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마취가 안 통하니 그냥 해야겠는데.”
“내게 독이 있습니다. 아주 강력한 신경독이긴 한데 이분에게 통할지 의문입니다.”
비네는 곧바로 수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김진석은 여전히 마취가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포메트에게 몬스터에게서 입수한 신경독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김진석에게 통할지는 의문이었다. 아니 당연히 통하지 않겠지만 지금의 김진석은 전혀 평범한 상황이 아니었다.
“기절한 상태인데 그냥 하면 안 되나?”
“그러다가 일어나서 움직이기라도 하면 어쩌게.”
세피드의 물음에 비네는 단호하게 답했지만 그녀도 방법이 없는 건 그대로였다. 한숨을 푹 쉬며 바포메트에게 부탁했다.
“신경독… 한 번 해보자. 설마 독 가지고 죽겠어?”
그렇게 말하는 비네도. 주변 다른 대 악마들도. 공통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남자를 이렇게 만든 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 * *
“으음…….”
신음과 함께 일어난 김진석은 곧바로 자신의 팔을 바라봤다.
“다른 팔이라도 붙여달라고 할라 했는데 다행이군.”
“그런 농담이 나오나요?”
옆에서 지키고 있던 비네는 일어나자마자 하는 그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사실 비네와 바포메트는 딱히 뭔가 한 게 없었다. 바포메트가 신경독을 주사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비네는 팔을 꿰맸다.
그 이후부터는 김진석의 재생력에게 달렸다.
도대체 어디서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몸에 피조차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부족했다. 이미 악마의 피를 수혈한 그였으니 넬을 비롯한 대 악마들의 피를 뽑아 김진석에게 수혈했다.
그 이후에 몸에 박힌 화살을 조심스럽게 뽑음과 동시에 쏟아지는 피를 세피드가 직접 막았다.
넬이 비네가 만든 포션을 김진석의 입에 직접 넣어주고 있었지만 여전히 김진석은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발작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김진석의 몸이 안정을 되찾으면서 이내 몸이 할 일을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가 깨어난 것이다.
“미안하군.”
“미안하면 설명 좀 해봐요. 지금껏 어디서 뭘 하고 있었기에 그런 상처를 입고 돌아온 거죠? 그것도 당신이?”
“…애들 데려와. 너한테만 알려줄 일이 아니라서.”
“이미 오고 있을 거예요.”
비네는 김진석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길래 왜 대 악마들을 다 부르는 것일까. 그게 궁금했다.
* * *
“그게 무슨 말이지. 카이.”
김진석은 카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키잔 때문에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왔다니. 정작 그는 보이지도 않았고 이 폐허는 어딘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시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곳은 당신이 알고 있는 세계. 로스트 월드입니다.”
“…뭐?”
당연히 김진석은 로스트 월드를 게임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전 지역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로스트 월드에 이런 다 부서진 폐허 같은 데는 없었다.
그리고 피가 말라붙어 새까맣게 변한 이곳은 검은 대지와 똑같았지만 검은 대지에는 이런 건물 같은 게 아예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었다.
바로 앉아있는 이 의자. 다 무너져가는 이 폐허에서 가져온 것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문양까지 그려져 있는 고급스러운 의자.
김진석은 분명 이 문양을 알고 있었다.
“칼라 성이에요. 여기.”
칼라 성의 문양. 마엔의 말대로 이곳은 칼라 성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키잔이 벌인 일입니다.”
카이의 발언은 충격적이었다.
“키잔은 자신의 스킬을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스킬인 광기에 점점 잠식되었으며 결국 폭주했습니다. 그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마엔은 김진석이 애정을 가지고 키우긴 했지만 카이 만큼은 아니었다. 카이는 김진석의 애정을 듬뿍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캐릭 자체의 성능이 그리 좋지 못했다.
하지만 키잔은 달랐다.
게임 좀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아무리 캐릭이 재미가 없고 뭘 하든 성능이 좋으면 저절로 애정이 생겨난다.
