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인간들은 어이가 없었다.
그들의 신이 누군진 이미 알고 있었다. 용. 대부분 소개되는 종족 중 최강이라 불리는 종족이었다.
그런 용이 사라졌다. 그것까진 알겠는데 왜 자신들에게 뭐라 하는 것인가. 저들의 말로는 이 세계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그게 더 어이가 없었다. 지구의 인간 중 그 누구도 용을 본 적이 없었다.
용인족은 인간의 얘기를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말을 끝내자마자 곧바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에 흥분한 몬스터들이 울부짖었다.
인간들은 저 용인족이 어느 게임에서 나왔는지 이미 알아냈다. 그것을 알아야 기본적인 정보와 약점 등을 알 수 있었으니깐 새로운 몬스터가 나왔다 하면 바로 게임을 알아보는 게 정석이었다.
저들의 세계에서 나온 용은 몬스터의 종주였다. 그 세계에서 나오는 모든 몬스터의 왕. 유일한 용이었으며 모든 몬스터들이 그 용에게서 태어났다.
사실상 신이라고 봐도 무방한 괴물이었다.
그런 용이 사라졌으니 저들이 분노하는 건 당연하겠지.
그런데 왜 지구의 인간들에게 그러는 것인가.
이미 몬스터들은 분노했고 인간들의 전력도 놈들을 토벌하기 위해 모인 상황. 인간의 군대와 몬스터의 군세가 맞붙기 직전이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용인족의 손이 내려가는 순간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그렇게 용인족의 손이 절반 가까이 내려온 그 순간.
지진이 일어났다.
지상에 거대한 균열이 생기며 땅이 울리고 있었다.
일부 군인과 플레이어들은 이런 현상을 알고 있었다.
“세라스 씨?”
“아냐! 내가 아니야. 이건……?!”
세라스가 그녀의 스켈레톤 군대를 소환할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소환하지 않았다.
인간들은 물론이고 몬스터와 용인족까지 제대로 중심을 잡기 어려울 정도로 지진의 강도가 강했다. 아무리 세라스라도 이 정도는 불가능했다.
균열의 사이에서 거대한 뼈로 된 손이 올라와 맨 앞에 서 있던 용인족의 몸을 쳐버렸다.
“크악!”
피를 토하며 날아가는 용인족의 몸이 땅에 처박혔다. 가웨인조차 위협적이다고 느낀 용인족이 허무하게 전장을 이탈한 것이다.
“저 손… 설마…….”
세라스는 익숙했다. 마기를 듬뿍 먹은 자신의 가디언과 같았다. 하지만 달랐다.
가디언의 몸에 축적된 마기의 양이 달랐다. 격이 달랐다.
“아~ 실험만 하고 제대로 된 결과를 내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분명 전장의 소리에 묻힐 만한 조그마한 목소리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목소리는 귀에 정확히 들어왔다.
전장의 한 가운데. 비정상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여성 악마. 비네가 등장했다.
동시에 균열 속에서 전장의 악마. 가디언이 올라오고 있었다. 세라스의 가디언은 뼈로 된 스켈레톤 가디언이었다.
하지만 비네의 가디언은 온전한 가디언. 멀쩡히 살아 본인의 스킬까지 사용할 수 있는 가디언이었다. 그리고 가디언은 하나가 아니었다.
전장에 등장한 가디언의 숫자는 총 다섯. 전장을 휘저을 악마의 숫자가 자그마치 다섯이 나타났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실험의 완성을 볼 차례야!”
자기의 실험은 완성할 게 분명하다는 듯한 말은 오만했다.
비네는 보기 드물게 흥분해 있었다.
그녀의 실험은 김진석을 위함이었다. 물론 그 실험은 성공했지만 아직 실험의 부산물이 남아있었다.
균열 속에서 그녀의 실험체들이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저게 뭐지?”
“우욱…….”
정신적인 내성이 없는 군인들은 물론이고 플레이어들 일부도 헛구역질이 나왔다.
지옥에서 올라온 듯한 놈들이 균열 속에서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분명 베이스는 인간이다. 하지만 온갖 기괴한 몬스터의 신체가 인간의 몸에 접목되어있었다.
발이 강제로 뽑히고 말과 비슷한 말의 발굽이 접목되어있었지만 제대로 걷지 못해 기어 다니는 실험체.
