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김진석과 넬, 그리고 세피드는 눈부신 앞을 바라보았다.
게임에서 광원효과를 잘못 설정한 것처럼 코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빛나고 있었지만 어차피 눈앞이 보이지 않는 김진석은 물론이고 대 악마들에게도 아무렇지 않은 수준이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데.”
한껏 긴장하며 만발의 준비를 마치고 들어왔건만 느껴지는 건 없었다. 하지만 긴장을 놓지는 않았다. 눈이 안 보이는 김진석에게 언제 어디서 무슨 위협이 있을지 몰랐으니깐.
세피드와 넬은 들어오자마자 주변을 살폈다. 김진석이 정상이 아닌 이상 그들이 김진석을 경호해야 했다. 물론 그렇다고 김진석이 눈먼 공격에 맞아 죽을 인물은 아니었지만.
다른 게임 속 세계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어?! 안 돼요! 함부로 움직이지 마세요!”
빛이 사라지고 보이는 건 기이한 남자가 있었다. 의사 가운을 입고 있었으며 손은 기계 손이었고 눈에는 이상한 초록색으로 빛이 나는 망원경 같은 것을 끼고 있었다.
김진석은 이곳에 들어왔을 때 손과 발에서 이물감이 느껴졌다. 뭔가에 묶인 듯한 기분이 들기에 힘으로 그냥 뜯어버렸다. 세피드와 넬도 마찬가지였고 곧바로 뜯어냄과 동시에 김진석의 곁에 선 것이다.
“어지러우실 텐데… 괜찮은가?”
김진석은 넬에게 남자의 인상착의를 들었다. 특별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게임 속에서 흔한 존재였다.
바로 주인공과 같이 가상 현실 세계로 들어가게 일조하는 인물. 즉 그 세계의 의사였다. 모습은 이상했지만.
그에 김진석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지금 그들은 가상 현실 속에서 돌아온 컨셉이라는 것을.
“넬.”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김진석은 넬을 불렀고 동시에 그녀는 손을 휘젓자마자 이상한 차림의 의사는 픽 쓰러졌다.
김진석의 감각으로는 주변의 그와 같이 몸이 묶인 채 누워 의식이 없는 자들이 꽤 나 많이 느껴졌다. 원래라면 의사는 하나의 환자만 돌보는 게 맞다. 하지만 그만큼 거액의 돈을 들여 치료를 받아야 했기에 일반적인 서민들은 치료를 받는 게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들처럼 불법으로 받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 천막이지? 나가자.”
“…어떻게 알았어요?”
불법으로 받는데 정상적인 곳에서 할 리 없었다.
세피드와 넬이 먼저 밖으로 나서고 그 뒤로 김진석이 나섰다. 나서자마자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사막?”
횡량한 황무지였다.
뜨거운 바람이 불었고 그 어떠한 식물이나 선인장 등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모래. 그리고 뜨거운 햇빛이었다.
디스토피아 세계였다.
인간들의 끝없는 발전으로 인해 지구의 기후가 이상해졌고 아침에는 근 40도에 다다르는 햇빛이 내리쬐었으며 밤에는 영하 20에서 30을 오가는 극도의 온도 차이를 보였다.
아무리 단단한 건물이라도 이렇게 심한 일교차를 보이면 순식간에 노후화되고 부서질 수밖에 없었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지구는 지키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세계에서도 발전한 곳은 있기 마련이었다.
“넬. 인간이 많은 곳을 찾아.”
“그런 건 비네 전문인데… 한번 해보죠.”
생(生)기를 찾아내는 건 비네 전문이었지만 그렇다고 넬이 찾아내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서큐버스인 그녀가 인간의 기운을 찾지 못한다는 건 말도 안 됐으니깐.
김진석은 원래 이 게임 주인공의 주치의인 여성 엔젤을 찾고 있었다. 그녀는 이야기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었지만 가상 현실을 만든 최초의 인물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그 안의 모든 것을 관리할 수 있었고 만들어내거나 삭제할 수도 있었다. 그녀가 사는 곳. 테크트로닉 리버를 찾아야 했다.
이름이 그런 이유는 간단했다. 거의 유일하게 남은 흐르는 강을 이용해 전기를 만들어내고 사용하는 도시라서 그러한 이름이 지어졌다.
