다! 그가 남긴 것이 사신검예만 있는 건 아니지."
혈비의 말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차올랐다.
< 초대받지 않은 손님 > 끝
ⓒ 청운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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