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가상 현실에서 갑자기 로그아웃된 매드 스파이더는 분노에 차 주치의에게 따졌다.
“갑자기 무슨 짓이지?”
이제는 평범한 일반인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군복을 입은 채로 치료를 받고 있었다. 한쪽 눈은 실명된 채 백안이었고 그 눈이 실명한 이유로 보이는 거대한 흉터가 눈을 가로 지은 채 새겨져 있었다. 키는 180cm로, 제대로 먹지 못하는 이 세계에서는 거구였다.
그저 조용히 물어보는 것이었지만 그의 주치의, 엔젤에게는 위압감이 엄청날 것으로 보였지만 그녀도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다.
“전기가 끊겼는데. 밖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
이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깨끗한 피부를 가진 그녀는 손에 꼽게 아름다움을 가졌지만 그녀의 능청스러운 분위기가 그녀를 아름답다고 생각하기보단 기이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봐라. 거구의 남자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 누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겠는가.
“…쯧. 전기가 끊겼다는 건 강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이겠지.”
“아마 맞을걸? 너 정도면 금방 해결하겠지.”
능청스럽게 말하는 엔젤의 모습을 보고 매드 스파이더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이름이 매드 스파이더가 된 이유. 그건 바로 전쟁 중에서 함정을 파고 기다리는 솜씨가 가히 거미와 같다고 생각되기에 그런 것이다. 그리고 한번 물면 놓지 않는다고 붙여진 이름 매드 스파이더.
그리고 상대의 함정을 교묘하게 파내 역으로 죽이는 미친 거미. 그게 바로 그였다.
“…갔다 오지.”
“아니! 나도 따라갈게.”
“…….”
그는 언제나 품에 갖추고 있는 권총 하나만을 꺼내 밖으로 나섰다.
그 뒤로 엔젤이 콧노래를 부르며 그를 따라갔다.
엔젤. 그녀의 다른 이름은 매드 닥터였다.
* * *
“…뭐지?”
매드 스파이더의 감각은 속일 수 없다. 분명 건물에 야만인들이 숨어있어야 했다.
그는 본능적인 감각으로 놈들이 숨어있을 만한 곳을 특정해 먼저 들이닥쳤지만 그 안에는 방금 죽은 듯한 피를 꿀렁꿀렁 내뱉는 시체 몇 구뿐이었다.
그게 계속해서 이어지니 아무리 그라도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네가 한 짓인가?”
“…그럴 리가요?”
엔젤도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매드 스파이더가 그녀의 정확한 정체는 몰랐지만 적어도 범상치 않은 인물이란 건 알고 있었다. 평범한 자가 가상 현실 기기를 그렇게 멋대로 다룰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으니.
하지만 엔젤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녀가 벌인 짓은 아니었다.
그렇게 그들은 강이 흐르는 게 멈췄을 때를 대비한 건물 지붕에 지어진 태양광 패널을 향해 건물을 올라갔다. 그들이 지붕에 올라간 곳에서 본 건 상상치도 못한 것이었다.
그들의 세계는 디스토피아 세계였다. 일반 동물이 환경에 맞게 진화해 조금 기괴해진 동물들 말고는 사실상 일반 세계와 별다른 건 없었다.
그런데 눈앞의 인물들은 뭔가.
180의 매드 스파이더보다 적어도 10cm는 더 큰 거구의 눈을 다 가린 안대를 쓴 남자는 그러려니 한다. 등 뒤에 거대한 날개를 단 채 남자를 호위하는 듯 서 있는 두 남녀는 그들의 세계에서도 기이했다.
마치 가상 현실에서나 볼 법한 이들이었다.
“…너희는 뭐지?”
매드 스파이더는 이런 괴짜들을 잘 알고 있었다. 자기가 날고 싶다고 팔 일부분을 잘라 새의 깃털을 이어붙여 날려다가 떨어져 죽는 괴짜들도 있었다.
아마 그들과 비슷한 부류겠지. 그들에겐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미친놈이라는 것.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점. 그리고 왠지 모르겠지만 놈들은 항상 거대한 세력을 꾸리고 있었다.
테크트로닉 리버에 들어와 날뛰려고 하는 괴짜들은 얼마든지 있을 법했다.
