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김진석의 머릿속에서 엔젤의 목소리가 울렸다.
“동기화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엔젤이 직접 녹음한 것으로서 뇌와 가상 현실 기기를 동기화할 때 나오는 목소리로 그저 기다리면 될 것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의 공간. 이라고 생각했다. 게임 속에서 원래 그리하였으니. 눈이 안 보이는 김진석은 그리 생각할 뿐이었다.
처음으로 느끼는 공허함이었다. 주변의 아무도 없는 이 느낌. 원래 항상 혼자였지만 넬이 있던 이후로 언제나 함께였었다. 그녀가 없다고 외로움을 느끼는 건 아니었지만 이리 조용한 건 오랜만이었다. 시각이 사라져 청각이 예민해져서 그런 걸까.
“심심하군.”
“제가 없어서요?”
그때 넬이 가상 현실로 들어왔다.
가상 현실도 결국 환자의 생각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기에 넬이 들어올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었고 다행히 그 생각은 맞아 들었다.
시무룩해졌던 그녀는 어느새 본래의 성격을 되찾았다. 변덕이 심한 그녀였으니 김진석은 그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내 칠흑의 공간이 뒤틀리며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뭐야. 웬 폐허가?”
폐허. 그 말에 김진석은 어느 한 곳이 생각났다.
“…준비해.”
“네…?”
“바로 온다.”
준비할 시간도 없었다. 김진석의 감각이 속삭이고 있었다. 하늘에서 온다.
김진석은 본능적으로 인벤토리에서 모글레이를 꺼내 검면을 하늘로 향해 방어 태세를 갖췄다. 그와 동시에.
콰아앙!
“큭!”
폭탄이 터지는 듯한 소리. 김진석의 입에서 신음이 절로 나왔다.
“당신이군! 우리의 아버지가!”
중후하지만 쾌활한 목소리. 마치 일부로 기분을 끌어올려서 말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김진석에겐 익숙하고도 자주 듣던 목소리였다.
“…키잔.”
“키잔!”
그리고 그건 넬에게 트라우마와도 같은 목소리였다.
시험의 탑을 가장 많이 그리고 자주 오르던 캐릭터가 바로 키잔이다. 그의 불타오르는 무기를 얻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그의 직업. 광전사답게 상체는 일절 입지 않았으며 하체도 다 찢어진 듯한 반바지 하나를 걸치고 있었다. 온몸에 기괴한 문양이 그려져 있으며 그 문양이 붉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수많은 악마를 죽이고 얻어낸 광전사 전용 무기. 광폭한자의 대검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불타오르고 있긴 했지만 저건 진짜 불이 아니었다. 광전사의 분노가 형상화돼 저렇게 불타오르고 있던 것이다.
고작 한 번의 공격을 막았을 뿐인데 김진석의 손이 얼얼했다. 모든 로스트 월드의 직업 중 공격력만 두고 봤을 때 가장 강한 직업이 바로 광전사였다.
“밖에서 녀석들과 싸웠나 보지? 아니면 실망인데 말이지.”
키잔은 김진석을 공격함과 동시에 반동으로 뒤로 덤블링 하듯 한 바퀴 돌아 착지하며 말했다. 놈의 입에는 여유로움의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가 한 녀석들은 바로 카이와 마엔을 말한 것이고 실망은 그의 상처를 보고 말한 것이다.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지?”
“전부. 내가 광기에 빠지고 녀석들이 나를 죽이는 그 순간까지.”
키잔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김진석은 고작 자신의 기억으로 재현한 것인데 어떻게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지 이해할 순 없었지만 미래 기술이었으니깐 그러려니 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아버지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지.”
김진석의 목적까지 알고 있었다.
광기. 그 스킬의 존재로 인해 김진석은 키잔에게 잠식당하고 있었다.
[키잔과의 동기화율 98%]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동기화율은 자연적으로 올라갔다. 그렇기에 김진석은 온몸에 실험한 흔적을 전부 없애고 나서야 간신히 멈췄다.
98%. 삐끗하면 키잔에게 잠식당할 수준이었다.
“넬. 뒤로 빠져있어.”
“즐겁겠군!”