게다가 생각보다 캐릭터 또한 재밌어서 김진석이 꽤나 재밌게 키운 키잔. 하지만 현실로 들어선 그는 광기를 제어할 수 없었다.
광기. 김진석 또한 그 스킬을 처음 사용할 때 이성을 잃었었다.
그 이후로 정말 위험할 때만 사용하는 스킬이었고 만약 주변에 동료나 다른 자들이 있었다면 그들도 무사하지 못했을 거다.
지금에서야 그 스킬을 완벽히 제어할 수 있었다.
“저희는 그를 돌려놓으려고 노력했지만 불가능했습니다. 점점 더 광기에 물들어 몬스터만을 향했던 그 광기는 인간들에게도 향했죠. 결국, 저희는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키잔이라도 마엔과 카이의 협공에는 버틸 수 없었던 것 같았다. 그들은 그들의 형제나 다름없는 키잔을 죽일 때 무슨 감정이었을지 김진석은 알 수 없었다.
무덤덤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흘러나오는 슬픔의 감정은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광기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붉은색 연기는 공기 중으로 사라져 저희 또한 사라진 줄 알았습니다만…….”
“그게 나한테 있단 말이겠군.”
실제로 로스트 월드 속에서 키잔의 직업인 버서커를 가진 자는 아무도 없었다. 광기를 사용하는 자도 한 명뿐이라는 거다.
카이의 세계에선 키잔. 그리고 김진석의 세계에선 김진석이.
그제야 김진석은 이들의 의중을 알 수 있었다.
“날 죽이겠단 소리인가.”
“…당신도 알고 있을 겁니다. 광기란 스킬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카이는 광기의 스킬의 위험성을 이미 알고 있었다. 스킬을 쓰면 쓸수록 광기에 잠식당하며 결국 이성을 잃고 괴물이 된다.
스킬을 사용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 스킬로 인해 얻는 힘은 한번 중독되면 끊을 수 없었으니.
“그동안 날 지켜봤으면 알 텐데. 난 다르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성을 잃지 않는다는 걸. 오히려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점점 안정되더군요. 하지만 보면 볼수록 저희는 알 수 있었습니다.”
카이의 세계는 김진석의 세계와 전혀 달랐다.
김진석은 처음부터 천천히 성장했던 거와 달리 이들은 이미 완성되어있었다.
김진석에게 시간이란 성장할 수 있는 기회였지만 그들에게는 악마의 침공을 기다리는 것이었으니.
처음부터 셋이었던 그들은 서로를 의지한 채 몬스터와 악마들을 해쳐나갔다.
“광기에 잠식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광기에 잠식당한 키잔에게 잠식당하고 있습니다. 본인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성격이 바뀌며 행동거지가 변하고 있습니다.”
웬 헛소리라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김진석은 무시할 수 없었다.
어느 새부터인가 무시하고 있었던, 신경 쓰지 않았던 하나.
[키잔과의 동기화율 95%]
카이와의 동기화율은 언제부턴가 뚝 끊겨 올라가지 않고 있었지만 키잔과의 동기화율은 야금야금 올라가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활과 단검보다 대검을 더 자주 사용했고 광기 스킬은 거의 패시브 스킬처럼 사용했었다. 싸움을 즐기고 있었으며 강한 상대를 만날수록 즐거워했다.
그건 드미트리를 상대할 때 더욱 심화 되었다.
“최근엔 그의 말버릇까지 따라 하시더군요.”
게임 속에선 대부분 스킬을 사용할 때 기합이나 말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키잔의 직업. 버서커는 싸움을 좋아하는 광전사답게 스킬을 사용한 직후. ‘즐겁다’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그때. 붉은 원피스를 입은 마엔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며 말했다.
“저희도 알고 있어요. 저희가 있던 세계가 한낱 게임이었으며 유흥거리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하지만 원망하진 않아요. 뭐가 어찌 됐든 저희를 키워주셨으니깐요.”
카이와 마엔은 지구에서 지내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부 알고 있었다.
