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아크는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힌 유일한 자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대악마들은 각자 인간의 모습을 한 대적자가 있었다. 아크는 궁금했다. 과연 자신에게도 그런 대적자가 있을지.
그러나 그 대적자의 존재는 예상치 못하게 나타났다.
평범히 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인간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 인간은 악마의 세계에 직접 찾아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크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자가 자신의 대적자라고.
처음엔 악마가 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대적자는 오로지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서. 인간의 세계에서 악마의 세계로 넘어온 것이다.
그러나 그 인간은 당돌하게도 자신을 죽일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물었다. 인간계에 있는 악마가 전부 전멸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대답은 복수였다. 당연했다. 악마의 방주라고 불린 자가 악마가 전부 죽었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그렇게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아서왕과 세라스는 회의실에서 갑자기 뛰쳐나갔다. 뒤에서 그녀들을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갔더니 이미 선객이 있었다.
“아버지께서 도움이 필요하단 게 저기서 나올 녀석 때문인가?”
“…왜 쉬라고 했는지 알겠네.”
로스트 월드의 영웅들. 카이와 마엔이었다.
그들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라스와 아서왕도 그들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바라봤다. 그곳엔 지금껏 보지 못했던 거대한 크기의 게이트가 열려 있었다.
카이와 마엔. 그리고 아서왕과 세라스는 느꼈다.
게이트 안에. 괴물이 있다. 그 괴물이 지금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대악마들조차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의 끔찍한 마기가. 저 안에서 느껴지고 있다.
“…앙그라마이뉴의 현신인가.”
아서왕은 악신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본 적 없는 악신이었지만 만약 그 악신이 현실에 존재한다면 저 모습이겠지.
이내 게이트를 찢고 칠흑의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라스는 저것의 정체를 딱 한 번 본적이 있었다. 김진석이 사라졌을 그때. 대악마들을 이끌고 자신들의 세계로 돌아간 괴물.
그때는 큰 상처를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대악마도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의 마기가 느껴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완벽한 상태인 괴물이다.
마기를 다루는 세라스임에도 저 괴물이 나온 지금 마기가 그녀의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본인의 의지를 갖고 이 지구란 세계에 있는 모든 마기가 알아서 저 괴물에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용의 포효는 카이와 마엔조차도 피부가 저릿하게 만들었다.
천둥이 울리는 듯한 용의 포효 소리는 마치 전 세계를 울리는 것 같았고 회의실 뿐만 아니라 주변 모든 플레이어가 그 소리를 듣고 용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리는 용의 포효만이 아니었다.
크하하!
보는 것만으로도 절망이 느껴질 칠흑의 드래곤을 보고도 웃음을 짓는 미친 자가 있었다. 그것도 전장이 아닌 이 회의실이 있는 건물까지 퍼질 정도로 크게 웃는 미친 자가.
하지만 카이와 마엔은 저런 짓을 일삼는 자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죽은 키잔의 의지를 아버지가 이으셨나 보군.”
“후… 그러게 말이야.”
마엔의 목소리엔 물기가 있었다.
그들의 형제. 키잔은 언제나 싸울 때 입가에 미소가 가득했다. 매사가 밝은 게 아닌 그저 싸움이 즐거워서 웃는 것이다.
그런 키잔을 마엔과 카이는 기억하고 있었다. 저 광소는 키잔의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계획을 들었다. 가상 현실에서 키잔을 완벽히 다시 죽이는 것.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카이와 마엔은 알고 있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한 자신들을 살려준 아버지다. 그런데 이미 죽은 자식을 다시 살려서 죽인다라. 도대체 아버지가 무슨 감정을 가지고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것을 보면 계획은 성공했겠지. 더는 광기에 잠식되지 않는다는 소리다.
하지만 저 광소는…….
“아버지는 키잔을 기억할 것이다. 영원히.”
“우리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살기 위해서 이미 죽은 자식을 살려서 죽이는 선택을 했다. 그건 변함이 없었지만 지금 보니 자신을 위해서 한 것만이 아닌 것 같았다.
저 게이트 안에서 나온 건 그들만이 상대할 수 있는 괴물이 아니었다.
카이는 고요한 카인의 활을.
마엔은 단검 죽음의 속삭임을 들었다.
“가자. 아버지까지 잃을 순 없다.”
그들의 아버지가 칠흑의 드래곤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본 카이와 마엔은 날아가듯 그에게 달려갔다.
“아버지를 위해.”
“그리고 키잔을 위해.”
설령 상대가 그 어떤 괴물이라도.
자식들은 아버지를 위해 달려갈 것이다.
아버지가 자식을 지켜준 것처럼.
* * *
“…보고만 있을 건가?”
아서왕은 달려가는 두 영웅. 아니 한 아버지의 자식들에 뒤를 바라보다가 옆에 회색빛 머리의 여성에게 말했다.
펜드래건은 알고 있었다. 비록 악마의 힘을 다루지만 가장 강한 여성이 바로 옆의 여성이라는 것을.
회색빛 머리의 여성. 세라스는 펜드래건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저건 우리가 낄 자리가 아니다. 우린 우리만의 할 일이 있지.”
그렇게 말하며 세라스는 전장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곳엔 고통스럽다는 듯이 땅을 뒹굴고 있는 몬스터들이 있었다.
“저것이 등장한 순간부터. 마기가 폭발하듯 증폭됐다. 그리고 그 마기는 몬스터에 영향을 끼치지.”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아서왕은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새빨갛게 변한 몬스터의 눈이 하나같이 전부 인간을 향해 있었으니깐.
“우린 우리의 전쟁을 시작해야지.”
