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위치를 사수해! 죽더라도 이탈하지마!”
저지선이 밀렸다.
탱크와 헬기가 분전하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화력이 부족했다. 로스트 월드의 몬스터들은 악명높았다.
용인족들의 몬스터들과 달리 협력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문제는 각 개체의 힘이었다.
이곳에서도 로스트 월드를 했지만 다행히 그곳에 끌려 들어가지 않았던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그들이 몬스터들의 약점과 능력을 알려주고 있어서 잘 막아내고 있었지만 문제는 나중에 게이트에서 떨어지는 몬스터들이었다.
마족들은 인간의 화력에 놀라서일까. 함부로 공격하지 않고 뒤에서 관망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족들도 몬스터의 공격을 받으니 어쩔 수 없었다.
문제는 몬스터다. 심심치 않게 보이는 레벨 90이 넘어가는 몬스터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저쪽을 향해 총구도 돌리지 마!”
다행히 레벨이 90이 넘어가는 괴물 같은 몬스터들은 다른 몬스터들과 달리 맹목적으로 인간을 향해 공격하는 것이 아닌 그저 바뀐 환경에 신기한 듯 어슬렁 돌아다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몬스터였기에 바로 화력을 쏟아부었지만 놈들의 화만 돋울 뿐이었다. 놈들 때문에 저지선이 밀린 것이었다.
탱크의 화력과 헬기. 이현의 전함까지 화력을 쏟아부어도 레벨이 90이 넘어가는 괴물들에겐 통하지 않았고 달려드는 놈들을 피해 저지선을 물린 것이다. 다행히 놈들은 탱크 몇 대를 희생해서 화를 삭힐 수 있었지만 문제는 저지선이 밀린 것으로 전장이 더욱 넓어졌다는 것이다.
저지선을 다시 확보할 때도 플레이어들이 앞으로 나서서 몸으로 몬스터들을 막아내서 간신히 다시 확보한 것이고 플레이어의 희생이 불가피했다.
그런데 전장이 더 넓어졌다. 그 말은 플레이어들이 해야 할 일이 더욱 많아졌다는 것이다.
군대의 화력은 집중되면 집중될수록 효과가 높아지지만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효과가 떨어진다. 아무리 지금 탄약 보급이 반영구적으로 가능하다고 한들 상황이 너무나도 급박했다.
몬스터들이 끊임없이 몰아쳐 언제 뚫릴지 모를 저지선을 계속해서 유지해야 하는데 전장이 넓어지는 순간 그 위험부담이 배로 커지는 거다.
그때였다.
“이 세계의 인간들이여! 돕겠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 전장의 소음, 폭탄이 터지고 공이를 때려 총이 쏘아지는 소리와 온갖 비명과 고함이 난무하는데도 그 용맹하면서도 강인한 여성의 목소리는 전장에 울려 퍼졌다.
가웨인과 퍼시벌. 그리고 갤러해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여성의 목소리. 그들이 지구가 아닌 다른, 그들의 세계에 있을 때 자주 들었던 목소리다.
“…설마?!”
그와 동시에 몬스터들의 뒤로 푸른색 게이트가 열렸다.
“원탁의 기사단이여! 출정이다! 다른 세계의 인간들을 구하라!”
노후한 할아버지의 목소리. 크게 소리쳤지만 힘이 빠지는 듯한 특유의 목소리.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멀린이다.
그가 전장에 등장했다.
“그대들의 뒤에! 나! 아서왕이 함께할지니!”
아서왕과 그녀의 기사, 원탁의 기사단과 함께.
* * *
“너… 광기에 빠진 거 맞나?”
“아버지도 안 빠졌는데 뭐 어때?”
키잔과 김진석은 합이 생각보다 잘 맞았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특히 키잔은 광기에 빠졌다고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그의 정신은 온전해 보였다. 미친놈처럼 싸우긴 했지만 그건 김진석도 마찬가지.
악마의 방주. 마기의 종주인 아크는 대 악마인 넬의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 마기로된 공격은 전부 면역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넬은 아크의 마기로 인해 자연스럽게 태어나는 마기의 몬스터들을 상대했다.
여전히 그녀는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해 시무룩했지만 사실 그녀가 없었다면 크게 곤란했을 거다. 키잔과 김진석. 둘이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노렸다는 듯이 둘의 힘이 빠지고 난 다음 아크가 게이트를 찢고 나타났다. 만발의 준비를 마친 김진석조차 아크를 상대하는 것도 힘들어했는데 지금이라고 상대가 쉬울 리 없었다.
