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이지현과 로스트 월드의 3인이 떠나간 후.
“다신 능력을 사용한다고 하지 마. 다시는.”
“…알겠어.”
김민서는 김상훈과 깊은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녀의 남편은 너무나도 무방비하다.
어떻게 보면 시골 처녀인 그녀보다도 훨씬.
사람이 착했다. 하지만 좋게 말해 착한 거지 나쁘게 말하면 호구 같다는 거다. 정부 쪽 인사였다 보니 은퇴를 하고 나서도 여러 사람이 찾아왔다.
각자 원하는 건 달랐지만 부탁은 같았다. 능력을 사용해달라고.
그럴 때마다 아내인 그녀가 계속해서 거절했다. 내버려 두면 다 들어줄 것이 뻔하기에 그때마다 그녀가 제동을 걸었다.
둘의 아이인 김서아는 예쁜 누나들이 사라진 것이 아쉬워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금방, 그녀보다 더 아름다운 여성을 만날 수 있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무언가에 부딪힌 아이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누구세요?”
“안녕?”
소름 끼치게 아름다운 그 여성은 인간의 아름다움이 아닌 것 같았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 등 뒤에 난 거대한 박쥐 날개는 고혹적인 그녀의 모습을 더했다.
“서아야! 당장 이리와!”
엄마의 말에 깜짝 놀란 아이는 그녀를 향해 도망갔다. 김민서는 그러한 모습을 한 자를 어떻게 부르는지 알고 있다.
“악마……!”
그녀의 용모는 같은 여성인 김민서에게조차 고혹적으로 보였다. 그런데 김상훈은 분명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넬… 플레이어.”
그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자. 그녀의 내면을 들여다보려는 순간 그가 읽었던 모든 플레이어의 기억이 몰아쳤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훨씬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그 기억은 뇌리에 박혀있었다.
“…아는 사람이야?”
김민서는 남편의 말을 들었다. 플레이어란 존재는 온갖 능력을 가졌으니 저 비정상적인 아름다움과 날개도 충분히 가질 수 있겠지.
하지만 경계는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녀도 남편의 능력이 필요한 것일 테니깐.
“맞아. 난 인간의 기억은 읽을 수 있지만 다른 생명체는 안 되더라고.”
분명 김민서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눈앞의 악마는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이 말했다.
“오랜만에 보네?”
넬 또한 김상훈을 기억하고 있었다. 고작 인간에게는 과분한 능력이다. 악마인 자신도 다른 인간의 기억을 기억하지 않는다.
하찮은 인간의 기억을 왜 기억하고 있겠는가. 이미 다 까먹고 사라진 기억들이다.
하지만 김상훈의 능력은 다르다. 다른 인간의 기억을 기억해 타인에게 알려줘야 했기 때문에 아주 정확히 기억하고 있어야 했다. 넬은 그 기억을 전부 증폭시켜버려 과부화시킨 것이다.
“기억 제거해주지. 한 몬스터 기억만 읽으면 돼. 강제하지 말라고 했으니 강요하진 않겠어. 1시간 주지.”
넬은 강요하진 않겠다고 말했지만 고작 1시간을 준 것부터가 강요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녀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연기처럼 흔들리는 포탈 속으로 들어갔다.
“아. 가족도 같이 와도 상관없어. 아니… 가족도 같이 와야 할걸?”
들어가기 전 메아리처럼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경고와 같이 들렸다.
김민서는 너무 순식간에 지나간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건 김상훈도 마찬가지였다. 넬 플레이어. 김상훈이 알고 있는 바론 신체 능력 플레이어였다. 날개를 가졌다는 소리는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 그의 아내의 말대로 악마와 같은 모습이었다.
“…위험한 사람이야?”
김민서는 남편이 그녀를 알고 있는 듯한 모습에 물어보았다. 평생을 TV도 없는 시골에서만 지내온 그녀는 플레이어를 잘 몰랐으니깐.
하지만 고압적인 그녀의 모습은 평범한 플레이어같이 보이지 않았다. 무섭도록 아름다운 그녀였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욱 현실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아내가 물어봤지만 김상훈도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기억을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연인인 김진석은 알려 하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었다.