팔 전체를 뽑아내 사마귀와 비슷한 낫을 팔을 총 4개를 붙여 정신 나간 난무를 시전하는 실험체.
이빨을 전부 뽑아내 상어보다 날카로운 이빨을 사용해 몬스터를 물어버리고 있었지만 내구성이 약해 계속해서 부서지고 재생하는 실험체.
헐벗은 몸 정중앙에 입이 달려 주변의 모든 같은 실험체를 포함한 모든 걸 잡아먹는 실험체 등.
온갖 기괴하고 역겨운 실험체들이 나타났다.
전부 김진석의 몸에 접목하려다가 실패한 실험체들이다. 하지만 그 부산물 또한 꽤나 쓸모가 있었다.
김진석이 얼마든지 실험해도 된다고 잡아 온 플레이어들에게 던져주었는데 생각보다 더 잘 싸워주었다.
비록 이성을 잃고 날뛰는 놈들이었지만 강제로 몬스터의 신체를 접목해서 그런지 몬스터와 같이 싸웠다. 접목된 신체의 사용법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거다.
인간의 몸을 몬스터가 장악한 것인지 정신은 완벽한 몬스터였다.
게다가 후에 잡은 흡혈귀의 피를 이식한 결과 피를 먹으면 몸의 상처 또한 재생되게 변했다. 흡혈귀의 특성까지 가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전장은 지옥으로 변했다.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이 몬스터를 물어뜯어 피를 빨아먹는다. 자기들의 온몸이 찢겨나가도 개의치 않는다. 어차피 피를 먹기만 한다면 재생될 테니깐.
오히려 몬스터들이 그런 괴물의 모습에 두려움이 들었다.
본인들이 아무리 공격해도 신경 쓰지 않고 달라붙는 모습은 공포에 질리기 충분했다. 사지가 잔인하게 뜯겨나가도, 거대한 질량에 짓밟혀도, 설령 목숨을 잃어도 얼굴은 그대로 남아 살가죽에 들러 붙어있는 모습은 기괴했다.
도저히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겉모습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은 인간이다.
“…힘이 들어와.”
이지현의 특성. 인간을 상대할 때 강해지는 그녀의 능력은 지금 눈앞의 괴물들에게도 발동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저것들은 절대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변의 모든 것을 공격하는 놈들이다. 놈들끼리도 서로 잡아먹고 하는데 피아구분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뭐해?! 전부 갈아버려!”
현세가 지옥으로 변했다. 피아구분이 필요 없다면 강력한 화력을 가진 군인들에겐 최적의 조건이다.
전 세계 모든 나라의 군인들이 모인 지금. 여럿의 지휘관이 전부 똑같은 명령을 내렸지만 그 무엇하나 발포되지 않았다.
당혹스러웠다.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마치 총이 발포하는 걸 거부하는 것 같았다.
그때.
“안타깝군. 저것도 인간의 능력으로 봐야 하는 건가. 너무나도 잔인하고 극악무도하군.”
하늘에서 저 지옥도를 보고도 소름 끼치게 웃고 있는 여성 악마의 옆에 어느새 또 다른 악마가 날고 있었다.
비참하고 안타깝다는 눈으로 인간들을 바라보고 있는 그 악마의 생김새는 인간이 아니었다. 미노타우로스. 그것도 거대한 뿔이 솟아있었고 그 위로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바포메트. 또 하나의 대 악마가 고고히 하늘에 떠있었다.
“아무리 즐겁다 한들 실험체들은 귀중히 여겨야 하지 않겠나.”
“뭐 어때. 그렇게 죽더라도 그것 또한 실험이니깐. 내버려 둬도 상관없었는데.”
여성 악마. 비네는 바포메트의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그들의 말로 보아 화기가 발포되지 않는 이유는 바포메트 때문인 것 같았다.
바포메트. 그가 비참하고 안타깝게 바라본 것은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들의 손에 들린 화기. 총과 헬기 탱크 등이었다.
몬스터의 소재로 만들어진 것. 몬스터를 지배하는 바포메트가 보기엔 너무나도 잔인한 모습이었다. 바포메트는 말 그대로 몬스터를 지배한다. 그건 목숨을 잃어 한낱 소재로 변해 인간의 손에 들렸을 때도 마찬가지다.