하지만 둘의 공격은 아크의 비늘에 상처를 내기 충분했다. 그걸 방해하는 것이 마기로 인해 태어난 몬스터들이었는데 넬이 막아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키잔과 김진석은 오로지 아크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
둘의 모습은 마치 좀비 같았다. 온몸이 아크의 브레스로 인해 점칠 되어 너덜거려도 둘의 목표는 오로지 아크였다. 다른 건 안중에도 없었다. 몸이 부서져도 피부가 녹아내려도 상관없었다.
그 모습에 오히려 아크가 질릴 정도였다.
“도대체 왜 안 죽는 것이냐?!”
수백 번은 더 죽고도 남을 만한 상처를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도저히 죽지를 않는다. 지옥에서 어떻게든 기어 올라와 계속해서 살아남고 있었다.
김진석이 아크와 처음 싸웠을 때 몇 날 며칠을 싸웠었다. 그때 놈을 어떻게든 죽이기 위해 알아보려고 노력했다. 그러지 않으면 본인이 죽었을 테니깐.
김진석은 그때 알아차렸다. 생각보다 놈의 공격력이 그리 강하지 않다는 것을. 세피드가 레이드 보스로 나왔을 때 말이 많았다.
워낙 즉사기가 많았기에 삐끗하면 죽는 것이었고 그것 때문에 플레이어들은 불만이 많았다. 아마 그것 때문인지 그 이후에 나올 최종 보스인 악마의 방주 아크에게 즉사기를 다수 없앤 것 같았다.
플레이어들은 여러 패턴을 가진 보스를 좋아했다. 그래야 그 패턴을 파훼하는 재미도 더 많이 생기니깐. 그 덕분에 세피드 때와 달리 단기 결전이 아닌 장기 결전으로 승부를 볼 수 있었다.
오히려 공격력만 두고 보자면 세피드가 훨씬 뛰어났다. 그러나 아크는 온갖 힘을 다 다뤘다. 마기의 종주. 마기 그 자체인 아크는 악마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마법을 전부 사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마기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스스로 생각해 주인의 적을 괴롭히고 공격한다. 주인이 신경 쓰지 못한 공격조차 알아서 막아내기까지 한다.
사각지대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키잔과 김진석에겐 의미가 없었다.
공격받는 걸 신경 쓰지 않는다. 살을 주고 뼈를 택하는 게 아닌 뼈를 주고 살을 택한다. 어차피 그들의 뼈는 재생하니깐.
하지만 아크의 재생 능력도 만만치 않았다.
김진석은 로스트 월드의 총괄 디렉터. 한빈혁과 친분을 맺으며 자주 대화를 나눌 때 그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크는 무슨 생각으로 만든 것이냐고. 놈의 절망적인 힘과 무력 앞에 저항하던 김진석의 살짝 울분 섞인 말이었다.
한빈혁 디렉터는 아직 이름조차 밝히지 않았던 최종 보스의 이름을 어떻게 김진석이 알고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알 것 같았으니깐.
그때 한빈혁 디렉터는 아크의 설정에 대해 말해주었다.
아크는 악마들의 세계에 너무나 많은 악마가 태어나고 살아가서 같은 악마들조차 견디기 힘들 정도의 짙은 마기의 농도를 가지게 되었다. 그들이 로스트 월드를 침공하려 한 이유도 그때문.
그때 새로운 악마가 태어났으니 그게 바로 아크였다.
아크가 태어났을 때 마기의 농도가 줄어들었다. 정확히는 마기가 알아서 아크에게 스며든 것이다. 마기 그 자체인 아크. 틀린 말은 아니었다.
김진석이 아크와 처음 싸웠을 때는 절망 그 자체였다. 어떻게든 그 단단한 비늘을 뚫고 부수고 자르고 때려도 놈은 재생했다. 그러나 그때는 김진석이 직접 악마의 세계로 들어갔을 때였다. 즉 마기가 풍부한 세계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곳은 아니다.
“써는 맛이 나는군! 그러지 않나! 아버지?!”
키잔 만큼은 아니었지만 김진석은 어느 정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크는 김진석이랑 처음 싸웠을 때랑은 비교하기가 어려울 수준으로 약했다. 놈의 공격이나 단단한 비늘은 달라진 게 없었지만 그만한 힘을 계속해서 유지하지 못했다.
이후에는 그 거대한 몸조차 유지하지 못한 채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인간의 몸으로 돌아갔다. 평범한 정장을 입은 직장인 남성과 같은 모습. 하지만 키잔과 김진석으로 인해 이곳저곳이 전부 찢어져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안타깝군. 내 기억의 아크는 이리 약하지 않았는데.”
“…쿨럭. 그것참 아쉽군요.”
