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최초 플레이어-193화 (193/201)

193화

“…넌 누구지?”

노라는 검은 연기와 같은 나풀거리는 로브를 입은 남자에게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얼굴을 가리진 않았기에 그자가 김진석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저렇게 잘생긴 남자가 김진석일 리가 없었으니깐. 하지만 이상했다. 저 검은 화살과 구름처럼 일렁거리는 활까지. 전부 김진석이 사용하던 무기였다.

“쉿. 우린 지금 기분이 좋지 않아.”

어느새 여성의 목소리가 노라의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 흠칫 놀란 노라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앞으로 구르며 뒤를 쳐다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네가 아버지의 이름을 함부로 불렀기 때문이지.”

또다시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 분명 자리를 옮겼는데도 불구하고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노라는 난생처음으로 무력감을 느꼈다. 대 악마를 상대할 때도 느껴본 적 없는 것일 진데.

소름 끼치는 여성의 목소리. 그리고 알 수 없는 아버지란 존재.

“너흰… 누구지?”

어느새 노라의 곁에 다이아와 세라스가 급히 달려와 있었지만 그들도 둘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 그저 대 악마가 등장한 것에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노라에게 붙은 것이었고 그녀들 또한 기이한 둘의 존재에 흠칫 놀랐다.

그러나 다이아와 세라스는 둘의 모습이 뭔가 익숙했다. 비교적 젊은 노라와 달리 세라스는 과거 악마의 침공 때부터 싸워왔고 다이아 또한 엘프로서 젊긴 해도 인간과 달리 오래 살아온 자였다.

그때.

“또다시 우릴 방해하려는 건가?!”

대 악마. 세피드가 어깨에 박힌 화살을 뽑아내며 날아왔다. 언제나 여유롭게 인간들을 학살하던 악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극도로 분노한 모습이었다.

“…아버지의 세상이다. 너희 악마들이 날뛰는 모습은 두고 볼 수 없다.”

또 들려오는 아버지란 말. 노라는 아버지란 존재가 도대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대 악마의 말에 검은 연기와도 같은 로브를 입은 미남자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카이!”

그리고 그 말에 다이아와 세라스는 미남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영웅!”

“영웅이다.”

로스트 월드에서조차 미지의 존재로 남았던 이들. 그들이 갑자기 지구에서 등장했다. 그렇다면 옆에 있는 피처럼 붉은 원피스를 입은 여성은…

“많이 약해졌네? 네 여자친구는 뭐한데? 화살 하나 안 막아주고.”

“…입 닥쳐. 마엔.”

세피드의 곁으로 날아온 넬이 말했다.

마엔. 영웅 중 유일하게 직업이 로스트 월드에 보존되어있는 영웅이었다. 노라가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직업 또한 도적. 노라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마엔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가족을 죽인 패륜적인 놈들이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세피드의 말은 키잔을 말한 것이었다. 대 악마들도 그들의 일을 알고 있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자신들의 유일한 대적자의 일은 전부 알고 있었다.

카이와 마엔은 그런 도발과도 같은 말은 자주 들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않았어야 했다. 그러나 최근에 있었던 일 때문에 그 말은 그들의 역린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을 낳아주고 키워주신 아버지를 그들의 손으로 죽이려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그들을 살려주었다. 온몸에 상처를 입고 팔마저 잘려도, 아버지는 자식들을 살려두려 했다.

카이와 마엔은 그 이유는 모른다. 자신을 죽이려 한 순간부터 자식과 아버지란 관계는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아버지는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죽기 일보 직전까지. 아버지는 아버지였다.

“…그림자 화살.”

“급습!”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었다. 둘은 곧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 * *

아크의 목이 키잔의 손에 날아갔다.

김진석이 걱정하던 괴물이라고 하기엔 약한 모습이었다.

그나마 그것도 넬이 마기가 형상화되어 공격하는 몬스터들을 전부 죽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었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몰랐다.

“내가 괜한 말을 했나?”

