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김진석은 인간들이 성장하길 바랐다.
모든 것을 김진석 혼자서 부담할 필요가 없었으니 로스트 월드에서처럼 인간들의 전력을 키우는 게 목적이었다.
그런데 비네와 바포메트가 몬스터들을 전부 막으면 당연히 인간들은 성장할 수 없겠지. 그건 김진석이 원하는 게 아니다.
그가 비네와 바포메트를 보낸 건 김진석 본인이 플레이어 대부분을 비네의 실험체로 보냈기에 본래 그들의 역할을 맡아주기 위해 보낸 것이다.
비네의 실험체는 이제 그들의 역할을 다했다.
지옥에서 올라온 듯한 실험체들은 다시 지옥으로 빨려 들어갔다. 자의가 아니다. 강제로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몬스터들을 놓지 않는 놈들은 몬스터들까지 균열 속으로 같이 빠져들었다.
“나머진 너희가 처리하렴?”
비네는 보기 드문 만족한 얼굴로 인간들을 향해 여유롭게 말하며 포탈을 만들어 그 속으로 들어갔다.
너무 순식간에 지나간 일이었다.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한 상태에서 그제야 인세가 지옥으로 변했을 때의 기억을 상기해냈다.
“그 괴물들… 사라진 플레이어들 같은데.”
“얼굴이 일그러져있어서 잘 모르겠지만… 인상착의가 사라졌을 당시와 똑같아.”
폭풍같이 지나간 지옥도에서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의 외견이 사라진 범죄자 플레이어들과 모습이 똑같았다.
여러 의견이 나왔지만 공통점은 하나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그런 이들 사이로 바포메트는 유유히 용인족을 잡아 사라지고 있었다.
그때 첫 가디언의 일격에 날아간 용인족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분노한 용인족의 포효는 잠시 멈춘 전쟁을 다시 시작시켰다.
“발포가 가능합니다!”
“당장 발포해!”
* * *
김상훈은 용의 기억을 보는 대가를 확실히 받았다.
“…여보?!”
김민서는 그녀의 남편이 용의 기억을 보자마자 몸을 부르르 떨며 쓰러지는 모습을 멍하니 봐야만 했다. 너무나 급작스럽게 쓰러진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는 세피드의 기운은 고작 민간인인 그녀가 오줌을 지리지 않는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봐야 했다.
마찬가지로 옆에서 지켜보던 김진석은 이 상황을 이미 예견했다.
“바로 기억을 지워. 늦으면 위험할 수도 있다.”
“알았어요.”
비록 온몸에 실험했던 흔적을 지우느라 눈까지 뽑아낸 김진석이었지만 그는 다른 방법으로 보는 방법을 알아냈다.
애초부터 김진석은 살기를 잡아내는데 능했다.
본인의 살기가 워낙 강해서 그런지 노라에게 배워 살기를 죽이는 방법을 깨우쳤고 동시에 살기를 잡아내기도 했다.
게다가 지구에 와서 배운 스킬 색적. 기본 생활은 극히 불편했지만 적어도 싸울 때만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지렁이는 아니었다.
사람이 쓰러지고 숨소리가 변한 것만으로도 그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넬에게 바깥 상황과 용의 생김새를 들었다. 비네의 공간을 가득 채운 거대한 적색의 드래곤, 그리고 몬스터를 다루는 용이 나오는 게임은 알고 있었다.
그 게임에서의 용은 그 게임 전체의 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세계를 관장하는 용. 세계가 있었던 만큼 살아온 용이란 것이다.
인간의 일생과 용의 일생은 차원이 다르니. 고작 여러 인간의 기억조차 견디지 못하는데 용의 기억을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김진석은 곧바로 넬을 김상훈에게 붙였고 넬은 김상훈에게 닿기 싫다는 듯이 손가락만 하나 가져다 대더니 눈을 감았다.
이내 사지가 부들거리던 김상훈의 몸의 떨림이 점점 잦아들었다.
김진석이 굳이 용을 잡아서 기억을 알아보려 한 이유는 당연히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능력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용은 기본적으로 불로불사. 오랫동안 살아온 놈의 기억에 일말의 단서가 있을까 싶어서다.