“당신도 알 거야. 그 김진석 플레이어의 연인이야.”
“…그 남자?”
여러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고 했다. 그들에게서 여러 플레이어의 이름이 들려왔지만 가장 이름이 거론이 많이 되는 자가 바로 김진석 플레이어였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플레이어를 죽인 자. 세계가 멸망할 위기를 여러 번 구했으면서 단 한 번도 생색내지 않고 조용히 지낸 자.
게임 속 최초의 플레이어. 김진석.
“그런데 죽었다 하지 않았어?”
“…응?”
김민서 또한 남편의 곁에서 그의 얘기는 수도 없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실종되었다. 몇 년이 지났으니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방금 그… 사람. 누구의 부탁을 받고 온 것 같았는데.”
“……!”
김상훈은 알고 있었다. 넬은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그건 그녀가 속한 길드의 길드장인 루크의 말도 마찬가지. 루크가 그녀에게 따로 무언가를 시킨 적도 없긴 했지만 세간에 그녀의 오만한 성격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오죽하면 그녀의 외모만 보고 김진석이 반했다는 소리도 있었으니깐.
하지만 김상훈은 아니다. 그녀는 오로지 김진석을 위해 살아간다. 그녀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때도 그러했다. 김진석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려 하는 것을 매우 불쾌해했다. 그런 그녀에게 부탁할 자가 있고 그걸 들어준다라…
“가자. 그래야만 할 것 같아.”
“…그래.”
김민서는 남편의 말에 동의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지현과 로스트 월드 3인이 왔을 때는 아예 공식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가족을 감시하고 있는 자들도 그들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들이 떠나가고 안부를 물어왔으니.
하지만 방금의 악마와 같은 여성이 다녀온 지금 아무도 그들의 안부를 물어오지 않았다. 그녀가 온 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녀가 죽이려고 했다면 이미 이승에 없었을 거다.
과연 그들의 가족을 감시하는 자들이 무능한 것일까. 아니면 최강의 플레이어라고 불린 자의 연인인 그녀의 힘이 예상외인 건가. 아니면 둘 다일까.
검은 연기와 같은 포탈이 하늘거리며 있는데도 그들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뭐가 됐든 그들은 이미 신뢰가 떨어졌다.
“서아야? 우리 여행 갈래?”
“좋아! 어디로?”
“…그건 우리도 몰라.”
딱히 챙길 것도 없었다. 김상훈 가족은 선택지가 없었다. 게다가 사실일지 모르겠지만 김상훈의 트라우마도 고쳐준다고 했다.
단출한 세 가족은 천천히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가족의 모습이 사라지고, 동시에 포탈이 사라짐과 동시에 가족을 감시하던 이들이 달려왔다.
“김상훈 플레이어! 괜찮습니까?!”
그들은 이곳에서 갑자기 느껴지던 거대한 기운을 느끼고 급히 달려온 것이다. 그 거대한 기운은 그들이 온다고 한들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언정 김상훈 가족은 대피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이 급히 달려왔을 때는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 * *
“응? 왔네?”
넬은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온 인간 가족을 보고 살짝 놀랐다. 김진석이 부탁하긴 했다. 더 정확한 정보를 알려면 그가 필요했으니. 경고를 주긴 했지만 어차피 넬은 그들에게 아무런 해를 가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김상훈이 있건 없건 시간만 주면 계획은 성사될 수 있었으니.
그때 아무 힘도 없는 인간 여자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기억을 제거해준다는 게 정확히 무슨 말이죠? 원하는 기억만 지울 수 있는 건가요?”
넬은 그녀를 보고 신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 악마인 자신을 앞에 두고 아무 힘도 없는 자가 저렇게 말할 수 있다니.
“걱정하지마. 네 남편 능력 사용해야 하는데 네 남편 기억을 지우겠니?”
김민서의 걱정은 바로 그것이었다. 남편의 기억이 제대로 남아있는가. 넬은 그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 김상훈의 기억이 제대로 남아 있어야 능력도 제대로 사용할 텐데 당연한 거다.