김진석은 전과 다른 강력한 힘을 가진 넬인데도 트라우마란 무시할 수 없었다. 그것 때문에 치료까지 하는 게 바로 이 세계였으니. 그리고 김진석은 넬에게 같이 키잔과 함께 싸울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게임 속 캐릭터라고 한들 자신이 직접 만든 아이고 애정 가지고 키운 아이다. 남에게 맡길 생각 따위는 없었다.
김진석은 두건을 천천히 벗었다. 키잔과의 동기화율이 있는 이상 김진석은 언제나 싸움을 대 악마들에게 맡겼다.
혹시 싸우면 조금이라도 동기화율이 오를까 봐. 그러나 그건 광기에 잠식돼 죽은 키잔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건을 벗고 흉터가 진 징그러운 눈이 보인 김진석은 갑자기 검은 피를 내뱉었다.
“크하하!”
그걸 본 키잔은 광소를 내뱉으면서 달려들었다. 동시에 온몸에 붉은 기운이 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의 원인. 스킬 광기였다.
하지만 김진석도 이젠 자제할 필요 따위는 없었다. 광기에 잠식돼 죽은 키잔은 없었다. 눈앞의 살아있는 키잔이 있었기에.
김진석의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완전히 멈추진 않았지만 1분에 10회도 뛰지 않을 정도로 일반 사람이라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정도였다.
그러나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김진석은 비네가 심장에 걸어두었던 마법을 강제로 풀어버렸다. 반동으로 검은 피를 내뱉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광기.”
시야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김진석의 시야가 차근차근 돌아오고 있었다. 김진석의 온몸에 키잔과 같은 붉은색 오오라가 돌고 있었다.
“한번 해보자고… 자식아.”
“그래야 내 아버지지!”
* * *
“하… 내가 뭐 하고 있는 거람.”
넬은 자괴감에 빠졌다.
김진석을 도와주기 위해 이곳까지 들어온 거다. 다른 대 악마들도 넬을 믿기에 그녀를 김진석의 곁으로 보내준 것이고. 그러나 키잔이 나온다는 말은 없었다.
김진석은 일부로 대 악마들에게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대 악마들이 걱정할 것이 분명했으니. 그녀들은 알고 있었다. 김진석의 분신 중에서 가장 강한 것이 바로 키잔이다.
가장 애정을 가지고 키운 캐릭터는 카이였지만 캐릭 성능의 차이로 인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캐릭터의 컨셉 조차도 김진석과 잘 맞았다.
광전사에게 방어구란 개념은 없었다. 오로지 몸의 문신으로 인한 신체 능력을 강화하는 게 바로 광전사의 방어구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체력이 깎여도 상대를 공격하면 그만큼 체력을 회복했다.
지금 저 모습을 보라.
김진석과 키잔의 싸움은 격렬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김진석 또한 키잔과 같이 마땅한 방어구를 착용하지 않고 있었으니 서로의 공격 하나하나가 전부 치명타로 다가왔다.
하지만 김진석은 그의 특성과 스킬로 인해 상처가 계속해서 치유되고 있었고 키잔은 김진석에게 상처를 입혀 마찬가지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었다.
그들의 싸움엔 피가 가득했다. 주변이 피로 물들고 있었다.
김진석의 모글레이와 키잔의 광폭한자의 대검으로 서로를 썰고 자르고 때리고 부수며 공격하고 있었다.
키잔의 가슴에서 피가 솟아오르면 마찬가지로 김진석의 가슴에서 피가 솟아오르고 키잔의 팔이 너덜거릴 정도로 잘려나가면 마찬가지로 김진석의 팔도 너덜거릴 정도로 잘려나갔다.
둘이 서로를 노리는 곳과 공격 방식까지. 완벽하게 똑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키잔의 싸움 방식은 전부 김진석이 만들어 주었다. 언제 어떻게 스킬을 쓰고 공격을 맞을 땐 맞고 피할 땐 피하는 것까지 전부.
난타전이었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의 몸을 향해 공격을 가했다.
“하…….”
넬은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저 둘의 싸움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넬은 둘이 어떻게 싸우는지 전부 보였다.
그녀의 눈에는 김진석이 그에게 맞춰주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활과 단검은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오로지 모글레이로만 키잔을 상대하고 있었다. 김진석의 결전 병기는 활이었다. 그가 가진 무기 중 가장 강한 것이 바로 카이의 전용 무기인 고요한 카인의 활이었으니깐.
