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제가 갈게요.”
“좋군. 더 있나?”
이지현이 대표로 다른 세계에서 온 이들에게 가기로 정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녀의 감이 김진석을 처음 만났을 때와 느낌이 지금도 느껴지고 있었기에. 그것이 전부였다.
“나도 갈게. 아니… 우리가 가길 원했던 건 같은데?”
“요즘 눈치가 늘었습니다. 길드장 님.”
그리고 한 명 더. 황혼 길드의 길드장. 이미리였다.
그녀는 이지현과 달리 김진석과 직접적인 연이 있었다. 하지만 루크는 그들이 말하길 기다렸다는 것처럼 행동했다.
“급히 소집해서 미안하군. 안 가는 자들은 이제 나가보게.”
이지현과 이미리를 제외하고 다른 플레이어들은 고개를 숙이며 사무실에서 나갔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저도 가도 되죠?”
“…이설 플레이어?”
단 3명뿐인 최상위 S급 플레이어 중 하나. 이현의 동생 이설이었다.
과거. 이현의 도움 요청에 직접 서울에 들어가서 구해준 플레이어였다. 그리고 김진석이 강제 아닌 강제로 황혼 길드에 들어가라고 말했었다.
덕분에 최상위 S급 플레이어를 받아들인 황혼 길드였다.
하지만 이현과 MIA 때문에 덩달아 그의 동생인 이설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플레이어였으니. 그래도 그녀는 다른 최상위 S급 플레이어들처럼 거들먹거리지도 않고 루크의 말은 웬만하면 잘 따라주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뭔가 주도적으로 하는 건 없었다. 서울에서의 생활 때문에 몬스터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이설이 먼저 나섰다.
“굳이 김진석 플레이어란 이름을 꺼낸 이유가 있죠?”
루크가 정확한 위치를 말한 것이 아닌 김진석의 얘기를 꺼냈다. 분명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로스트 월드에서 나온 이들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김진석 플레이어를 이미 알고 있더군요.”
그의 말에 이지현과 이미리, 그리고 이설은 깜짝 놀랐다.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나온다는 건 전의 사건으로 인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플레이어를 알고 있는 자가 나온다? 심지어 플레이어란 존재가 아닌 하나의 인물인 김진석을 알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는 자는 이방인 길드와 저희뿐입니다. 알려지면 혼란이 올 수도 있으니 함구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 *
이미리와 이지현, 이설은 이방인 길드의 길드원을 만났다.
“반갑습니다. 가웨인이라고 합니다.”
셋 또한 유명한 인물이었지만 눈앞의 가웨인 만큼은 아니었다. 이방인 길드의 가웨인. 김진석이 사라지고 난 이후 최강이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실제로 마피아가 김진석이 사라지자 슬금슬금 기어 나오려고 할 때 가웨인. 그가 단독으로 혼자 나서서 박살 냈다.
플레이어 이명. 좀비 이반조차도 가웨인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저들은 자신의 세계의 악마들이 출몰해 이 세계. 지구로 도망 왔다고 합니다.”
이설은 로스트 월드의 세계관을 대충 알고 있었다. 악마들이 그들의 세계를 침공해 플레이어가 나서서 그것을 막는 이야기.
하지만 플레이어가 없어지니 당연히 그들은 전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고 지금처럼 도망 온 것이다.
그런데 듣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그럼 저희를 왜 부르셨죠? 이미 다 알고 있으신 것 같은데…….”
사교성과 말주변이 부족하다는 등. 그들이 알고 있는 사실과 달랐다.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저들은 이방인 길드와 같은 다른 세계에서 온 이들이었다.
지구의 인간을 향해 경계하고 있었지만 그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세계에서 온 이들에게까지는 아니었다.
게다가 먼저 저쪽에서 화합을 부탁했으니.
“저들은 길드장 님을 잘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아무리 저희라도 그에 대해선 잘 모르기에…….”
즉. 김진석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를 부른 것이다.
물론 불려온 셋이라고 잘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같은 길드원인 그들이 잘 모른다는 게 더 어이가 없었지만 그 김진석을 생각해보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방인 길드도 사라진 김진석의 소재를 찾고 있었을 테니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겠지.
이현과 이설. 그리고 이미리는 먼저 앞에 나서서 대화하고 있는 이방인 길드의 부 길드장. 제이다를 향해 걸어갔다.
“…뭐? 녀석이 죽었다고?”
“실종된 상태이긴 합니다만… 사실상 죽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하… 그 새끼. 기어이 혼자 나대다 죽었구나?”