넬이 김진석을 눈을 가늘게 뜨며 바라보는 모습에 키잔은 낄낄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은 도저히 광기에 잠식돼 죽은 자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어이가 없어. 우릴 대적하던 악마가 아버지의 부인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이런데 밖의 녀석들은 어떠하겠어?”

그 강대한 아버지의 쩔쩔매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신기했다. 평생 아버지란 존재를 모르고 살던 키잔이었다. 즐겁고 재밌었지만 그 모습을 언제까지고 볼 수만은 없었다.

“이만 끝내자고 아버지. 참고로 악마는 어머니로 인정 못 해.”

“…그래.”

김진석은 옆에서 계속 추궁하는 넬을 떨쳐내며 말했다.

“미안하군. 아버지. 아무리 가상이라고 자식을 죽이게 하다니. 못된 자식이야. 안 그래?”

“…….”

키잔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카이와 마엔을 죽이지 않았다. 물론 아버지를 죽이는 자식이라는 패륜적인 일을 하게 만든 것도 자신 때문이었다.

키잔은 자신이 죽기 직전까지 광기에 빠져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한 채 죽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달랐다. 정확힌 모르겠지만 이곳은 가상의 세계다. 그 자신 또한 가상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것 때문인지 오히려 광기에 잠식되기 직전의 상황으로 돌아와 버틸 만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젠 한계였다.

아버지와 싸우고 그 아버지의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킬 거대한 드래곤과도 싸웠다. 지금까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봐도 됐다.

허나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버지와 같이 싸운다는 건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군. 밖의 녀석들이 부러워지고 있어.”

김진석은 그의 말에 대꾸할 수 없었다. 그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모순적이었으니깐.

자신이 직접 애정을 가지고 키운 아이들을 죽인다는 건 끔찍한 일이었으니. 그러나 그가 살려면 그 아이를 죽여야 한다. 그것도 이미 죽은 아이를 다시 한번 살린 다음 죽여야 하니 그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 마지막을 그딴 표정으로 보낼 생각은 아니겠지?”

“…아버지에게 못하는 말이 없군.”

“나보다 젊은 남자가 아버지는 개뿔…….”

그렇게 말하는 둘의 입가엔 각기 다른 미소가 지어졌다.

* * *

“오셨습니까.”

“…그래.”

김진석은 가상 현실 기기에서 일어났다.

“어? 아니… 어떻게 일어나셨지?”

엔젤은 깜짝 놀랐다. 사실 깨어나든 못 깨어나든 이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에 조금 조치를 해 놓았다. 언제든지 강제로 깨울 수 있고 자신의 허락 없이는 깨어나지 못하게.

그런데 이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났다.

“얼마나 왔지?”

김진석은 세피드에게 물었다.

단탈리온이 몬스터를 보내지 않았을 리 없다. 세피드의 몸에 있는 형형색색의 물감 같은 게 묻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저건 온갖 괴물의 피다.

“별거 아니었습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건 아니었다. 김진석 자신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차리자마자 곧바로 날아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방금까지만 해도 몬스터를 죽이고 왔다.

“…눈이 돌아오셨군요.”

김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키잔이 없어진 이상 더는 힘을 갈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키잔이 죽었다. 그 증거로 언제나 시야 한구석에 있었던 글자가 없어졌다.

키잔과의 동기화율.

“게이트는 닫혔나?”

“예. 당신이 깨어났을 때 바로 사라졌습니다.”

방해가 실패로 돌아가자 단탈리온이 곧바로 게이트를 닫은 것이다. 김진석은 가상 현실 기기 안에서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끝을 볼 차례였다.

“당신…….”

넬은 김진석과 같이 돌아왔다.

그녀는 키잔과 김진석의 대화를 듣고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지구에 대 악마들을 남겨두고도 인간들을 지키란 말을 하진 않았죠. 처음 한 번 빼고는 말이죠. 물론 당신이 제일 중요하긴 하지만…….”