“우릴 키워주신 분이 키잔과 같이 변하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마엔과 마찬가지로 카이가 일어나며 말했다.
카이의 손엔 검은 연기와 같은 활이. 마엔의 손엔 피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뚝뚝 흐르는 단검이 들려있었다.
“내가 버틴다는 보장은 없나?”
“그랬다면 키잔을 죽이지 않았을 겁니다.”
당연하다.
그들의 형제와 같은 키잔을 죽이기 전에 과연 그들이 아무것도 알아보지 않았을까. 비통한 감정을 숨기지 않은 채 카이와 마엔은 말했다.
“얼굴을 봐서 즐거웠습니다. 아버지.”
“얼굴을 봐서 즐거웠어요. 아버지.”
* * *
“역겨웠다. 싸우면서 처음으로 역겹다는 감정이 느껴졌어.”
카이와 마엔. 김진석은 절대 좋아서 싸우는 게 아니었다.
카이와 마엔은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와 같은 자를 죽이기 위해 싸우는 것이었고.
김진석은 애정을 갖고 키운, 자식과 같은 녀석들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것이었다.
“…죽이셨습니까?”
대 악마들 전원이 궁금한 것을 세피드가 대표로 물어보았다.
김진석에겐 자식과 같은 이들이었겠지만 대 악마들에겐 자신들을 수도 없이 죽인 이들이었다. 차마 그걸 대놓고 물어볼 수 없었기에 눈치만 보고 있었다가 세피드가 대표로 물어본 것이다.
“…그래.”
자신이 직접 키운 캐릭터들을 자신이 직접 죽여야 하는 순간은 김진석은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때 단탈리온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김진석을 지구로 돌려다 주었다.
“그런데… 시간이 그렇게나 지났다고?”
김진석은 오랫동안 카이와 마엔과 사투를 벌였다.
하지만 그건 고작 며칠이었지 이렇게 몇 년이 지난 건 아니었다.
“시간의 뒤틀림이 있는 것 같군요. 다른 세계로 가는 일은 자중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세피드의 말에 김진석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만약 녀석들의 말이 맞다면 난 키잔과 동화되겠지. 그 해결법을 찾아야 한다.”
카이와 마엔은 키잔을 되돌려놓기 위해 모든 방법을 찾아봤다.
금기시되는 것까지 전부.
그건 로스트 월드에서부터 지구에서까지 적용되었다. 카이와 마엔은 김진석이 지구에 돌아왔을 그때부터 그를 바라보았고 찾아보았다.
키잔에게서 벗어날 방법을 말이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고 결국 그들은 김진석을 죽여야 한다는. 비통한 결론에 다다랐다. 그렇다면 해결책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단탈리온을 찾아라.”
이 세상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악마. 단탈리온. 아마 그라면 해결책을 알고 있을 거다.
“그때까지는 힘을 최대한 아끼세요.”
넬의 걱정 어린 말에 김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하…….”
이지현은 한숨이 나왔다.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한테까지 왔구나…….”
“이지현 플레이어. 준비하세요.”
전 세계에 새로운 플레이어가 나날이 증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도 있었으니 그들이 어떤 세계에 들어가서 튜토리얼을 진행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생겨난 것이 바로 현직 플레이어의 강의.
게임 세계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어떤 일이 있는지. 기본적으로 3번의 목숨이 있고 등등. 그리고 그걸 가장 잘 아는 자는 당연히도 S급 플레이어 이상이었다.
총이 보급된 이후 친목회의 장이 쓸모가 없어진 지금. 그들은 새로운 플레이어를 위해 강의를 진행해야 했다.
특히 스킬북의 존재로 인해 돈이 많은 플레이어는 일반적인 플레이어보다 훨씬 더 강해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졸부의 자식들이 플레이어가 되기 위해 강의를 듣고 플레이어가 돼 스킬북을 사서 강해지려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이지현과 같은 S급 플레이어는 강의 한 번 할 때마다 꽤 돈이 짭짤했다. 물론 하긴 싫었지만 이지현인 지금 돈이 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