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내게만 집중해라! 대적자여!”
김진석의 시선이 아주 잠깐이나마 지상을 향하자 아크가 소리쳤다. 어느새 아크의 모습은 또다시 변해있었다.
칠흑의 용의 모습. 하지만 서양의 용의 모습이 아니었다. 동양의 용의 모습.
하늘을 유유자적 유영하는 모습은 압도적인 서양의 용의 모습과 달리 동양의 용의 모습은 신비로웠다.
애초에 날개 없이 날아다니는 아크랑 잘 어울렸다.
햇빛이 비춰도 햇빛이 빨려 들어갈 만큼 칠흑의 몸과 그와 대비되는 새하얀 수염. 입에 여의주만 물고 있지 않지 신화 속에서나 볼 법한 아름다운 용이었다.
게다가 저 모습이 되는 순간 주변 마기의 공기부터가 달라졌다.
마기가 숨만 쉬어도 콧속으로 들어가 폐로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 같았다. 마기의 농도가 더욱 진해졌다. 하지만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느낌. 자칫하면 악마로 변한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위험했다. 마기가 이렇게 부드러운 느낌이 들면 안 됐다. 그냥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과 다름없었다. 오히려 그것보다 더 부드러운, 산 정상의 공기를 마시면 이런 느낌이 들까.
김진석에게도 저항감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느껴졌다. 마기가 들어가는 콧속부터 폐까지. 마기에 잠식되고 있었다. 그의 능력인 재생으로 잠식을 늦출 수 있었지만 말 그대로 늦추는 것이다.
“과연 그대는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는가?!”
아크가 김진석을 죽이기 위해 최후로 선택한 방식이다.
김진석을 죽일 방법이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김진석이 아크를 보았을 때 전보다 3배는 더 강해졌다고 생각한 것처럼, 아크 또한 김진석의 힘이 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죽질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마기에 잠식되게 해 자신을 공격하지 못하게 하는 것. 어차피 자신의 대적자가 마기에 잠식돼 죽을 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적응하고 살아남겠지.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대적자. 그를 악마로 만드는 것. 악마는 자신에게 대적하지 못한다.
“새로운 방법이군.”
과연 그렇게 되니 김진석도 방법이 없었다.
아크를 죽일 방법은 없다시피 했다. 첫 싸움 때 김진석은 궁극기의 새로운 조합을 통해 아크의 심장을 꿰뚫었다. 하지만 보란 듯이 이렇게 눈앞에 살아있었다. 더 강하게.
마기가 있는 한 아크를 죽일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김진석은 끊임없이 아크를 자르고 부수고 공격했다. 그가 재생에 필요한 마기가 없어질 때까지. 그러나 그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여덟의 대악마가 싸우고 있다. 그건 여덟의 대악마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위험한데?”
아크가 방어에만 치중한다면 김진석은 시간 안에 그를 죽일 수 있을지 몰랐다. 자신이 언제 변할지도 몰랐다. 시간제한이 있었지만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김진석은 모글레이를 집어넣고 동시에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거 아나? 넌 한번 죽었었어.”
“…무슨?”
인벤토리에서 꺼낸 무언가를 보고. 어디선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녀석의 검. 이놈에게 말이지.”
[광폭한자의 대검]
광전사. 아니 키잔의 전용 무기. 광폭한자의 대검. 녀석이 살아 움직였을 때부터 평생을 함께한 무기. 그게 지금 김진석의 손에 들려있었다.
기다란 검신과 칼자루 중앙에는 마치 살아있는 듯한 눈동자가 박혀 있었다. 광폭한자의 대검. 마검이라 불린 대검다운 생김새였다.
키잔이 김진석에게 베여 최후를 맞이하기 전. 그는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광폭한자의 대검을 김진석의 손에 직접 들려주었다.
김진석은 그 무기를 기꺼이 받았지만 문제는 바깥까지 들고 갈 수 있냐는 거였다. 하지만 그건 인벤토리에 넣어두니 문제가 없었다.