그는 손에 든 권총을 그들에게 겨누지 않고 몰래 숨기며 긴장을 놓지 않고 물었다.
괴짜들은 항상 말이 많았다. 자기가 원하는 걸 말하거나 이룬 업적 등을 떠벌이는걸 좋아했다. 매드 스파이더는 그걸 이용하려 했다.
그때 눈을 가린 남자의 옆에 있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아름다움을 가진 깃털 갈린 날개를 가진 남성이 손에서 무언가를 던졌다.
그 무언가를 본 매드 스파이더는 흠칫 놀랐다.
“미안하지만 나도 도움을 좀 받았으면 하는데.”
말한 건 아름다운 남자가 아니었다. 유일하게 날개가 달리지 않은 눈에 안대를 쓴 남자였다.
매드 스파이더. 그가 놀란 이유는 아름다운 남자가 던진 무언가. 인간 때문이었다.
“…밀러?”
밀러. 매드 스파이더와 함께 과거 전쟁에서 같이 활약하던 전쟁 영웅 중 하나였다. 오래전 연락이 끊겼었는데…
“야만인의 수장이다. 전기가 끊긴 걸 복구해줬으니 대가를 좀 받고 싶은데.”
“…그런데 그걸 왜 우리한테 부탁하지? 도시의 주인에게나 부탁하지 그래.”
그 말 그대로였다.
도시의 전기가 끊긴 걸 복구해주었는데 왜 자신들에게 부탁하는 것인가. 하지만 매드 스파이더는 긴장을 놓지 않았다. 자신의 전우가 야만인으로 변한 건 안타까웠지만 그는 자신이 인정하고 전쟁 영웅으로 같이 추앙받던 인물이다.
고작 괴짜에게 당할 인물이 아니란 말이다.
“그자는 내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기 때문이지.”
“그럼 내가 들어줄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
“그럼…….”
“…응?”
두 남자의 시선이 뒤에서 멍하니 있던 엔젤에게 닿았다.
사실 숨겨진 이야기가 있었는데 엔젤이 몰래 야만인들에게 정보를 흘렸다. 매드 스파이더의 관심을 끌기 위해. 과거 한창 전쟁 중일 때 그녀는 납치당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영웅같이 그녀를 구해준 자가 바로 매드 스파이더. 항상 어디서든지 그를 생각해왔고 수소문하다가 그가 PTSD로 치료받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곧바로 그녀가 득달같이 달려간 것이다. 그렇게 치료를 해주며 시간을 보내니 어느새 연모의 감정이 그녀에게서 피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 대부분을 가상 현실 기기에서만 지내니 그녀는 그의 흥미를 끌어낼 관심거리가 필요했고 그게 바로 지금의 이벤트였다.
분명 그녀는 일부로 야만인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는, 과거 전쟁 영웅이 있는 야만인에게 정보를 흘렸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이상한 놈들이 계획을 망쳐 멍하니 있었던 상황이었다.
“…저요?”
“가상 현실. 나도 그것의 치료가 필요하다.”
“…눈은 치료하지 못하는데요.”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괴짜들은 생각과 행동이 특이할 뿐 멍청하지는 않았으니깐.
인간의 것으로 보이지 않은 아름다움을 가진, 등에 날개를 단 남성과 여성을 뒤에 두고 앞에서 말하는 두건을 쓴 남자가 괴짜들의 우두머리로 보였다. 정말 눈이 안 보이는지도 의문이었다. 두건을 쓰고 있는데도 말하는 대상과 항상 시선을 맞춰주고 있었으니.
그때. 시선이 쏠린 틈을 타 매드 스파이더가 품에 숨겨놓은 권총을 순식간에 꺼내 들어 두건을 쓴 남성을 향해 쏘았다. 괴짜들은 요구를 들어주는 건 미친 짓이다. 그건 그간 수많은 전장을 돌아다닌 그의 경험이었다.
그런데 후에 벌어진 일은 그가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위험하지 않나.”
어느새 두건을 쓴 남자의 앞으로 손을 뻗은 깃털 날개를 단 미남자였다. 매드 스파이더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슨 일이…….”
그 말과 동시에 손을 펼친 미남자의 손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있었다. 총알. 절대 손에서 떨어지면 안 될 이미 쏘아진 총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잘못 쏜 게 아니다. 만에 하나의 확률로 잘못 쏘았다고 할 수가 없었다. 미남자의 손에서 떨어지는 총알에 자신을 상징하는 거미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으니깐.
