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무투대회를 보기 위해 다른 나라에서 한국까지 오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인기가 엄청 컸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혹시 모를 전투의 여파로 출입을 금지했고 그들은 따로 송출되는 카메라로 경기를 지켜볼 수 있었다.
즉 플레이어들 수천이 모인 경기장 안에서 결투를 진행한다는 뜻이었다.
“토할 것 같은데.”
아무리 S급 플레이어라곤 하지만 이렇게 많은 플레이어 앞에 설 자리가 언제 있겠는가. 게다가 자신은 이 중에서 그리 강한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지현이 토할 것 같다고 말한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대진표는 이미 짜여 있었다. 그리고 이지현은 하필 대회의 막을 여는 첫 번째 대진이었고 그 상대도 문제가 있었다.
이지현은 한숨을 내쉬며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경기장 안 관중의 환호 소리가 들렸다. 하나같이 전부 플레이어인 그들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렸다.
고작 S급 플레이어가 나왔다고 저들이 저렇게 환호할 리 없었다. 이 대회에서 개나 소나 S급 플레이어였으니깐.
저들이 소리친 이유는 눈앞의 대상에게 있었다.
“황혼 길드의 길드원인가. 이반이라고 한다.”
“…이지현이에요.”
마피아의 좀비. 최상위 S급 플레이어 이반이 그녀의 첫 상대였다.
이반은 과거 김진석이 사라진 직후. 슬금슬금 활동을 시작하려다가 가웨인에게 된통 당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이반은 가웨인에 상대가 안 됐다.
계속해서 재생한다면 계속해서 베면 될 일. 가웨인이 직접 한 말이었다. 상대가 재생하지 못할 때까지 이반을 베고 또 벤 가웨인은 기어이 이반을 죽이기 직전까지 몰아세웠다.
하지만 가웨인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길드장 님이 당신을 살려준 이유가 있겠죠.”
오로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이반을 살려주었다. 이반은 그 굴욕감을 잊을 수 없었다. 이반은 가웨인이 참가한다는 이 무투대회에 그와 싸우기 위해서 참가한 것이다.
눈앞의 이지현은 그저 그에게 가기 위한 발걸음일 뿐이었다.
“…이 정도면 길드장 님도 뭐라 안 하시겠지.”
그 상대가 리아즈 칸에게도 밀리지 않는 이반이다. 아무리 루크에게서 얻은 레어마켓의 도끼가 있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래도 허무하게 지고 싶진 않았기에 이지현은 도끼를 손에 꽉 쥔 채 결의를 다졌다.
* * *
“이 지구란 세계의 인간도 나쁘지 않네. 저렇게 기량 차이가 크게 나는 데도 포기하지 않는다니.”
노라는 첫 경기인 이지현과 이반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로스트 월드에서 온 이들 전부가 그들에겐 처음 보는 기계인 TV를 통해 지켜보고 있었다.
마법과 같은 일이었지만 애초에 마법이 있는 세계에서 온 이들이다 보니 TV를 그렇게 신기하게 쳐다보진 않았다.
이지현과 이반의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이지현이 아무리 때리고 부수고 살을 깎아내고 별짓을 다 하더라도 이반은 재생했다. 그녀의 싸움방식은 김진석과 비슷해 보였다.
맞지 않고 싸우기. 게임 속에서나 할 수 있을 법한 그 방법은 이지현의 몸놀림으로 현실에서도 할 수 있다고 증명하고 있었다.
으레 사람들이 대부분 다 그러겠지만 그녀는 고통을 싫어했다. 게임 속 세계에서 식인종에게 끔찍하게 당한 적이 있는 그녀는 더더욱.
그렇다면 그녀가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상대의 공격이 그녀에게 닿지 않으면 됐다.
게임 속 세계로 들어가기 전 평범한 회사원이었지만 조금이나마 체조를 배운 적이 있던 그녀는 유연한 몸놀림으로 몬스터의 공격을 피해왔다.
처음엔 그 이반과 대등하게 싸우는 것 같이 보였다. 아니 오히려 압도하는 듯보였다.
이반의 공격이 닿지 않고 그녀의 공격만 성공하고 있었으니깐. 하지만 이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분명 신체 능력은 이반이 훨씬 뛰어난데 이지현은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하니 결국 이반은 또 하나의 능력을 사용해야 했다.