세라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마기에 잠식된 몬스터들이 인간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 * *
김진석은 가상 현실 안에서 아크를 비교적 쉽게 죽였다.
물론 키잔의 도움이 있었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었지만 그럴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그 안에는 마기 따위는 일절 없었으니. 마기 그 자체나 다름없는 아크는 마기가 없는 곳에서 약해지는 건 당연했다.
그건 지구도 마찬가지였다. 마찬가지였었다.
김진석은 혹시 모를 몬스터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 비네와 바포메트에게 여러 곳곳 실험체들을 땅에 심어두었다.
덕분에 중국에서 몬스터들이 쏟아졌을 때 비네가 곧바로 대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때문인지 지구엔 마기가 가득해졌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세라스의 눈에는 마기가 공기 중에도 떠다니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즉 지금 지구에 등장한 아크는 본래의 힘을 전부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구의 모든 마기가 김진석을 노리고 있었다. 김진석은 마치 지구 전체가 자신을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하늘이든 땅이든 심지어 공기도 그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김진석은 웃고 있었다.
분명 처음 상대할 때보다 아크는 더욱 강해졌다. 오히려 악마들의 세계에 있었을 때보다 더 강해진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곳에는 여덟의 대악마가 서로 싸우고 있었다.
아무리 김진석의 대악마가 더 강하다고 한들 그게 쉽게 결판을 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게다가 김진석이 아크와 싸우는 데 마기를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아크가 더 강해지기에 김진석의 대악마의 힘이 제한되었다.
그런데도 김진석은 웃고 있었다.
“너를 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이고 노력을 했는지 몰라.”
사실이었다. 어차피 대악마들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싸워야 했다. 그렇기에 비네에게 자신의 몸을 개조해달라고 부탁했었다. 지금은 전부 없애버렸지만.
“그건 대적자인 너를 상대하려는 나도 마찬가지다.”
아크가 말했다.
전투는 지금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처음엔 서로를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 아니 죽이려고 했을 것이다. 아니었다면 김진석이 궁극기를, 아크가 브레스를 사용했을 리가 없었으니깐.
그렇게 공격을 한 번씩 주고받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은 서로에게 할 말이 많았다.
“한낱 인간이 내 몸에 상처를 입히다니. 대악마들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아니 평생에 처음으로 상처를 입었다. 당신에게 입은 상처를 치료하며 당신을 계속해서 생각했지.”
아크는 김진석의 앞으로 내려와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평범한 회사원과 같은 남성. 말투부터가 바뀌었다.
“도대체 고작 그런 인간의 몸으로 그러한 힘을 가졌는지. 계속해서 생각했지요. 그리고 결론을 냈습니다.”
김진석은 리딜과 모글레이를 든 손을 내리며 물었다.
“그래서. 결론은?”
“별거 없습니다. 우리가 인간을 오해하고 있었다는 거죠. 대악마들의 대적자들도 인간이란 것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거였습니다. 그리고 저도 성장해야 했습니다.”
아크의 말은 이러했다.
애초에 악마들은 인간들을 벌레처럼 생각했다. 인간들이 벌레를 보는 것처럼. 그들도 인간을 벌레처럼 본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인간 또한 악마와 비견될만한 힘과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김진석의 곁으로 두 인영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 대악마의 대적자들처럼 말이죠.”
“아버지!”
카이와 마엔이었다.
상처를 치료하긴 했지만 큰 상처만 치료한 듯 보였다. 지금 여기까지 달려온 것만으로도 급히 치료한 상처가 터져 피가 나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김진석은 그들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카이와 마엔의 얼굴엔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자기들 상처는 제대로 돌보지도 않고 달려온 것이겠지. 그게 기껍긴 했지만 한편으론 안타까웠다. 저 감정들 또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그거 아나? 일부로 이 세계에 마기를 흩뿌려놨다는 것을.”
김진석은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생각했다. 그건 로스트 월드에 들어가기 전부터 원래의 성격이 그러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 상황을 대비했다. 그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전부 생각해놨다.
“…무슨 말씀입니까?”
아크도 이 세계에 들어오자마자 원래부터 악마가 있었던 세계인지 착각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 마기의 농도가 생각보다 진했다. 그걸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약해진 너를 죽여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어. 찝찝하기만 하겠지. 그렇지 않나?”
김진석은 알고 있었다. 인생은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쉬운 길만 생각하고 그대로만 풀리면 누구든지 쉬운 길로 가는 것을 택하겠지. 그렇기에 김진석은 언제나 일부로.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고 그 길을 걸었다.
그 길을 대비했으니깐.
“난 언제나 어려운 길을 걸었어.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남았지. 로스트 월드에선 그게 언제나 들어맞았고 그렇게 난 성장했다. 하지만 딱 한 번 실패했다.”
바로 아크를 만났을 때. 처음으로 대적할 수 없는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끝까지 노력해도 안 된다는 것이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아차렸다.
그러나 김진석은 포기하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을 몰아치는 어려운 길은 언제나 자신에게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네가 처음이다. 그리고 마지막이 되어 내 성공에 발판이 되어라.”
김진석은 늘어뜨렸던 리딜과 모글레이를 들어 올렸다.
카이와 마엔은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랐다. 하지만 눈앞의 평범한 인간이 그 괴물이 변한 모습이란 건 알고 있었다.
둘은 서로를 향해 자신의 푸념을 쏟아내고 있었다.
마치 친한 친구처럼.
서로가 서로만을 생각했기에. 일어날 수 있는 공감대였다. 그리고 둘의 목표는 뚜렷했다.
“나를 위해 죽어라!”
“나를 위해 죽어라! 대적자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