비록 놈의 몬스터는 바포메트에게 강제로 지배당했고 세피드와 넬의 협공에 아무것도 못 하고 비참하게 패배했지만 놈의 지식은 필요했다.
세상 모든 마법을 알고 있다고 전해지는 용은 게이트에 대한 것도 알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넬이 김상훈에게 손을 떼자마자 김민서가 그를 살펴보러 가려 했지만 세피드가 그녀를 막았다.
“지금 손을 대면 위험할 수도 있다. 내버려 둬.”
악마답지 않게 인간에게 친절한 세피드였다.
물론 아무 인간에게 그런 건 아니었다. 김민서는 강제로 끌려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그녀에게까지 막 대할 이유는 없었다.
그사이에 넬은 빨아들인 기억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감히 인간 따위가……!”
중후한 남성의 천둥이 몰아치는 듯한 목소리.
그래봤자 비네의 마법에 제압당해 땅에 처박혀 있는 모습은 하나도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대 악마 개인이랑 싸웠다면 비등비등하게 싸울 수 있을 정도의 괴물이었지만 대 악마 전원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시각이 실명돼 청각에 의존하던 김진석의 귓가에 찌르는 용의 소리는 거슬렸다.
“이제 필요 없으니 혀를 잘라.”
“…잠깐?!”
용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세피드는 검을 꺼내 들었다. 뒤에서 들리는 비명을 무시하고 김진석은 넬에게 물었다.
“찾았어?”
“잠시만요. 쓸데없는 기억이 많아서…….”
아무리 넬이라도 평생을 사는 용의 기억은 방대했다.
김진석은 조용히 기다렸다. 보이지 않는 눈이라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불편한 김진석은 그냥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세피드가 그에게 의자를 가져다주려 했지만 대충 기색을 눈치챈 김진석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김상훈과 김민서의 아이인 김서아가 김진석에게 다가갔다.
서 있을 때는 워낙 거대해 아이가 보기엔 무서웠지만 바닥에 주저앉으니 눈높이가 얼추 비슷해진 것이다. 게다가 눈을 가리는 두건까지 쓰고 있으니 아이의 흥미는 더더욱 향할 수밖에.
쫄래쫄래 김진석에게 다가온 김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을 가리면 안 보이지 않아요?”
“서아야?!”
남편을 보살피느라 잠깐 한눈판 사이에 서아가 김진석에게 다가가자 깜짝 놀라 아이를 불렀다. 온갖 수식어가 김진석에게 붙어있지만 지금 김민서의 뇌리에 끼치는 건 하나였다.
가장 많은 플레이어를 죽인 자.
대 악마들도 깜짝 놀랐다. 김진석에게 다가가는 자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건 김서아에게 특수한 능력이 있다거나 한 게 아닌 너무나도 미약한 힘을 가졌기에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보는 눈이 다르거든.”
“거짓말!”
하지만 김민서의 우려와 달리 김진석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학살자 플레이어란 이명이 붙어있었지만 누명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가 수많은 플레이어를 죽인 건 사실이었으니깐.
그러나 김진석을 실제로 만나 본 사람들의 얘기는 달랐다. 김진석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히 마트에 가며 음식도 사고 옷도 사고 했다.
당연히 그곳에는 플레이어들보다 민간인들이 더 많았고 김진석을 직접 만나본 그들은 하나같이 친절했다고 말했다. 다른 높은 등급의 플레이어들과 달리 오만하지도 않았고 본인보다 나이가 많은 자들한테 꼬박꼬박 존댓말까지도 했다고 한다.
특히 아이들에겐 더욱 친절했다. 필요하다면 무릎까지 꿇으며 눈높이를 맞춰가며 대화하는 그의 모습은 안 좋은 소문이 돌았던 김진석의 소문이 거짓이란 걸 알아차렸다.
그가 거주하는 나라인 한국에서 그의 평판이 나쁘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었다. 물론 아는 사람만 아는 것이었지만.
김진석은 아이에게 잘 대해주었다. 그의 어린 시절을 생각했을 때 자신에게 잘 대해준 어른 따위는 없었으니 적어도 그는 그렇게 될 생각은 없었다.
“거짓말 아니야. 써볼래?”
