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세라스는 이 상황을 어떻게 타파해야 할지 지구의 인간들과 고민하고 있었다. 다행히 김진석이 제때 도착했기에 비교적 여유롭게 고민할 시간도 있었다.
그런데 김진석의 몸이 이상했지만 그래도 김진석은 김진석이었다. 조금 걱정이 됐지만 전장에 그가 왔다는 것은 준비가 다 됐다는 뜻이겠지.
지금은 그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응?”
그때. 두 인영이 이곳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들은 김진석이 없던 방금까지 전장에 대 악마들이 못 오게 붙잡아준 역할을 한 이들. 로스트 월드의 영웅들이었다.
“어… 어?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그들을 모르는 지구의 인간들이 방에 들어오려는 걸 막으려고 할 때.
“들여보내세요.”
세라스가 말했다.
“세라스 씨? 누군데 그들을…….”
회의실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이들은 깜짝 놀랐다.
지구의 전력. 아서왕과 리아즈 칸. 제이다와 루크 등. 수많은 최정상에 있는 이들이 모여 회의하고 있는 곳에 낯선 사람을 들이다니.
평소의 세라스를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회의실에 문을 열고 들어온 둘은 만신창이가 된 남녀였다. 전장에 맞지 않게 붉은 원피스를 입은 여성과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
“안녕?”
“반갑군.”
분명 만신창이가 된 이들이었다. 그러나 아서왕은 느낄 수 있었다.
“영웅들이로군.”
“…영웅?”
만신창이가 됐음에도 느껴지는 기도는 차원이 달랐다.
지금 저 둘이 마음만 먹는다면 이 회의실 안에 있는 자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것이다. 그 정도의 힘을 가진 자들이다.
“아버지가 쉬라고 해서 왔어.”
“잘 부탁하지.”
“아버지?”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한 노라였다.
그녀와 다이아 또한 회의실에 참가했지만 말 뿐인 이곳에서 그녀는 지루할 뿐이었다. 그나마 그것도 저들 덕분에 있을 수 있는 일이라 다행이었지만.
그런데 저들이 아버지라 부른 자라.
이상했다.
“당신들 설마… 걔 보고 말하는 거야?”
지금 전장엔 김진석이 와 있었다. 당장 달려가 지금까지 어디 있었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저 싸움에 잘못 꼈다간 죽음이 눈앞으로 다가올 테니 참을 뿐이었다.
즉 전장에 온 건 김진석 하나뿐이다.
노라의 말에 마엔은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에 회의실 안에 있는 자들 전부가 흠칫 놀랐다. 분명 그녀의 외모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미소 속에 숨겨지지 않은 농밀한 살기가 회의실을 휘감았다.
노라조차 그 살기에 흠칫 놀랐지만 그녀의 말에 알 수 있었다.
이들이 말한 아버지의 정체는 바로 김진석이다.
“마엔.”
“…쯧.”
카이의 말에 마엔은 살기를 거둬들였다.
“아버지의 지인이다.”
“아니었으면 진작 죽였어.”
비록 마엔을 김진석이 애정 갖고 키우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그녀는 애정을 더욱 갈구했다. 집착이라 해도 무방한 그녀의 감정은 김진석이 아버지란 걸 깨닫고 난 직후부터 그러했다.
아무리 김진석이라도 그들을 알아차리기 쉽지 않았었다. 김진석이 그들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 마엔이 그를 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 김진석이 온몸에 상처를 입고도 그녀들을 살려두었을 때 그 감정은 절정을 찍었다.
카이는 그런 마엔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그대들을 지키라고 보냈는데 괜히 자극하지 말지.”
마엔이 뒤에서 툴툴거리는 와중에 카이의 말은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물론 노라가 별말 안 했지만 마엔의 히스테릭한 성격은 회의실 안 전부가 알 수 있었다.
“포션 같은 거 있나?”
카이의 말에 조용히 다이아가 포션을 건네주었다.