아무리 모글레이가 전설에서 나온 무기라고 한들, 레어마켓에서 최고로 좋은 아이템이라고 한들. 광폭한자의 대검과 비교하긴 어려웠다.
아무런 스킬도 없이 단단하기만 한 모글레이와 달리 광폭한자의 대검은 달랐다. 광전사의 전용 무기답게 가장 중요한 스킬을 성능을 올려주었다.
“광기.”
김진석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일렁거렸다.
폭발적인 속도로 아크를 향해 달려가는 김진석의 모습은 아크와 똑같이 보였다. 그러나 동양의 용의 신비로움은 아크에게도 있었다.
아크는 단지 모습만 따라 하는 게 아니었다. 변하는 대상의 지식을 완벽히 알고 있다면 그 대상을 완벽히 복사할뿐더러 그 이상의 힘을 다룰 수 있었다.
동양의 용은 날씨를 다룬다고 알려져 있었다.
지금 아크도 그와 비슷했다. 그러나 조금 달랐다. 아크는 날씨를 다루는 게 아닌 날씨를 직접 만들어내고 있었다.
폭풍. 구름. 비. 주변 공기까지 전부 마기로 되어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전부 김진석을 노리고 있었다. 자연이 그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김진석은 그 모든 것을 뚫고 나갔다. 김진석이 광폭한자의 대검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바람이 갈라지고 비가 멎었다. 고작 자연으로는 김진석을 막을 순 없었다.
“마지막 싸움을 즐겨 보자고!”
그 말에 아크조차도 질린 모습이었다.
그러나 마기로 된 비는 개의치 않고 아크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형태로 바뀌었다. 구름에서 쏟아져 내리는 비는 조그마한 벌레들로 변했다.
날파리와 같은 벌레 떼가 김진석을 향해 윙윙거리며 날아왔다.
김진석은 벌레 떼가 자신에게 날아오고 있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생김새만 보더라도 징그러운 벌레들이 적어도 수십만에 가까운 숫자가 날아오고 있었지만 김진석은 그저 광폭한자의 대검을 하늘 높이 들어 내려칠 뿐이었다.
가벼운 참격이었지만 그 대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마기로 된 벌레떼보다도 검은 기운이 벌레들에게 뻗어 나갔다. 검은 기운에 닿은 벌레들은 날갯짓을 멈추고 지상으로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광폭한 검은 기운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벌레들은 하나하나 전부 의지를 가진 놈들이었다. 검은 기운을 피하기 위해 흩어진 벌레들이 다시 모여 김진석을 향해 날아갔다.
하나하나 전부 상대할 수 없었던 김진석은 뒤에 벌레들을 무시하고 아크를 향해 하늘을 박차려는 순간.
“동양 용이 브레스도 뿜었나?”
아크의 브레스가 김진석을 덮쳤다.
살짝 방심하고 있었던 김진석은 브레스를 정면으로 받아냈다. 그런데 브레스에서 나온 김진석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김진석도 의문을 가지려는 그때.
“음?”
코에서 피가 나왔다.
피에 손을 가져다 댄 김진석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검은 피였던 것이다. 그리고 김진석은 자신이 브레스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크는 김진석을 공격한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짙은 농도의 마기를 김진석에게 뿜어냈을 뿐.
순간적으로 짙은 농도의 마기가 몸속에 들어오자 몸이 버티지 못하고 죽은 피를 내뱉은 것이다. 그 증거로 자신도 모르게 브레스를 손으로 막으려 들은 그 손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저릿했다. 재생으로 피부색이 돌아오지도 않고 있었다.
하지만 김진석은 웃고 있었다.
“이제야 제대로 된 싸움 같지 않나?!”
그사이에 벌레들이 김진석의 몸에 달라붙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의 목표는 하나. 아크였다. 같잖은 벌레들이 몸을 파고들려 해도 김진석의 몸은 그리 쉽게 뚫리지 않았다.
벌레들이 달라붙은 몸이 검게 변하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아크만 죽이면 됐다.