“…응!”
김진석은 서아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두건을 벗어 서아의 눈에 씌어주었다.
“…헉!”
김민서는 김진석의 모습을 보고 숨을 들이마셨다.
김진석의 눈의 상처는 어린아이가 보기엔 너무나도 잔인했다. 마땅한 장비 없이 오로지 비네의 능력으로만 눈을 뽑아낸 데다가 뽑힌 흉터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다행히 김진석이 곧바로 두건을 서아의 눈에 씌었기에 그녀가 눈의 상처를 볼 일은 없었다.
“안 보이지?”
“와… 진짜 안 보이네?”
어눌한 말로 신기하다는 듯이 말하는 김서아의 모습은 비록 눈이 보이진 않았지만 귀엽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넬은 그 모습을 자주 보아왔지만 다른 대 악마는 그런 김진석의 모습에 입을 떡하니 벌렸다.
“저 남자에게… 저런 모습이 있었어?”
“아이에겐 친절한 모습. 미소가 지어지는군요.”
“난 대충 예상했지. 우리와 같은 다른 세계에서 온 이들을 구하려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
어느새 용인족을 처리하고 돌아온 비네와 바포메트도 합류해 같이 놀라고 있었다.
그때 넬이 눈을 떴다.
“단탈리온이 이놈에게도 찾아왔네요. 아마 모든 지구로 온 몬스터들에게 찾아간 것 같네요.”
넬의 말에 김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일이었으니깐.
그러나 뒤에 올 말은 김진석도 예상하지 못했다.
“게이트가 남아있어요. 아마 단탈리온도 이런 일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은데…….”
김진석이 다른 몬스터들을 다 냅두고 굳이 용을 사로잡아서 기억을 뽑아낸 이유. 놈에게 방대한 지식이 있어서도 있었지만 그 게임 세계에 한 NPC를 알고 있었기에,
눈앞의 비참하게 쓰러져 있는 적색의 용이 점령한 게임 세계. 사실 그곳은 가상 현실 세계다.
게임의 세계관이 기본적으로 시작할 때 미래인 세계에서 가상 현실 게임으로 들어가면서 게임이 시작된다. 게임 속 게임이라고 보면 되는데 그 안에서 현실과 게임을 오가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 게임에서 가상 현실 게임의 존재의의는 전쟁을 겪고 PTSD가 온 인물들을 치료하는 목적으로 개발된 것이다. 미래였지만 오히려 미래였기에 수많은 전쟁을 겪은 이들이 존재했고 그게 게임의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언제나 죽음의 위기를 겪는 환각을 겪었는데 오히려 게임 속으로 들어가 죽음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배우는 것이다. 가상 현실 게임은 죽는다고 한들 되살아나니깐. 역으로 정면돌파 하는 것이다.
거기서 주인공의 전속 의사가 하나 있었다. 그녀는 주인공이 들어간 가장 현실 세계의 게임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데 즉 그 게임의 GM. 게임 마스터라고 보면 됐다.
김진석은 그걸 노렸다. 만약 그녀를 만나 김진석이 직접 가상 현실 세계로 들어간다면 그 안에서 무엇이든 가능하겠지. 설령 죽어 김진석의 스킬과 의념만 남은 키잔을 다시 되살리는 것 또한 가능할 것이다.
김진석은 키잔의 완벽한 죽음을 노리고 있었다.
그 세계는 가상 현실이겠지만 김진석이 들어간 순간 현실이 될 테니.
“가자. 김민서 씨?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김진석은 곧바로 서아를 품에 안고 자리에서 일어나 정확히 김민서에게 걸어가 서아를 직접 안겨주었다.
“선물이야. 서아야. 가지렴.”
“어? 괜찮아?”
여전히 두건을 쓴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아이는 김진석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지 못했고 김진석도 그걸 나중에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바포메트가 건네준 두건을 눈에 쓰고 직접 서아의 두건을 벗겨주었다.
“여러 개 있어서 괜찮아. 잘 있으렴. 언젠가 다시 보자.”
김진석은 말함과 동시에 세피드가 소환한 말. 이클립스의 등에 올라탔다. 그 뒤로 4명의 대 악마가 날개를 펼쳐 어디론가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