시체 소환. 그때부터 일방적인 싸움이 지속 되었다.
이지현의 가장 큰 단점은 내구력. 이반이 나설 것도 없이 시체들만으로 이지현은 벅찼고 이반이 소환한 시체는 웬만한 A급 플레이어 수준이었다.
결국 이지현이 항복하며 결투는 마무리됐다.
원래라면 훨씬 빠르게 끝났을 터이지만 죽이면 안 되는 규칙으로 인해 이반의 힘이 많이 제한되어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아마 귀찮게 하는 이지현은 진작 여러 번 죽었을 거다.
“저 남자. 우리로 치면 아디스에 속한 인물이라는 것 같은데.”
“알고 있잖아요? 저들을 멸절할 순 없다는 것을.”
아무리 용병인 노라였지만 선이 있었다.
이미 지구란 세계의 지식을 습득한 그녀는 이반이 좋게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고 이런 행사에 당당히 나오는 것부터가 이해가 안 되는데.”
“…노라. 괜한 생각하지 마세요. 힘이 전부인 세계가 아니에요.”
다이아는 노라의 성정을 알고 있다. 비록 용병으로 나고 자란 그녀였지만. 아니 오히려 용병으로 자랐기에 마피아들의 행보를 이미 알고 있는 노라가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괜찮아. 합법적으로 할 테니깐. 사람이 실수도 할 수 있지. 안 그래?”
어차피 결투는 진행되고 있고 노라도 이반과 마찬가지로 무투대회에 참가했다. 아직 첫 대진이라 잘 모르겠지만 이반과 같은 힘을 가진 자는 그리 많지 않겠지.
분명 만나게 될 거다.
“그런데 이 자식은 도대체 언제 올 거야?”
* * *
“하… 너무 꼴사납게 진 거 아닌가, 모르겠네.”
이지현은 따로 마련된 의무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처음엔 이반이 놀아줬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의 시체들에게 너무 일방적으로 당했다.
시체에게 몸이 뜯겼을 때 게임 속에서 식인종에게 느꼈던 트라우마가 다시 도질 뻔했다.
“아니에요. 멋있었어요.”
“…빈말이라도 감사합니다. 오늘 고생 좀 하시겠네요.”
그녀에게 대화를 건 자는 의무실에 배치된 힐러 플레이어였다.
이방인 길드가 영국 레드 크로스 길드에게 도움을 요청해 힐러 플레이어를 다수 배치한 것이다.
이지현은 오늘 수많은 결투가 있을 텐데 하필 이곳에 온 힐러 플레이어가 안타까웠다. 하지만 정작 힐러 플레이어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저희도 실시간으로 싸움을 구경할 수 있는걸요?”
플레이어들 대부분이 무투대회를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모이는 와중에 그들은 그저 힐만 해주면 공짜로 볼 수 있었으니깐.
이지현은 이제는 자신도 같은 입장이었기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다 됐어요. 저희도 힘을 아껴야 해서 나머지는 알아서 치료하세요.”
무책임한 말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이 치료할 자들은 최소 S급 플레이어 이상. 일반인과는 격이 다른 몸을 가지고 있었으니 최소한의 상처만을 치료한 채 보내는 것이다.
다행히 이지현은 먼저 항복 선언을 해서 상처가 그리 크지 않았기에 이지현은 감사하단 말과 함께 의무실에서 나갔다.
이젠 그녀도 관중이었다.
“나도 구경하러 가야지~”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이지현이었다.
“같이 구경하시겠습니까?”
“…응?”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지현의 외모는 아름답다. 헌팅 당하는 건 원래부터 자주 있었던 일이었지만 S급 플레이어가 되고 나서는 처음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키는 눈에 띌 정도로 컸지만 몸이 비쩍 말라 있었다. 하지만 옷의 바깥으로도 보이는 근육은 기이했다.
마치 원래 있었던 근육을 강제로 빼면 저렇게 되는 것일까. 지방 흡입 수술이 아니라 근육 흡입 수술이 만약 있고 그 시술을 받으면 저런 모양새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았다. 그의 얼굴 또한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누구…?”
“하하… 오랜만이군요. 이지현 플레이어.”
멋쩍게 웃으며 답하는 남자는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애초에 둘은 첫 만남 이후로 만난 적이 거의 없으니깐.
“…설마 당신은……?!”
