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PTSD… 아닐까요? 악마들이랑 계속해서 싸우셨다고 하셨으니…….”
이지현은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어차피 이들과 같이 가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친해지는 게 좋을 거로 생각했다. 무르기에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으니 말 한마디라도 더 나누면 좋겠지.
게다가 이들은 로스트 월드의 주축이 되는 인물들이다. 친해져서 나쁠 건 없었다.
“…PTSD?”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하는데 정신적 질병으로 보시면 돼요. 트라우마. 그러니깐 고통스러운 기억이 계속 떠오르고 심하면 환각까지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이지현은 세라스의 말을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마기와 사기는 아마 악마들이 내뿜는 기운일 것이다.
최소 그 악마들이 지구에서 날뛰진 않았을 터이니 그리 예상할 뿐이었다.
“걔랑 같이 다니는 대 악마 있잖아. 뭘 한 거 아닐까?”
“그렇다면 김진석 씨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을 텐데요.”
하지만 노라와 다이아는 이지현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 세라스다. 대 악마를 제외하곤 악마들보다 마기와 사기를 다루는데 능숙한 그녀가 착각할 리가 없었다.
“아. 이곳이 김진석 플레이어와 그의 길드원들이 알렉산더의 철갑 기병을 맞닥뜨린 장소이기도 해요. 혹시 그것 때문이 아닐까요?”
자동차는 북한을 지나가고 있었다.
과거 김진석과 이방인 길드가 직접 나서서 알렉산더의 철갑 기병들을 처단한 적이 있었다. 가장 먼저 그들을 맞닥뜨린 장소가 이 근처였다.
이들 셋은 지구에서 김진석의 행보를 가장 궁금해했고 그가 벌인 일을 전부 꿰고 있었다.
“사(死)기는 느껴질 수 있어. 하지만 마(魔)기가 느껴져선 안 돼. 악마가 관여한 건 분명해. 하지만… 무슨 목적인질 모르겠네.”
죽은 자들의 기운은 얼마든지 느껴질 수 있었다. 허나 마기는 악마의 기운이다.
그러나 세라스가 느낀 마기는 극히 미미했다. 일반인조차도 이곳의 마기를 들이마셔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애초에 그녀가 아니었다면 마기가 있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을 거다.
의문이 점점 증폭될 때쯤.
펑!
어디선가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총소리, 고함과 비명이 들려왔다.
“벌써 들리면 안 되는데…….”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이지현의 말과 운전기사의 말이 겹쳤다.
운전기사 또한 B급 플레이어. 뭔가 이상이 생긴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는 자였다. 아직 중국까지 거리는 꽤 남아있었는데 어째서.
“전선이 밀린 것 같습니다. 군인들이 보입니다.”
운전기사가 말하고 있는 와중에도 폭탄이 터지는 소리와 총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더는, 못 갈 것 같습니다.”
“내리죠. 심상치 않아 보입니다. 기사분은 바로 돌아가세요.”
이지현을 비롯해 세 여인도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느끼며 차에서 내렸다.
그녀들을 태우고 온 자동차는 그 길로 바로 돌아갔다. 내리자마자 보이는 것은 하늘의 헬기와 지상의 탱크들이었다.
엄청난 소리를 내며 미사일과 기관총을 저 멀리에 쏟아붓고 있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 같았다. 탱크와 헬기의 화력이 무색하게 밀고 들어오는 몬스터의 숫자와 기세는 아무리 이지현이라도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온몸에 등껍질 비슷한 걸 두른 거북이처럼 생긴 몬스터가 마치 전차처럼 모든 화력을 막아내며 달려오고 있었다.
웬만한 건물보다 큰 거북이 몬스터들의 사이로 여섯 개의 발로 달리는 몬스터가 있었다.
마치 늑대와 비슷한 생김새였지만 찢어진 붉은 눈이 4개가 달렸고 발톱은 발보다 커 어떻게 움직이는지조차 의문이었다.
분명 속도는 늑대 몬스터가 더 빨랐지만 거북이 몬스터를 방패 삼아 달려드는 모습은 조직적이었다.
하늘의 헬기는 거북이 몬스터의 등껍질 뚫린 구멍 사이사이에 이상한 촉수 같은 것이 나오더니 가시를 발사해 견제하고 있었다.
헬기 또한 몬스터의 소재로 만들어 일반 헬기들과 차원이 다른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가시에 정통으로 맞은 헬기는 추락했다.