“강제할 생각은 없다. 내 목숨을 그쪽에게 맡길 생각이니깐.”
두건을 쓴 남자는 총소리가 났음에도 평온했다.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가상 현실 치료. 사람당 하나밖에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미안하지만 그쪽은 이놈이랑 대화를 좀 나누고 있길 바라지. 그래도 한 때 전우였던 자일 테니.”
게다가 그는 이쪽의 사정을 이미 정확히 알고 있었다. 물론 그건 이제 의미가 없었다.
“…총알을 손으로 잡는 자가 부탁하는데 들어주지 않을 자가 있나.”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지만 믿어야 했다.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었다.
그나마 매드 스파이더였기에 상황을 이해했지 온실 속의 화초와 같은 엔젤은 여전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 * *
“허허…….”
“맨몸으로 나는 기분을 느낄 줄은…….”
매드 스파이더와 엔젤은 넋이 나가 있었다.
지구가 망가진 지금 하늘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진 순간 피부가 타들어 가는듯한 더위와 뼛속까지 시린 추위를 동시에 겪었기에 도시를 지을 때도 최대한 낮은 고도에 지었다. 헬기는 생각도 못 하고 그나마 비행기를 개조해서 날아다녔지 맨몸으로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지금 일어났다.
괴짜 일행의 등에 난 날개는 가짜가 아니었다. 심지어 날개 달린 말도 있었다. 아름다운 여성이 엔젤을 안고 남성이 매드 스파이더를 안고 날 때 기겁을 했지만 쾌적하게 상쾌한 바람을 느끼며 날아갔다.
사람들의 위로 날아갔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도 눈치채지 못했다. 마법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몸으로 겪은 것 같았다.
“그래서. 제가 뭘 하면 되죠?”
매드 스파이더와 대화할 시간이 없어져서일까. 뾰루퉁한 표정의 엔젤이었다.
그 모습 때문에 오히려 매드 스파이더가 초조해졌지만 두건을 쓴 남자. 김진석은 개의치 않았다.
“똑같이 하면 된다. 기억을 읽고 치료를 하면 돼.”
PTSD 치료법은 간단했다. 발달한 기술로 뇌파를 읽어 어떠한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지 알아낸 다음 치료하는 방법이다. 그걸 이 세계에선 기억을 읽는다고 말한다.
“대신 너희 쪽에선 금지된 트라우마를 끝까지 강제로 일으켜라.”
트라우마를 치료할 땐 조금 조금씩 건드리고 나아진다 싶으면 점점 강도를 올리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김진석에겐 그런 시간 따위는 없었다. 곧바로 최고로 트라우마를 자극해야 한다.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죽어도 몰라요?”
그런데 그게 왜 금지가 됐나. 간단하다. 뇌를 자극하는 일이었고 트라우마에 잡아먹히면 영원히 그 가상 현실 세계에서 못 나올 수도 있었으니깐.
“그럼 그게 내 팔자겠지. 세피드. 네가 관건이다. 넬은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겠지만 넌 불가능하겠지. 분명 단탈리온의 방해가 들어올 거다. 지구는 대비가 되어있으니 여기가 문제다. 저 여자. 어떻게든 살려.”
“알겠습니다.”
단탈리온의 입장에선 김진석이 눈엣가시일 것이다. 하지만 녀석에게도 제한이 있을 테니 본인이 나서지 못하고 게이트만을 열고 있겠지. 만약 가능하다면 이 세계에서도 게이트를 열 것이다. 문제는 이 세계는 다른 세계의 몬스터들을 막을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미래 세계이긴 했지만 모든 도시는 서로를 적대했고 협력이란 단어 자체가 없다시피 했다. 게이트가 열려 다른 도시가 망하면 좋다고 그 도시를 점령하러 오겠지. 즉 도움을 기대할 게 못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김진석은 단일로서 가장 강한 세피드와 김진석에게 들어올 수 있는 넬을 선택한 것이다.
밖은 게이트가 닫히지 않게 비네와 바포메트를. 안은 넬과 세피드를. 김진석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믿고 맡긴다.”
김진석은 가상 현실 기기에 몸을 맡기고 침대에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