흐르는 강으로 사용하는 만큼 반영구적인 전기를 생산할 수 있었으니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였다.
“좀 먼 것 같네요.”
“가자.”
세피드와 넬은 날개를 펼치고 김진석은 세피드가 소환한 이클립스의 등에 올라탔다. 힘을 제재하기 위해 당연히 날개마저 뜯어낸 김진석이었다.
김진석은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다.
* * *
용인족과의 전쟁이 끝나자마자 하늘에서 게이트가 생성됐다.
지구의 거의 모든 전력이 모인 지금 용인족과의 전쟁에서 피해는 적었지만 그 뒤로 곧바로 이어지는 또 다른 몬스터와의 전쟁은 큰 피해를 야기했다.
재정비의 시간조차 가지지 못한 채 곧바로 로스트 월드의 몬스터들과의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하늘에서 게이트가 사방에서 열렸기에 중국 안만 막으면 된 전과 달리 사방에서 몬스터들이 몰려들었다.
밖으로 가지도 않았다. 분명 다른 곳으로 달아나면 민간인 피해가 커질 게 분명했는데 플레이어와 군인들만 노리는 걸 보면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몬스터들은 오로지 플레이어와 군대만 노리고 있었다.
로스트 월드에서 나온 인물들은 익숙한 몬스터들이라 상대하는 법이야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알고 있었기에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왜 이리 공격적이지?”
로스트 월드의 몬스터들도 전부 선제공격하는 몬스터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게이트에서 내려오는 수많은 몬스터는 전부 공격적이었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뒤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보며 달려왔다.
그 때문인지 군인들의 피해가 너무나도 컸다.
아무리 레벨이 낮은 토카와 꿔크 같은 몬스터라고 할지라도 충분히 일반인 정도는 죽일 수 있을 수준이었으니. 놈들의 부리나 발차기 같은 공격은 군인의 군복도 가볍게 뚫어냈다.
온갖 압도적인 힘을 가진 괴물이 날뛰는 와중에 아이러니하게도 레벨이 낮은 토카와 꿔크 같은 몬스터들이 사상자를 가장 많이 만들어냈다.
그리고 또 하나. 생태계가 갖춰진 로스트 월드의 몬스터들은 서로를 향해 싸우기도 했는데도 불구하고 게이트에서 소환된 몬스터들은 오로지 인간만을 노리고 있었다.
게다가 로스트 월드에서와 달리 몬스터들의 시체가 남았다. 빛으로 변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인간들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용인족과의 싸움이 끝난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로스트 월드의 몬스터들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실전 감각이 전혀 줄어들지 않았고 곧바로 전투태세를 갖췄다. 또한 용인족과 몬스터의 시체로 인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방어벽을 구축하고 그걸 이용하며 싸웠다.
그리고 특히 인간 세력에는 이현이 있었다.
아무리 미래 지식이 있다고 한들 게임 세계에 들어가기 전에는 고작 일반인인 그였지만 총기와 탱크, 헬기 등을 만들기 위해 여러 지식을 습득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어떤 몬스터를 보기만 해도 무엇을 만들 수 있을지 눈에 보이는 수준이었다.
이현은 눈을 감고 몬스터의 시신에 손을 대니 갑자기 빛이 나며 모습이 변하고 있었다. 몬스터의 시신이 점점 줄어들더니 이내 하나의 조그마한 드론으로 변했다.
이현이 손을 댄 몬스터의 시신의 정체는 거북이 몬스터. 그 거대한 시신이 조그마한 1M도 안 되는 드론으로 만들어냈고 드론은 혼자 알아서 다른 몬스터의 시신으로 날아가더니 시신을 하나하나 옮기고 있었다.
고작 1M도 안 되는 드론이 거대한 몬스터의 시신을 옮기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거북이 몬스터로 만들어낸 드론은 그 질량을 전부 가지고 있었다. 웬만한 몬스터가 드론을 공격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드론들이 계속해서 늘어나면서 동시에 또 다른 드론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시신을 옮기는 드론이 일꾼이라고 한다면 다른 몬스터의 시신으로 만드는 드론은 전투형 드론이었다.