* * *
수많은 결투가 지나갔다.
첫 번째 대진부터 이반이 나와서 그런지 생각보다 이후에 나온 대진 대부분이 재미가 없었다. 그나마 로스트 월드의 인물 몇몇이 나오긴 했지만 그들은 기껏해야 A급에서 S급 플레이어 수준이었다.
그렇게 재미없는 대진이 지나가고. 드디어 사람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결투가 눈앞에 다가왔다.
마법사들이 경기장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자를 보고 경기장에 친 마법 돔을 더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리아즈 칸. 인도 왕자이며 최강의 플레이어라고 논할 만한 자가 경기장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일방적인 경기가 될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리아즈 칸의 상대는 힘이 알려지지 않은 자. 로스트 월드에서 온 인물이었다.
“반갑군. 리아즈 칸이라고 한다.”
서로를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닌 천선전. 친목을 도모하고 서로의 힘을 알아보기 위해 만들어진 결투이기에 리아즈 칸은 먼저 악수를 건넸다.
로스트 월드에서 온 인물. 인간은 아니었다. 로브를 입은 그 남성의 드러난 얼굴에는 귀가 뾰족했다.
엘프. 로브와 손에 든 지팡이를 보면 마법사로 보였다.
“반갑네. 엘리온이라고 하네.”
엘프 남성의 말에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엘리온. 로스트 월드를 아는 자라면 대부분 아는 NPC다. 칼라 기사 학교의 이사장이었으며 그만한 무력을 가진 자.
하지만 그건 게임 속에서의 이야기다.
“당신. 유명인물이군요.”
“이 세계에 난 처음 오는데 말이지. 허나 자네만 하겠나? 자네가 나올 때의 함성은 아직도 귀에서 울리는 것 같은데 말이야.”
리아즈 칸은 플레이어들의 반응을 보고 방심이란 단어를 머리에서 없앴다. 그건 엘리온도 마찬가지. 지구의 인간들의 강함에 놀란 반면 리아즈 칸은 그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함부로 누가 이긴다고 점칠 수 없었다.
* * *
“…누가 이길 것 같나요?”
이지현은 비쩍 말랐지만 근육은 가득 찬 기이한 남자에게 물었다.
황혼 길드는 자신들이 주최한 무투대회였고 보기만 하는 건 분명 아쉬울 수 있으니 도박과 비슷한 걸 하나 만들었다.
도박의 룰은 간단했다. 누가 이길지 맞추는 것.
하지만 자신의 돈을 거는 것이 아니었다. 포인트 제도로 누가 이기고 질지 맞춘다면 포인트가 주어지고 일정 이상 포인트부터 보상이 있었다.
게다가 그 보상은 레어마켓에서 만든 아이템이었으니.
레어마켓의 CEO가 로스트 월드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지 오래.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이들이 살아 숨 쉬는 모습을 보기 위해 많은 걸 준비했다.
도박에서 리스크를 뺀 사실상 이득만 있는 도박이었다.
이지현도 마찬가지로 참여했다. 당연히 자신이 치루는 경기를 제외하고 선택할 수 있었지만 로스트 월드에서 온 이들의 힘을 알지 못하였으니.
50%의 확률인데도 불구하고 워낙 운이 없어서일까 연전연패였다.
그런데 그 도박은 이 경기를 보기 위해 온 자들과 참여한 자들만이 할 수 있었고 이지현의 옆에 얌전히 앉아있는 남자는 참가자격이 없었다.
즉 그녀의 옆에 있을 자격이 없다는 소리였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남자에게 적극적으로 물어보았다.
이지현이 하도 못 맞추자 보다 못한 남자가 몇 번 조언을 해주었고 그 조언을 받아들인 이지현의 포인트는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물론 모든 걸 맞추는 건 아니었지만 확률만 따지고 보면 적어도 90% 이상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도 장담할 수 없었다.
“모르겠군요. 제가 알던 그보다 훨씬 강해졌기에.”
리아즈 칸은 물론이고 로스트 월드에서 온 인물인 엘리온조차도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한 남자였다.
“…도대체 어디 있다 뭘 하고 오신 건가요? 사람들 대부분이 당신 죽은 줄 알 텐데.”
“많은 사정이 있었죠.”
비쩍 말랐지만 근육은 가득 찬 기이한 남자. 그의 이름은 김진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