그와 동시에 폭발적인 속도를 내며 하늘을 박차며 달려갔다. 그 속도는 아크마저도 잠깐 놓칠 정도였다. 지금 김진석이 순간적으로 낼 수 있는 속도는 가히 음속에 다다랐다.
인간의 몸으로 할 수 없는 일. 아무리 초인과도 같은 김진석이라도 그 속도에 따른 반동이 몸에 가해졌다. 피부가 짓눌려졌고 근육이 찢어지며 몸의 뼈가 어긋났다.
아크도. 마기도 반응하지 못했다.
“뭣…?!”
김진석은 어느새 아크의 눈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키잔의 무기. 광폭한자의 대검을 든 채.
“갈증.”
광전사의 궁극기. 다음 스킬의 공격력을 300% 증가시키는 간단한 궁극기였다. 원래 궁극기는 하나만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 와서 그런 패널티는 전부 없어졌다.
이제는 이 세상에서. 김진석만이 사용할 수 있는 궁극기였다. 그리고 그건 하나만이 아니었다.
“광전사의 비기.”
김진석은 검게 물든 양손으로 광폭한자의 대검을 하늘 높이 들었다.
광폭한자의 대검엔 광오한 기운이 담기고 있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벨 수 있을 거라는 기운. 그 오만하고도 검은 기운은 김진석에게 너무나도 어울렸다.
그리고 광폭한자의 대검이 내려친 순간.
세상이 검게 물들었다.
* * *
지상에서 싸우고 있는 인간들은 물론이고 몬스터들까지 싸움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엔 검신으로 보이는 광폭한 기운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이 무슨…….”
아서왕은 광오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오만했다. 지금 자신은 보구를 꺼내 들고 진명을 밝히며 싸우면서 눈앞의 모든 적을 박살 내며 나아갔어도. 저런 오만한 생각은 해보지도, 느껴보지도 못했다.
검을 든 기사라면 모두 저 기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순 없을 것이다. 정말 세상 모든 것을 벨 기운이 저 안에 담겨 있다는 것을 직접 피부로 느끼고 있었으니.
저 검이 내려친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지금 내려쳐 지고 있었으니.
하늘이 어두워졌다.
“벗어나!”
아직 마기에 완벽히 잠식되지 않은 몬스터들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 기운에 닿는 순간 자신이 자신이 아니게 된다는 것을.
몬스터들의 움직임과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인간들도 곧바로 전장에서 벗어났다.
지상에 있는 인간들과 몬스터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건 대악마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늘을 전부 뒤덮은 건…….”
“마기다. 하지만 분명 검은 기운은 마기가 아니었어.”
그들조차도 하늘의 상황을 볼 수 없었다. 세상이 검게 물들었다.
그런데 그때.
“어…? 어디 가시는 겁니까?!”
군인들과 같이 최후방에서 플레이어들을 지원하던 한 여성 플레이어가 갑자기 어디론가 달려 나갔다.
* * *
“…쿨럭! 과연. 나의 대적자군.”
인간으로 변한 아크는 피를 토하고 있었다.
언뜻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가슴의 상처는 뼈가 보일 정도로 깊게 파여 있었다. 갈증과 광전사의 비기로 인해 몸이 절반으로 갈라졌다가 간신히 살아남은 아크였다.
하지만 김진석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손이 제대로 안 움직이는데.”
궁극기를 연속으로 사용한 직후. 마기에 완벽히 잠식돼 완전히 검게 물든 그의 양손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핏줄이 검게 물들어 올라와 있었고 아무 힘도 주지 않고 있었는데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그저 정신력으로 광폭한자의 대검을 붙잡고 있었다.
사실상 끝이었다. 팔조차 더는 올라가지 않는다. 그러나 아크는 살아남았다.
죽기 직전의 상처를 입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얼마든지 재기할 수 있었다.
“대적자여. 내 승리군.”
발을 움직일 순 있었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김진석과 달리 어느새 가슴의 상처는 대부분 봉합되어있었다. 아크는 김진석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무방비하게.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