“먼저 능력을 사용해. 그러면 읽었던 기억도 전부 지워주지.”
그렇게 말하는 넬은 어디론가 향했다. 마치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이.
아직 제멋대로인 아이, 김서아를 날뛰지 못하게 김민서는 한 손으로 안았고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검은 연기처럼 흐물거리는 포탈 속으로 들어간 것과 달리 포탈 속은 순백이었다. 자칫하면 정신병 걸릴 것만 같은 순백의 공간. 아무것도 없이 순백만이 가득찬 그 공간에서 넬의 뒤를 조심히 따라간 가족은 이내 거대한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너무나도 거대했다. 그들의 시야에 전부 잡히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나마 그들이 알 수 있는 건 거대한 만큼 들리는 엄청나게 큰 숨소리. 살아있는 생명체란 것이다.
그때. 멀리에서 걸어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오랜만이군요. 김상훈 플레이어.”
“…김진석 플레이어? 맞습니까?”
김상훈은 긴가민가했다.
김진석을 보지 못한 지 오래였다. 그의 첫인상은 바로 거대하다였다. 거의 인간 오크와 같을 정도로 돌보다 탄탄한 근육과 거구는 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눈앞의 인간은 누구인가. 분명 키는 컸지만 거구라는 소리는 빈말로도 나오지 않았다. 온몸이 비쩍 마른 데다가 눈을 전부 가리는 두건까지.
마치 맹인의 모습이었지만 김상훈은 눈앞의 남자가 누군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은…….”
“부작용입니다. 힘을 취했기에.”
그 말에 김상훈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김진석의 힘은 인간의 것이라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했다. 이야기만 들어봐도 사실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웠으니깐.
그 힘의 대가라고 생각하면 김상훈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과는 조금 다르지만 김진석은 굳이 그의 생각을 바로잡아주지 않았다.
김상훈과 그의 가족은 멍하니 거대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묻는 듯이 김진석을 바라봤고 김진석은 그것의 정체를 말해주었다.
“용입니다.”
“…예?”
바깥에서 용인족이 날뛰고 있는데 김진석은 그 용인족의 주인인 용을 이미 잡아놓은 상태였다. 사실인지 물어볼 것도 없었다. 기억을 읽어보면 알 수 있을 테니깐.
“제가 원하는 정보는 하나.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는 정보입니다.”
* * *
김상훈이 사라졌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중국에서 몬스터들이 쏟아져나왔다. 마찬가지로 그 사이사이에 용인족들이 섞여들어 있었지만 그들은 곧바로 인간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들은 병력을 모으고 있었다. 전처럼 군대에게 몬스터들이 쓸리지 않기 위해 엄청난 숫자를 모으고 있었다.
위성을 통해 그걸 본 인간들은 곧바로 헬기와 탱크 등을 이용해 장거리 포격을 날렸다. 그러나 통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나타난, 과거에 재앙이라 불렸던 와이번들이 날아와 포탄들을 물어뜯었다. 정확히 터지는 부분을 알고 있는지 포탄의 앞부분을 제외하고 옆에서 물어뜯어 바다에 버려버리는 모습은 이미 모든 대처를 마련한 것 같았다.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인간들은 곧바로 플레이어와 군인들을 소집. 또다시 중국을 되찾기 위한 전쟁을 벌이려고 했다.
그때였다.
중국의 몬스터 무리 사이에서 한 거대한 용인족이 걸어 나왔다. 언뜻 보아도 일반 용인족과 같이 보이지 않았다.
피보다 진한 붉은색의 비늘과 회색빛, 용의 뼈로 만든 갑옷과 무구는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모인 이 중 하나인 가웨인에게도 위협적으로 보였다.
용인족이 용의 뼈를 가지고 있는 경우는 하나. 용이 직접 그에게 하사한 것이다. 즉 용에게 신뢰를 받은 용인족이란 뜻이다.
그런데 그 용인족이 앞으로 나서더니 소리쳤다.
“우리의 신이 사라졌다. 인간들은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
알 수 없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