피를 토하며 말하는 아크였다. 인간으로 돌아와서 그런지 본래의 정중하던 그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물론 약하다 약하다 말하고 있었지만 키잔과 김진석의 상태도 전혀 멀쩡하지 않았다.
손이 기괴하게 꺾여 모글레이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는 김진석과 본래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온몸이 피로 점칠 되어있는 키잔이었다.
김진석은 뼈가 어긋난 손을 강제로 맞추었다. 키잔은 그런 김진석을 희한한 눈으로 바라봤다.
키잔은 아크의 힘을 온몸으로 느꼈다. 어쩌면 아버지와의 싸움을 끝마치지도 못한 채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 정도로 아크의 힘은 강대했다. 그나마 자신이 버틸 수 있는 것도 아버지와 자신의 공격이 통했기에 상처를 재생할 수 있었다. 만약 혼자였다면 진작에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니었다. 사실 아버지를 상대할 때도 아크를 상대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도저히 죽지를 않았다. 자신의 최강의 스킬인 광전사의 비기를 사용해도 같은 스킬로 맞받아칠 뿐이었다.
자신이 아버지보다 나은 건 오로지 무기. 그 하나뿐이었다. 심지어 그 무기조차도 아버지가 들려준 것이다. 그래서 물었다.
“당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긴 해요?”
키잔도 카이와 마엔의 협공에 죽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살아남았다. 심지어 그의 옆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여성 악마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 오로지 그 혼자서.
“많지. 최근에도 죽을 뻔했는데.”
어긋난 손을 다시 맞춘 김진석은 키잔을 바라봤다. 키잔은 김진석과 그의 옆에 있는, 대 악마 넬을 바라보며 하나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언제까지 숨기고 계실 겁니까. 괜히 그러다 알려지면 배신감이 들 텐데.”
넬은 키잔의 말을 알 수 없었지만 김진석은 혀를 차며 말했다.
“쯧. 네가 생각할 문제는 아니야.”
“그렇죠. 아버지가 생각할 문제도 아니고. 아버지의 악마들이 생각할 문제겠죠.”
키잔의 말에 넬은 더욱 알 수 없었다. 키잔은 김진석의 기억에서 파생된 존재다. 그녀가 모르는 사실도 키잔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넬이 김진석에 대해 모르는 건 없다시피 했다. 항상 그의 곁에 있었으며 생활을 언제나 같이했으니깐.
그러나 최근에 딱 한 번. 김진석이 그녀와 대 악마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적이 있었다. 어딨는지 파악조차 되지 않았다. 그를 찾았을 때는 빈사 상태에 빠져 죽기 직전이었다. 거기서 있었던 일은 김진석의 입에서밖에 듣지 못했다. 숨길 것은 그때 뿐이다.
“당신… 뭘 숨기고 있죠?”
* * *
아서왕의 참전으로 인간과 몬스터의 전쟁은 인간이 한 발자국 앞서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최강의 기사단인 원탁의 기사단과 함께 전장에 등장해 몬스터들을 쓸어버렸다. 레벨 낮은 몬스터들은 기사단에게 다가가지조차 못했다.
그 사이에 레벨이 높은 몬스터들은 이방인 길드와 최강의 플레이어들이 뭉쳐 상대하며 저지선을 다시 좁혀나갔다. 그러나 마족들이 그걸 두고만 보고 있지 않았다.
성주격 마족들이 본격적으로 전장에 나서 그들의 군세와 함께 인간들의 기사단을 상대했다. 그러나 아서왕의 원탁의 기사단은 일반 인간들하고 달랐다.
그들 하나하나가 전부 영웅이다. 다른 몬스터들처럼 쓸어버리지는 못할지언정 절대 밀리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아서왕의 특수 스킬. 전장의 깃발을 꽂아 전장의 모든 인간에게 지치지 않는 힘을 불어 넣어주었다.
그러나 하늘의 게이트는 닫히지 않았다.
“…씨발! 대 악마다!”
노라는 하늘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곧바로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그곳에는 갑자기 대 악마가 나타나 있었다.
세피드와 넬. 그들은 고고히 하늘에서 인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스트 월드에서 온 이들은 절망을 느꼈다. 그리고 죄책감을 느꼈다. 본인들이 대 악마를 이 세계로 끌고 온 것이 아닌가 싶어서.
그런데 그때.
“…큭!”
세피드의 입에서 신음이 나왔다.
어느새 그의 어깨에 화살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노라와 다이아. 세라스는 그 화살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김진석 개새끼야! 이제 오…냐?”
노라는 반가운 마음에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화살이 날아간 방향을 바라봤지만.
그곳엔 검은 연기와도 같은 로브를 뒤집어쓴 미남자만이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