몬스터들이 게이트에서 나오는 만큼 이현의 드론 또한 늘어나고 있었다. 미래 시대의 집약체.급히 만들어낸 드론들이 전장을 휘젓고 조금 안정화되자마자 곧바로 탱크와 헬기, 심지어 처음 보는 하늘을 나는 전함까지 만들어내고 있었다.
전장에서 이현은 세라스와 비견될만한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 전장에는 온갖 로스트 월드의 몬스터, 수많은 스킬을 가진 플레이어들, 다른 세계에서 온 기사들과 마법사, 스켈레톤의 군세와 가디언, 인간의 군대, 이현이 만들어낸 미래 시대의 전함까지.
화약이 터지고 스킬이 사용하며 몬스터의 사지가 날아다니고 있는 전장엔 죽음의 기운이 가득 퍼지고 있었다.
죽음의 기운, 사기.
그 사기와 항상 동반되다시피 따라오는 기운이 있었고 로스트 월드엔 그 기운을 좋아하는 종족이 있었다.
“…미치겠네.”
노라가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게이트에서 몬스터들이 쏟아지고 있는 노라의 눈에 익숙한 몬스터들이 새로이 나타났다. 다른 몬스터들도 익숙했지만 저들은 달랐다.
“분명 다 죽였는데 말이지.”
마족.
김진석이 알려준 정보를 토대도 나아간 비명의 숲 너머에 마족들. 놈들이 다시 게이트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로스트 월드의 전력이 모두 모여 마족들을 상대했고 전부 죽이자마자 곧바로 악마의 침공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게다가 특히 그들은 모르겠지만 김진석이 직접 나서서 성주격 마족. 즉 네임드 마족들이 하늘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놈들은 자신의 군대를 데리고 왔다.
이 전쟁이 더 오래가고 힘들어질 것이 눈에 보였다.
* * *
“쯧. 하필 맨 마지막이냐.”
김진석은 혀를 찼다. 넬은 분명 인간들이 모인 곳을 잘 찾았지만 테크트로닉 리버만 제외하고 잘 찾았다.
도시라고 불릴 곳이 여러 군데 있었는데 하필 테크트로닉 리버만을 제외하고 모든 곳을 다 찾았고 지금 가는 곳이 마지막이었다.
물론 넬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괜히 시무룩해진 상태로 날아가고 있었다. 김진석도 그녀의 잘못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기에 그녀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의 도착한 것 같습니다.”
그때 세피드가 앞을 보며 말했다.
김진석이 보이지 않았기에 그의 수족처럼 행동하는 세피드는 시무룩해져 말이 없는 그녀를 대신해서 눈앞의 광경을 김진석에게 알려주었다.
“…무슨 소리지?”
그런데 하늘에서까지 들릴 정도로 큰 소란이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강이 멈췄습니다.”
세피드의 말 그대로였다.
강이 흐르는 걸 멈췄다. 자연적으로 흐르는 물이 멈추는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쯧. 강 위에 건물. 그곳 꼭대기로 가자.”
강에서 전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 있었다.
김진석은 보이지 않는데도 말했다. 그는 이미 이 게임의 세계를 조사했다.
강이 흐르는 걸 멈추는 이벤트 또한 알고 있었다.
“밖에서 흘러들어온 야만인들의 수장이 꼭대기에서 폼잡고 있을 거다. 쓸모없는 놈이니 죽…….”
도시에 들어오지 못해 척박한 환경인 밖에서 생활하는 야만인들이 있었다. 그 야만인들이 도시로 몰래 들어와 강의 건물을 접수한 이벤트가 있었다.
그때 주인공을 치료하는 가상 현실 기계도 같이 멈추며 주인공은 강제로 현실로 끌려오게 된다. 하지만 주인공은 과거에 있던 전쟁의 전쟁 영웅 중 하나.
고작 야만인들 정도는 가볍게 처리 가능했다.
그는 가상 현실에 푹 빠져 있었고 그걸 방해한 야만인을 단독으로 전부 박살 내버린다. 즉 주인공의 할 일이란 것이다.
“…죽이지 말고 생포해둬. 쓸 곳이 있을 거다.”
괜히 함부로 이 세계의 이벤트를 망쳤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김진석은 그 위험을 제대로 알고 있었으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기를 선택했다.
“위에서 기다리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