인간들의 화기는 바포메트의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그들은 모습을 숨기지도 않고 하늘에 고고히 서 있었다. 김진석의 명령으로 모습을 숨기고 돌아다니던 대 악마들은 이제 더는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
그 뜻은 김진석이 더는 힘을 숨기지 않겠다는 뜻이다.
지구에서의 게임은 끝에 다다랐다. 더는 힘을 숨길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힘을 숨기고 막을 수 있는 수준이 넘어섰다.
“저 괴물은… 설마?!”
이현과 이설 남매는 여성 악마는 잘 모르겠지만 미노타우로스 악마는 알고 있었다. 서울에서의 가장 큰 위협이었던 괴물.
이현은 기억을 잃었지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설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저 괴물은… 인간으로 변해 김진석에게 호의를 보였다.
“김진석… 플레이어?”
김진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흔적은 전 세계 곳곳 남아있었다.
그리고 또 한 명. 지구의 사람 중에서 바포메트와 비네의 모습을 아는 자가 있었다.
“뭐… 죽었다고 믿지도 않았어요.”
제이다. 지구에서 김진석과 가장 가까이 지낸 인물. 그녀는 애초부터 김진석이 죽었다는 걸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를 찾으려 하지도 않았다. 때가 되면 알아서 돌아올 것이니깐.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고 했던가. 적어도 김진석은 그 책임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구에는 더는 지구의 인간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 악마들이다.”
“대비해라!”
“젠장. 왜 여기까지…….”
로스트 월드에서 온 이들. 선발대인 노라와 다이아 세라스뿐만이 아니라 살아남은 모든 로스트 월드 속 이들이 지구에 들어와 있었다. 도망 와있었다.
저 대 악마들을 피해서.
악마들의 습격 속에서 살아남은 최정예 인원들은 곧바로 전투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섣불리 대 악마를 공격할 수 없었다.
적어도 저들은 그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지옥도로 변한 전장의 하늘에서 몬스터와 한 때 인간들이었던 실험체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을 뿐. 저들의 힘은 그들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고작 살아남은 그들로 어떻게 해 볼 게 아니었다.
“지구의 플레이어들은 준비하십시오! 대 악마들입니다!”
끝까지 살아남은 리차드는 용병의 왕이란 별명답게 플레이어들을 상기시켰다. 멍하니 전장을 바라보는 플레이어들은 리차드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언제 몬스터와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이 자신들에게 들이닥칠지 모른다. 게다가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화기가 작동되지 않는다. 군인들이 쓸모가 없어졌다는 거다.
“플레이어들이 선두에 선다! 그대들은 왜 작동하지 않는지 이유를 찾아라!”
루크와 리아즈 칸 등 최강이라 불린 플레이어들이 군인들을 제치고 앞에 서며 말했다. 만약 화기를 쓸 수 없다면 군인들은 그냥 허수아비일 뿐이다.
다른 플레이어들도 그들의 말을 듣고 앞에 서긴 했지만 그들의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눈앞에 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사지가 날아다니고 피가 솟구쳐 내렸으며 인간과 몬스터가 서로를 물어뜯으려 안달 난 상태였다. 게다가 웬만한 건물보다도 거대한 악마가 눈을 부릅뜨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총 다섯의 거대한 악마는 전장에 참가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비네의 명령 때문이다. 그녀는 오로지 실험체의 무력을 보고 싶어 했다.
실험체는 김진석의 허락하에 잡아 온 범죄자 플레이어들이다. 적어도 인간이었을 적의 힘은 뛰어넘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놈들은 창조주인 비네에게도 달려들었지만 상관없다. 그녀의 손짓 한 번이면 죽을 놈들이니깐. 소모품으로서 잘 써먹기만 하면 됐다.
그래도 소모품이 오랫동안 가면 좋을 테니 흡혈귀의 피를 주었는데 생각보다 잘 받았다.
인간과 가장 비슷한 종족이라 그런가, 흡혈귀의 특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놈들은 비네의 생각보다 잘 싸워주고 있었다.
“이만 끝내야 할 것 같은데. 내버려 두면 인간들이 공격하겠군.”
바포메트의 말에 비네는 힐끔 인간들을 쳐다봤다.
그들은 몬스터와 실험체들이 서로를 향해 자멸하면 남아있는 잔당들을 죽일 속셈인 것 같았다. 그건 비네도 김진석도 원하는 결과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