광폭한 자의 대검과 모글레이의 차이가 너무나도 컸다. 하지만 김진석은 그 차이를 오로지 몸으로 때우고 있었다.
넬은 그게 걱정이었다. 아무리 가상 현실이라고 한들 김진석이 있는 곳이 바로 현실이다. 김진석이 힘을 되찾은 게 아예 바로 방금이었는데 언제 과거로 돌아갈지 아무도 몰랐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일어났다. 아무리 김진석이 도움을 거절했다고 한들 두고만 볼 순 없었다.
“언제 적 키잔이야. 나도 이제 강해졌어.”
넬은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무색하게 하늘에서 게이트가 열리고 있었다.
“…어?”
“음?”
“웬 방해꾼이…?”
김진석과 넬. 키잔마저도 하늘을 보고 의문을 가졌다. 하늘에 열린 게이트는 지금껏 보았던 게이트보다 배는 더 컸다.
게이트가 열렸지만 김진석은 단탈리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녀석이라고 이 안까지 관여할 수 있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건 자신의 트라우마 중 일부라는 것이다.
“…미치겠군.”
김진석에게 트라우마는 없다시피 했다. 어렸을 때의 기억도 안 좋은 기억이긴 했지만 이미 대부분 복수를 끝마쳤기에 트라우마도 없었다. 그렇다면 저 안에서 나올 건 하나밖에 없었다.
게이트 속에서 거대한 손이 보였다. 그건 사람의 손이 아니었다.
비늘로 뒤덮여 있었으며 손가락 끝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있었다. 그 거대한 게이트조차도 부족했는지 거대한 비늘로 뒤덮인 손은 게이트를 강제로 찢으며 나오고 있었다.
칠흑같이 어두우며 몸보다도 거대한 날개를 가진 서양의 드래곤. 악마의 방주.
“어디 있나?! 인간의 대적자여!”
아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의 싸움을 끝내야지 않겠나!”
키잔과 김진석은 아크와 서로를 번갈아 가면서 바라봤다.
김진석은 물론이고 키잔도 알고 있었다. 저건 괴물이다. 싸움을 끝내기 위해선 먼저 처리해야 할 대상이라고.
둘은 거의 동시에 외쳤다.
“광전사의 비기!”
“광전사의 비기!”
모글레이와 광폭한자의 대검에 거대한 기운이 서리고 있었다.
* * *
“저기…….”
엔젤은 조용히 눈 감고 기다리고 있는 세피드에게 말을 걸었다. 매드 스파이더는 기절한 자신의 전우를 데리고 치료를 하러 갔고 이곳에는 누워있는 김진석과 세피드밖에 없었다. 넬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이곳까지 날아오면서 알아냈다. 등 뒤에 날개를 단 게 아니라 아예 피부에 접목되어 있다는 것을. 마치 환경에 맞게 기괴하게 진화한 동물처럼 보였다. 인간이 저렇게 진화한 것일까? 엔젤은 그게 궁금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적어도 세피드는 그들에게 적대감이 없어 보였으니깐.
“조용.”
그런데 세피드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엔젤은 괜히 입술을 삐쭉거렸지만 세피드는 개의치 않고 중얼거렸다.
“…온다.”
“네? 뭐가…….”
그와 동시에 바깥에서 비명이 들렸다.
세피드는 곧바로 날개를 펼쳐 밖으로 날아갔다. 뒤에서 들리는 엔젤의 목소리 따위는 무시했다. 나가자마자 보이는 건 하늘의 게이트와 쏟아지는 몬스터들이었다.
이 세계에도 총과 같은 화기가 존재했지만 화력이 약했다. 이 세계의 날씨에 맞게 온몸에 딱딱한 갑각을 두르고 집게발과 독을 가진 전갈과 같은 몬스터나 모래 속을 유영하며 사람을 잡아먹는 지렁이들이 존재하니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놈들의 목표는 뚜렷이 보였다. 정확히 김진석이 잠들어있는 건물로 달려오고 있었다.
“단탈리온도 여력이 부족한가 보군. 고작 이 정도로 나를 뛰어넘겠다고?”
하지만 세피드는 대 악마. 그것도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는 대 악마다. 그는 그의 애마. 이클립스를 소환해 등에 탔다.
최강의 대 악마. 세피드가 다른 세계에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