넬은 그 누구보다 김진석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김진석은 인간들을 지키려고 하는 정의의 인물이 아니었다. 그들을 살려주는 것도, 강하게 키워주는 것도 전부 자신을 위해서다. 그런데 그런 인간들을 내버려 둔다고?

뭔가 믿고 있는 것이 있었다.

“설마…?”

“돌아가자고.”

김진석은 급히 말을 돌렸다. 어차피 돌아가면 알려질 테니깐.

* * *

지구의 전쟁은 인간에게 너무나도 불리했다.

온갖 게임 속 세계에서 나온 이들과 지구의 플레이어들이 몬스터와 악마들과 싸우고 있었지만 몬스터들은 끝도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특히 대 악마. 세피드와 넬은 카이와 마엔이 상대하고 있었다.

카이와 세피드의 싸움은 특히 주변에서 관여할 수 없었다. 둘의 싸움은 게임이나 영화에서 나오는 땅이 뒤집히고 하늘이 갈라지는 그런 싸움이 아니었다.

조용했다. 하지만 위협적이었다.

화살과 창의 공방은 기이했다.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당연히 붙었을 때 활이 불리할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진실은 달랐다.

창과 활의 파괴력이 달랐다. 비록 화살은 검과 달리 쏘아내는 게 전부였지만 그것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코앞에서 쏘아낸 사격은 맞기만 한다면 창보다 훨씬 강력한 일격이 가능했다.

허나 그건 창도 마찬가지. 활과 비교해서 파괴력이 부족할 뿐이지 연속으로 공격하는데 능하고 때리고 찌르는 등 여러 경우의 수를 가진 창의 파괴력은 냉병기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칭할 만했다.

그러나 초근접전으로 가면 둘이 할 수 있는 건 비슷했다.

당연히 마엔보다는 부족했지만 카이 또한 단검까지 사용했다.

둘 사이에 엄청난 공방이 이어나갔지만 둘의 몸에 상처 하나 남지 않고 있었다. 세피드가 카이와의 거리를 내주지 않고 있었고 카이는 오히려 그 모습에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거리를 준 순간 세피드의 창이 찔러 들어오고 거기서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는 순간 카이의 화살이 날아든다. 완전히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세피드의 창대로 카이의 단검을 막아내고 있었다.

호각. 그 말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마엔과 넬의 싸움은 비교적 마엔이 밀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원망스러운데.”

“뭔 아까부터 아버지 타령이야!”

김진석이 비록 애정을 그렇게까지 가지고 키워준 캐릭터가 아니라서 그런지 카이와 키잔과 달리 아이템 장비부터가 차이났다.

하지만 마엔 또한 여유로움이 있었다.

그녀는 이제 게임 캐릭터가 아니었다. 하나의 인간이었다. 같은 아버지의 자식인데 키잔과 카이에 비하면 약한 그녀였으니 그녀는 그녀만의 장점을 키웠다.

바로 여성이라는 점.

여성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상대의 공격을 피하면서 동시에 급소를 노려 한방을 노리는. 암살자와 같은 움직임을 가졌다.

특히 대 악마 중 넬은 전투 경험이 부족한 비교적 젊은 악마다. 마엔이 버티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아니었다.

“네 얼굴. 나랑 똑같이 생겨서 마음에 안 들어. 죽이려고 하면 마치 나를 죽이는 것 같잖아.”

“…비네!”

세라스와 비네의 군대가 전장 한가운데에서 서로 맞붙고 있었다. 하지만 세라스의 스켈레톤 군대는 비네의 스켈레톤과 악마를 비교하긴 부족했다.

“키잔을 죽인 순간부터 그대들의 패배가 결정되어 있다네. 그가 설령 인간을 멸망시키더라도 그대들은 그를 죽이면 안 됐어.”

그리고 바포메트. 그는 로스트 월드의 몬스터를 지배해 마구잡이로 움직이던 고위의 레벨 몬스터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아서왕의 원탁의 기사단과 이방인 길드가 분전하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특히 인간의 군대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플레이어 이현이 노력하고 있었지만 한계에 부딪혔다.

“…인간의 종말인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