“별문제 없다메…….”
이지현은 처음으로 루크를 원망했다. 물론 루크도 이렇게 갑자기 일이 벌어진 줄 몰랐겠지만 이지현은 그저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을 뿐.
“신기한 놈들 많네.”
“숫자가 좀 많은데 세라스 씨가 하실래요?”
“뭘 너희는 쉬는 것처럼 말하고 있어.”
그런데 로스트 월드 속 세 명의 여인들은 한가로이 말하고 있었다. 마치 눈앞의 몬스터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익숙한 것처럼.
“사특한 기운은 나중에 알아보지. 지금이 우선이다.”
몬스터들의 기세가 엄청났다. 시간을 조금만 지체하면 얼마든지 사상자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지현이 도끼와 초록색 구두, 칠흑의 가죽 갑옷을 입고 각오를 다질 때.
땅이 울렸다.
퇴각하는 군인들도 몰려드는 몬스터들도 주춤했다. 땅이 마치 지진 난 것처럼 계속해서 부들부들 떨리더니 기어이 갈라지고 있었다.
땅에 균열이 생기자 몬스터들이 멈췄고 군인들은 그사이에 재빨리 태세를 바로 갖추고 전선을 다듬었다.
몬스터들이 고작 땅에 균열이 났다고 멈출 리가 없었다. 눈앞의 인간들을 맹목적으로 죽이려 달려드는데 지진이 대수랴.
놈들은 느낀 것이다. 땅속에 괴물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균열 속에서 거북이 몬스터를 감싸고도 남을 거대한 뼈가 튀어나왔다. 손의 형태를 한 그 뼈는 그 거대한 거북이 몬스터를 손에 쥠과 동시에 몸이 터져나갔다.
탱크와 헬기의 화력을 견딘 거북이 몬스터가 악력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몬스터들은 그 모습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손은 일부에 불과했다. 말 그대로 손이다. 거대한 손은 자신의 몸을 땅속에서 꺼내기 위해 땅을 디뎠다.
이내 보이는 건 빛조차 빨아들일 칠흑과 같은 뼈였다. 신화 속 거인의 모습이 저러할까. 다른 건 살가죽이 전혀 없는 뼈로 된 괴물이라는 것이다.
세라스의 거인. 스켈레톤 가디언이었다.
군인들은 물론이고 이지현의 입마저 떡 벌어졌다.
“세라스… 씨? 당신이 한 건가요……?”
그런데 정작 소환한 세라스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리 크데.”
“저렇게 뼈도 검은색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노라와 다이아도 그 모습에 의문이 들었다.
“…….”
“좋은 게 좋은 거지. 가자고. 그쪽 선생도 가시죠?”
“네? 아… 그렇다고 저기에 들어가는 건 자살 행위 아닌가요?”
노라는 언제부턴가 이지현을 친근하게 선생이라 부르고 있었다.
세라스는 저 모습에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빤히 자신의 가디언을 바라보고 있었고 노라는 그저 더 강해진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지현을 불렀다.
이지현의 걱정도 이해가 갔다. 저 거대한 거인의 뼈가 거북이 몬스터를 단번에 죽였다고 한들 주변에 널린 게 몬스터였다. 고작 거인 하나가 휘어잡을 수 있는 전장이 아니었다.
물론 노라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고 턱짓으로 거인을 가리켰다.
세라스가 소환한 건 가디언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후에 대 악마 비네가 될 인물. 네크로맨서다.
네크로맨서는 절대 혼자서 싸우지 않는다.
균열에서 무언가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건 지상을 뒤덮고도 남을 만큼의 스켈레톤. 그것도 일반 스켈레톤이 아니었다.
갑옷과 무구를 착용한 스켈레톤, 말의 스켈레톤과 그걸 탄 기사 스켈레톤 등. 하나의 군세로 봐도 무방할 스켈레톤들이 지옥에서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우리가 다 합쳐도 저 마귀할멈 하나 이기기 어려울걸?”
김진석이 없어진 로스트 월드. 진작에 악마들에게 멸망 당해도 무방할 정도로 전력의 차이가 났지만 그걸 혼자서 메꾼 인물이 바로 세라스다.
조건만 갖춰지면 대 악마와도 대적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그녀였다.
“저들에게 말해주세요. 오인 사격하지 말아 달라고.”
다이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달려가는 노라였다.
그녀의 목표는 몬스터 사이사이로 보이는 도마뱀의 모습을 한 놈이었다. 이족보행을 하는 도마뱀의 모습으로 흔히 리자드맨으로 불리는 녀석들이었다.
