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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최초 플레이어-177화 (177/201)

177화

김진석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무투대회를 전부 보고 있었다.

친목회의 장 이후로 벌써 몇 년이 지났다. 그때 이후로 이렇게 많은 강자가 모인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게다가 레벨만 보는 게 아닌 싸우는 방식까지 볼 수 있었으니 객관적인 판단도 가능했다.

하지만 귀찮은 걸 싫어했던 김진석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무투대회를 바라보고 있던 이유는 하나였다.

지금 그 자신이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완벽에 가까운 몸이었던 김진석의 몸은 이젠 없었다. 넬이 직접 그를 제한했다. 김진석의 싸움방식이 키잔에게 물들었기에 넬이 아예 그를 억제했다.

비네에게 말해 김진석의 몸에 이식했던 피를 다시 빼낸 부작용이 지금의 몸이었다.

여러 피를 김진석의 몸에 여러 번 수혈했기에 이제는 심장에서 수혈한 피가 나오기까지 했고 정말 인간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김진석이었다.

하지만 비네가 강제로 그 피를 빼냄과 동시에 그녀만이 할 수 있을 심장의 시술로 그 피가 더는 나오지 않게 만들었다.

이제는 자신의 심장을 건드리게 해줄 정도로 대 악마들을 믿는 김진석이었다.

문제는 몸의 피가 제대로 나오지 않으니 몸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지금의 몸은 그 부작용 중 하나였다.

지금 김진석 자신이 제대로 힘을 사용하지 못하니 인간들의 힘을 봐야만 했다.

다행히 로스트 월드의 인물. 그것도 자신과 함께했던 믿을 수 있는 이들이 나왔기에 김진석은 한시름 놓았지만 그래도 무시할 순 없었다.

그녀들은 악마들에게 그들의 세계에서 쫓겨났다고 했다. 즉 언제든지 그 악마들이 지구를 침공할 수도 있다는 거다.

“그래도… 엘리온 이사장 님은 과연. 비교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해지셨군.”

결투는 흥미진진했다.

엘리온과 리아즈 칸의 싸움. 리아즈 칸은 화염을 다뤘으며 엘리온은 마법사이지만 불을 주로 다룬다.

둘의 싸움은 완벽한 힘의 대결이었다.

하지만 둘은 싸움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엘리온은 마법으로 불을 다뤘지만 리아즈 칸은 불을 지배했다.

엘리온의 마법은 정해져 있었지만 리아즈 칸은 아니었다.

불을 지배한다지만 엘리온의 마법까지 지배하진 못했지만 흉내 내는 건 가능했다.

화염과 화염이 맞부딪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특히 마지막 엘리온의 궁극기인 메테오. 하늘에서 떨어지는 운석과 리아즈 칸의 거대한 화염의 용이 부딪치는 모습은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모습이겠지.

더 싸울 힘이 남아있는 엘리온이었지만 궁극기인 메테오는 돔의 바깥에서부터 떨어졌기에 판정으로 엘리온은 실격당했다.

자칫했다간 여러 사상자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엘리온도 자신의 실수를 사과하며 돌아갔다.

플레이어들은 메테오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엘리온의 힘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리아즈 칸에게 걸길 잘했네.”

옆에 있던 이지현은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계기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진석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 리아즈 칸이 이길 걸 예상하고 있었다. 힘을 사용하는 효율이 달랐다.

결국엔 먼저 지치는 건 엘리온이 되었겠지.

“…그런데 왜 저를 찾아오셨죠? 다른 사람들도 많을 텐데.”

이지현은 경기장을 눈에 담겠다는 식으로 열렬히 바라보고 있는 김진석에게 물었다.

분명 죽었다고 알려진 김진석이 살아있었고 살아있는 와중에 왜 자신에게 왔을까. 고작 한 번 만났을 뿐인데.

“이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주기 싫어서 말이죠.”

“아…….”

이지현은 김진석을 처음 봤을 때를 잊지 못한다.

거의 오크로 보일 법한 거구와 탄탄한 근육. 풍겨오는 분위기는 칼처럼 날카로웠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겉모습뿐만이 아니었다. 칼이 베일 것만 같은 분위기는 조금이지만 부드러워졌으며 강인한 기운은 비교적 약해졌다.

김진석을 조금이라도 아는 자라면 지금의 김진석이 과거의 김진석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제가 퍼트리면 어떻게 하시려고……?”