둘이 끝없이 포션을 마시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이아가 그들에게 괜히 포션을 준 게 아니었다. 노라는 물론이고 다이아 또한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 김진석 씨보고 아버지라 하신 건가요?”
김진석이란 말에 둘은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그것만으로 둘의 아버지가 김진석이란 건 확실해졌다. 하지만 이상했다.
“제가 알기론 김진석 씨는 결혼도 하지 않았는 데다가… 기껏해야 당신들하고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데…….”
다이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게 사실이 아닐 수도 있었으니깐. 정말 그의 자식이라면…
“엘프인가. 로스트 월드에서 왔나?”
그는 다이아의 귀를 보고 엘프란 걸 알 정도의 지식이 있는 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애초에 로스트 월드의 영웅이다.
다이아도 그를 먼발치에서나 본 적이 있을 뿐. 그 이상은 그녀도 잘 모른다.
그런데 김진석은 이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란 남자다. 그런데 로스트 월드의 영웅이 그의 자식이다?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다이아의 말에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카이 씨와 마엔 씨라고 하셨습니까?”
어떻게 보면 이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플레이어들의 아이템을 책임지는 자.
“…그렇다만.”
그리고 카이와 마엔조차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자. 그들의 아버지가 지구에서 유일하게 친분을 맺고 사적으로 대화했던 자.
그리고 로스트 월드의 전 메인 디렉터. 현 레어마켓의 CEO. 한빈혁이었다.
카이와 마엔은 지구에서 김진석보다 오래 있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지구에서 김진석의 행보를 전부 지켜보았다. 아버지가 유일하게 예를 갖추며 대한 자다. 아무리 그들이라도 쉽게 대할 순 없었다.
한빈혁 또한 김진석에게 들었다.
“김진석 씨. 그는 로스트 월드를 사랑한 인물이었습니다. 자기가 키웠던 캐릭터의 이름 하나하나 즐겁게 말씀하셨죠. 카이와 마엔. 당신들… 그의 캐릭터였군요.”
그의 말에 회의실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렇군… 그래서 아버지라고…….”
“키웠던 캐릭터도 나온다고? 이 무슨…….”
“평소라면 믿을 수 없겠지만… 눈앞에 증거가 있으니.”
“애초에 몬스터도 나오는 세상인데 못 믿을 게 뭐 있나.”
게임 캐릭터. 회의실 안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는 한낱 게임 캐릭터라고 치부할 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게임 속 세상에서 살아가게 한 그들의 분신과도 같은 게 바로 게임 캐릭터다.
그런 분신이 현실에도 존재한다. 그것만큼 든든한 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질문한 노라와 다이아를 비롯한 로스트 월드에서 온 이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어… 뭔 소리람?”
물론 아서왕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 세계에서 오랫동안 지내 모든 지식을 습득한 가웨인이 그녀의 곁에서 귓속말로 알려주고 있었다.
“…문제 있나?”
“아뇨. 그의 캐릭터… 아니 자식들이라면 믿을 만하지요. 우리는 강한 힘을 가진 그대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입니다.”
“…….”
“우리 말고 아버지나 지지해. 이 모든 건 아버지가 만드신 그림이니깐.”
“하하… 알겠습니다.”
카이와 마엔은 자신들이 할 말을 끝내자마자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폭풍처럼 지나간 둘이었다. 심지어 게임 캐릭터였다. 다들 멍하니 있을 때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환기하는 인물이 있었다.
“슬슬 우리도 준비해야 합니다. 길드장 님에게 모든 걸 맡겨둘 순 없습니다.”
바로 이방인 길드의 부 길드장 제이다. 그녀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지만 지구에서 김진석의 기행을 가장 많이 겪은 자가 그녀였다. 이젠 그러려니 하는 단계까지 왔고 가장 먼저 평정심을 찾았다.
“맞다.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아서왕은 애초에 관심이 없었으니 제이다의 말에 동의했다.
* * *
“…전과 다른데. 무슨 짓을 한 거지?”
지구의 세피드는 느꼈다. 눈앞의 자신은 전과 달랐다. 전에는 자신도 모르는 새로운 능력들을 사용했지만 분명 자신이 더 강하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넌 나와 다르게 변한 게 없군.”