인간과 비견될만한 지능을 가진 이들로 하나의 종족으로서 군집 생활을 한다.
원래라면 신장이 3M는 될법한 거구의 몬스터였지만 놈은 너무나도 작았다. 1M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저 몬스터 무리에서 너무나도 기이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무슨 능력이 있는지 근처 환경에 동화돼 일반인이라면 눈에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노라는 정확히 녀석을 봤다.
그녀의 본능이 속삭이고 있었다. 분명 놈에게 뭔가 있다고.
“저년 말버릇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론 세라스에게서 도망가기 위함도 있었다.
겉모습과 달리 온화한 할머니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세라스였지만 처음으로 험한 말에 이지현은 흠칫 놀랐다. 세라스는 개의치 않고 몬스터 무리로 걸어 들어갔다.
다이아도 마찬가지였다. 엘프였지만 저 스켈레톤 무리와 같은 칠흑의 장궁을 손에 든 채 활시위를 장전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너무나도 익숙해 보였고 동시에 자연스러웠다. 그들의 할 일이 정확히 나뉜 것 같았다. 서로를 향한 신뢰가 없었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에휴.”
한숨을 내쉬는 이지현이었다.
분명 자신은 S급 플레이어다. 어딜 가도 동경할 만한 힘을 가진 인물로 힘겹게 올라왔는데 여기선 찬밥신세였다.
무투대회에서도 이반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하늘 위엔 하늘이 아니라 뭐 우주가 있나? 더럽게 높네, 정말.”
아직도 부족한 이지현이었다.
고개를 저으며 그녀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멍하니 저들을 바라보고 있는 군인들에게 다가갔다.
* * *
해골 군세와 몬스터의 군세가 맞붙었다.
처음은 몬스터의 군세가 우세였다. 애초에 스켈레톤 가디언을 제외하고 질량부터가 밀렸다. 압도적인 크기로 몰아붙이는 거북이 몬스터와 중간중간 해골의 목숨을 취하는 늑대 몬스터까지.
활과 방패, 검, 창 등등 모든 잡다한 무기를 사용하는 스켈레톤이었지만 결국 인간의 형태. 속절없이 밀렸다.
그나마 분전하고 있는 것이 스켈레톤 말을 탄 기사 스켈레톤. 거북이 몬스터에겐 의미 없었지만 늑대 몬스터에겐 놈들이 저승사자였다.
일반 말하고 달랐다. 해골이 된 말. 해골마는 늑대 몬스터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뒷발로 차며 입으로 놈들을 씹었다.
게다가 마치 한 몸처럼 붙어있는 해골마의 기수는 사각에서 덮쳐 들어오는 늑대 몬스터와 새로이 나타난 인간의 몸과 새의 날개가 달린 여성형 몬스터, 하피를 막아냈다.
하피는 세라스가 소환한 까마귀 스켈레톤을 대항하기 위해서인지 어디선가 나타났고 하늘에서는 까마귀 스켈레톤과 하피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거북이 몬스터는 스켈레톤들의 활로 저지하고 창을 든 스켈레톤들이 찔렀다.
늑대 몬스터는 스켈레톤 기사가 보병들에게 달라붙지 못하게 마크하고 있었다.
하피는 까마귀 스켈레톤이 날카로운 부리로 날개를 찢어 기동성을 잃게 하는 등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숫자가 부족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몬스터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개미굴에서 끝없이 쏟아지는 개미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인간들도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난 스켈레톤들을 보고 같은 몬스터인 줄 알았다. 그런데 다른 몬스터랑 싸우는 것을 보고 뒤에서 관망만 하고 있다가 이지현의 말을 듣고 곧바로 가세했다.
속절없이 밀리는 군대의 화력과 전투태세가 갖춰진 지금의 화력은 차원이 달랐다.
전장이 무너져 도망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탱크와 헬기가 몬스터가 몰린 곳에 폭격해 혼란을 가하고 동시에 보병들이 들이닥쳤다.
동시에 어디선가 숨어 인간들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혔던 늑대 몬스터를 정확히 저격하는 저격수도 있었다.
스켈레톤 또한 밀리고 있다는 것이 무색하게 스켈레톤 가디언이 혼자서 전장을 휩쓸고 부서진 스켈레톤들은 그사이에 몸을 재생했다.
결국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몬스터들이 중국으로 도망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