이지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연히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분명 김진석은 약해졌다. 하지만 이지현은 도저히 김진석을 이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할 수 있으면 해보세요.”

슬그머니 웃으며 말하는 김진석의 말에 이지현은 멋쩍게 웃으며 넘어갈 뿐이었다.

* * *

엘리온과 리아즈 칸의 결투가 끝난 후.

격이 다른 결투를 먼저 보아서일까. 사람들은 그 뒤로 이어진 결투가 비교적 재미가 없었다. 그나마 마법사 플레이어들이 참가한 결투는 보는 재미가 있었지만 뭔가가 아쉬웠다.

일반인들이 보기엔 눈이 화려하고 즐거웠지만 직접 보러온 플레이어들에겐 아니었다. 생사를 오가는 결투가 아니다 보니 아쉬웠다.

하루 만에 끝날 대진이 아니었고 승자는 또 다른 승자와 붙는 최종 승자를 가리는 대회였기에 사람들은 다음 승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기에 하루에 딱 6시간만 결투를 진행하려고 했지만 황혼 길드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분명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만든 무투대회였지만 가면 갈수록 플레이어들이 진심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10분 내외로 하나의 경기가 끝날 거라 예상했던 결투가 엘리온과 리아즈 칸의 싸움만 거의 1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플레이어들도 워낙 많았고 기대한 바도 크기 때문에 황혼 길드는 어쩔 수 없이 제한을 걸었다.

한 경기당 최대 15분. 그 시간을 넘어선 그때는 즉시 결투를 중단. 경기의 양상을 보고 누가 이겼는지 정하기로 했다.

사람들의 우려가 있었지만 오히려 그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

경기가 15분 이내로 제한되다 보니 플레이어는 짧은 시간에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 했고 그로 인해 오히려 질질 끄는 경기가 사라졌다.

공정하지 않다는 말도 있었지만 대회를 진행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정말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리 큰 상관은 없었다.

황혼 길드 또한 이런 대회를 처음 개최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다시 무투대회가 시작됐다.

그렇게 다음날. 무투대회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시작 경기부터 기대했던 대진이 성사되었다.

* * *

“갔다 올게?”

“조심하세요. 우리랑 같은 다른 세계에서 온 이들입니다.”

다이아는 노라에게 조심하기를 권했다.

이번 대진은 노라였다. 그녀는 악마들과 죽기 살기로 싸우다가 오랜만에 이런 자리라 즐거웠다.

하지만 대상은 무시하기 어려웠다.

이방인 길드의 길드원. 일주일 동안 이 지구란 세계를 알아본 결과 이방인 길드는 이레귤려였다.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이들이었으며 동시에 자신들과 같은 다른 세계에서 온 이들이었다. 그리고 김진석이 직접 모은 이들이다.

노라는 다이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경기장으로 들어갔다.

애초에 노라는 방심할 생각도 없었다. 비록 싸우는 건 본 적이 없지만 그의 기백은 이미 알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구면이지요?”

“맞아. 자신만만하던데 어디 구경 좀 해보자고. 실력을.”

이방인 길드의 가장 공명정대하고 정의로우며 가장 강한 인물. 마피아의 좀비. 이반을 꺾은 기사 가웨인이었다.

경기장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가웨인을 보고 노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물론 용모가 수려한 가웨인 때문이 아니다. 처음 노라가 그를 보았을 때는 평범한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상징하는, 황금의 기사라는 별칭답게 황금색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아름답고 화려했다. 거기다가 투구의 가림새를 올리고 웃는 그의 모습은 그 어떤 여성도 홀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앞에 서 있는 노라는 그에게 느끼는 감정은 하나.

“미안하지만 난 상대를 죽이는 방법밖에 몰라서 말이야.”

“괜찮습니다.”

그리고 가웨인 또한 노라에게 느끼는 감정은 하나.

투지였다.

경기장 안.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둘은 알 수 있었다. 절대 쉽게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노라는 자신의 단검을. 가웨인은 김진석이 찾아준 무기, 갈라틴을 꽉 쥐고 투지를 불태웠다.

* * *

“…보고도 믿기지 않을 만큼 강해졌군요.”

김진석은 로스트 월드에서 노라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한다. 용병 중에서도 눈에 띄게 강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원래 게임 속에선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비중이 없는 NPC였다. 즉 한계가 뚜렷하다는 뜻이었다.