김진석의 세피드는 전과 달랐다. 명백히 강해졌다는 게 눈에 보였다. 힘은 똑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명백히 자신이 밀리고 있었다. 뭔가 달랐다.
그건 지구의 세피드만 느끼고 있는 게 아니었다.
다른 지구의 대 악마들도 본인이 밀리는 기현상을 느끼고 있었다.
“왜지? 왜 밀리는 거지?”
하지만 김진석의 대악마들은 어느 정도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
“우린 너희와 달라.”
“약하다는 걸 인정했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 같나.”
여덟의 대악마가 전부 모였다. 자의로 모인 것이 아니다. 김진석의 대악마들이 그들을 몰아쳐서 한곳으로 모은 것이다.
비네와 세피드. 바포메트의 말에 지구의 대악마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수 없었다. 정답을 몰랐으니깐.
“우리가 죽이려던 인간들. 그들에게도 배울 게 있을지 몰랐지.”
정답은 넬이 말해주었다.
지구의 대악마들은 평생 모를 것이다. 그들은 패배를 몰랐다. 한낱 인간으로 치부한 채 죽이고 몰아냈다. 기껏해야 영웅이라 불린 이들이 있었지만 그들과 싸워도 진 적은 없었다. 졌다면 진작에 죽었겠지.
하지만 김진석의 대악마들은 달랐다.
그들은 수백 수천 번을 죽었다. 그리고 되살아났다. 마지막에는 김진석과 연속으로 싸워 전부 졌다. 그들이 무시하던 한낱 인간에게 말이다.
자존심은 박살이 나고 무너진 지 오래였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어. 너희들과 다르게 말이야.”
* * *
김진석은 자신의 대악마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저들도 자신과 같이 성장하는 이들이다. 게임 속 NPC가 아니었다. 김진석은 그런 그들을 존중했다.
세피드는 자신보다 약한 자들을 상대하며 힘을 다루는 방법을 터득했고.
비네는 처음엔 김진석의 부탁이었지만 점점 사기와 마기를 다루는 게 익숙해졌으며.
바포메트는 더욱 많은 몬스터를 보고 느꼈다.
마지막으로 넬은 김진석의 옆에서 수많은 경험을 했고 그의 정기까지 취득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이다.
어떻게 보면 지구의 대악마들의 열화판이 그들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본인을 뛰어넘었다. 오로지 노력으로.
“멋지군.”
김진석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여유롭게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하늘에서. 또 다른 게이트가 열리고 있었다.
그 게이트는 김진석은 비교적 최근에 본 적이 있었다. 하늘 전체를 뒤덮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한 칠흑의 게이트. 그 안에서 피부를 찌를 듯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드디어… 왔군.”
게이트의 안에서. 거대한 손이 나왔다.
비늘에 뒤덮인 날카로운 발톱이 존재한 손. 그건 게이트를 찢으며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김진석의 대악마들은 흠칫 놀랐다.
농밀한 마기가 저 손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그들조차도 숨을 쉬기 어려운 수준의 농도. 그들은 느끼고 있었다. 마기 그 자체가 분노하고 있었다.
이내 게이트 안에서 드러낸 건 용.
빛조차 빨려 들어갈 칠흑의 용이 날개를 펼치며 게이트에서 빠져나왔다.
크와아앙!
분노한 용의 포효. 주변의 공기가 변하고 있었다. 김진석의 피부가 마기에 물들어 찐득하게 느껴졌다.
악마의 방주. 아크가 지구에 현신했다.
비늘과 대조되게 피처럼 붉은 두 눈은 정확히 김진석을 향했다.
“찾았다. 나의 유일한 대적자여!”
하지만 김진석은 그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김진석은 오른손엔 모글레이를, 왼손에는 리딜을 들었다.
“지긋지긋한 인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마지막이다.”
크하하!
키잔과의 동기화는 끝났지만. 김진석은 그를 기억하듯 광소를 터트리며 아크를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