그때의 노라를 과연 누가 지금의 노라와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할까.

가웨인은 김진석이 사라지고 난 이후에도 끊임없이 몬스터를 잡으며 성장했고 지금에서는 이방인 길드를 믿고 맡길 만한 자가 되었다.

인성도 성품도 무엇하나 빠지는 게 없는 완벽한 기사였고 심지어 젊기까지 했다.

김진석은 처음엔 당연히 노라가 질 거라 예상했다. 그 가웨인이다. 신화 속 인물이나 다름없는 기사였다.

게다가 상성조차 좋지 못했다.

노라의 스킬은 파괴력이 뛰어났지만 가웨인의 황금 갑옷은 레어마켓에서 모글레이나 리딜과 같은 수준의 갑옷이었다.

게다가 그의 무기. 보구. 갈라틴 또한 신화 속 물건이다.

몸, 아이템, 경험. 뭐 하나 노라가 그보다 뛰어난 게 없었다. 하지만 경험 중에서 노라가 유일하게 가웨인을 뛰어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강자와의 싸움이다.

로스트 월드에서 NPC들은 전부 자신보다 레벨이 높은 몬스터, 악마와 싸운다. 플레이어가 없었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죽을 목숨이었겠지.

하지만 플레이어. 김진석이 사라진 후에 악마와의 침공에서 저들은 살아남았다. 비록 파괴되고 망가졌을지언정 저들은 살아남았다. 그 괴물 같은 악마들에게서.

첫 일격에 가웨인은 흠칫 놀랐다.

노라는 순간 폭발적으로 달려들며 단검을 두 개를 동시에 던졌다. 하나의 궤적은 이상했지만 다른 하나는 정확히 가웨인의 목을 향했다.

가웨인은 갈라틴으로 단검을 쳐냈다. 분명 쳐냈는데 목 뒤에서 뭔가 튕겨 나가는. 텅! 소리가 들렸다.

전혀 다른 궤적을 향해 날아가던 단검이 가웨인이 쳐낸 단검을 다시 한번 쳐내며 정확히 목 뒤를 노린 것이다.

갑옷의 취약점. 갑옷과 갑옷의 이음새였다.

하지만 가웨인의 황금 갑옷은 그 조그마한 틈도 놓치지 않았고 단검을 튕겨냈다.

기행. 아니 미래 예지나 다름없는 기예였다.

“꼭 단검을 던지면 머리 위로 쳐내더라?”

쳐낼 능력이 있는 자들은 대부분 그리했다. 그걸 노리고 던진 단검이었지만 아쉽게도 갑옷에 통하지 않았다.

흠칫 놀란 가웨인이었지만 노라는 시간을 주지 않았다.

노라의 주 무기는 단검. 가웨인이 든 갈라틴에 비교하면 짧은 사정거리를 가지고 있었기에 달라붙어야 했다.

그 흠칫 놀란 찰나의 시간을 노라는 놓치지 않고 거리를 좁혔다.

살수. 가웨인과 같은 기사라면 혐오할 만한 인물이었지만 그는 처음부터 그녀를 인정했다. 그녀의 손속엔 자신을 죽이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거짓말에 능하시군요.”

“원래 우리가 그런 족속이라 말이지……!”

노라의 기예를 본 가웨인은 거리를 좁히는 노라를 보며 보답하기로 했다.

“갈라틴!”

가웨인은 갑자기 보구의 이름을 외치며 자신의 검을 하늘로 던져올렸다.

갈라틴은 마법사들이 만든 마법진의 돔 끝에 다다르더니 눈이 멀 것만 같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노라조차도 눈을 찡그릴 정도로 빛난 갈라틴은 동그란 구의 형태로 변했다.

돔 밖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갈라틴을 보고, 돔 안에 새로이 생겨난 태양과 같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가웨인의 발밑에서 마법진이 생기더니 땅이 흔들리며 그 안에서 새로운 갈라틴이 떠오르고 있었다.

달려들던 노라도 흔들려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그 상황에서 가웨인은 고고하게 떠오른 갈라틴을 잡고 살짝 휘둘렀다.

그러자 검의 궤적엔 화염이 피어올랐다.

“화염의 검. 갈라틴.”

김진석은 저 보구의 진명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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