김진석에 대해 험한 욕을 하는 여성은 붉은 머리에 얼굴엔 큰 흉터가 나 있었다. 과감한 옷차림새와 허리춤에 단검은 게임 속 세계에서 그녀가 용병이란 걸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설은 이상했다. 로스트 월드에서 유명한 용병은 단 한 명뿐이었다. 용병왕 리차드. 용병에서 여성은 없었다.
로스트 월드에서 유명한 여성은 따로 있었다. 용병 여성 옆에 있는 엘프 여성.
“야. 넌 별 감정도 없냐? 다이아?”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거잖아요. 그 사람이 말도 없이 사라지는 거 한두 번도 아니고.”
다이아.
그녀는 악마들이 로스트 월드를 침공했을 때도 끝까지 살아남은 인물이었다. 아마 로스트 월드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자라면 그녀의 얼굴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정말 로스트 월드 속 인물들이었다.
제이다는 눈앞의 여성. 노라와 대화를 끝마치고 뒤에 이름 모를 회색빛의 머리를 가진 아름다운 여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세라스 씨. 무슨 일 있으세요?”
다이아는 회색빛의 머리를 가진 여성. 세라스의 안색이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했다.
“왜… 이곳에서도 마기가 느껴지는 거지? 설마 여기도 악마가 나타났나요?”
“악마는… 듣도보도 못했습니다만.”
그동안 알 수 없는 상황에 가만히 있던 이지현이 세라스의 말에 답했다.
마기에 민감한. 아니 마기를 받아들여 힘을 사용하는 세라스는 이 지구라는 세계에서 마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진득하게.
하지만 이들은 전혀 모르는 듯했다. 이상했다. 분명 이렇게 진한 마기라면 일반인도 알 수 있을 수준일 텐데.
제이다는 그들과의 얘기를 끝내고 지원 온 3명의 여성을 반겼다.
“다들 와주셔서 고마워요. 우선 이들과 얘기를 끝냈어요. 저희 길드에서 이들을 맡기로. 하지만 이들은 길드장 님을 찾고 계시더군요. 혹시 아시는 게 있을까 싶어 황혼 길드에 도움을 요청한 거예요.”
이방인 길드는 꿋꿋이 믿고 있었다. 김진석이 절대 죽을 인물은 아니라는 것을.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그 믿음이 조금이나마 흔들렸지만 눈앞의 로스트 월드에서 나온 이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김진석은 무슨 일이 있을 때 항상 혼자서 사라졌다고 한다.
어쩌면 그가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로스트 월드 속에서 나온 이들은 김진석과 각별한 사이인 것 같았다.
“그래서. 걔는 여기서 뭘 했어요? 아니 원래 여기 출신이라고 했나? 어쩐지 행동거지가 이상하더라니…….”
“그의 비정상적인 성장이 그것 때문일까요?”
과감한 옷차림새인 적발의 여성과 흔히 게임 속에서 볼 수 있는 긴 귀를 가진 아름다운 엘프 여성은 특히 김진석을 편안하게 부르고 있었다.
“김진석 플레이어랑 무슨 사이셨나요?”
그때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건 이미리였다.
김진석을 조금이라도 아는 자라면 절대 쉽게 사람과의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너무나도 친근하게 김진석을 부르고 있었다.
“어… 무슨 사이라고 묻는다면…….”
“선생과 제자… 일까요?”
정작 이들도 자신이 하는 말에 확신이 없었다. 여성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김진석이 누가 봐도 매력적인 이들과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은 눈치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리는 김진석을 그들보다 더 친근하게 부르는 여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진석 플레이어가 로스트 월드. 그러니깐 당신들의 세계에서 연인과 함께 나왔는데…….”
“…연인?”
연인이란 말에 노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 그런데 그가 실종된 날과 동시에 그녀도 안 보이게 됐어요. 분명 이름이…….”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주변의 이방인 길드원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한명 한명이 괴물 같은 그들이 갑자기 픽픽 쓰러지는 모습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해하기도 전에. 이미리를 비롯한 여성들도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제이다. 그리고 로스트 월드 속에서 나온 인물들을 제외하고 전부가 그렇게 잠에 빠졌다.
신체 능력이 가장 뛰어난 이설이 그나마 졸음에 버티고 있었지만 강제로 쏟아지는 졸음에 결국 눈을 감았다.
그녀가 눈을 감기 직전에 보인 건.
“…온다.”
회색빛 머리를 가진 여성의 조용한 경고와.
“…….”
극심한 분노에 말조차 나오지 않는, 김진석의 연인으로 알려진 여성. 넬의 모습이었다.
* * *
넬은 김진석이 사라지고 난 직후. 어떻게든 그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다른 대 악마들도 그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대 악마들과 김진석은 이어져 있기에 그가 어디 있든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구 그 어디에도 김진석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넬은 감정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그들이 사라지지 않았기에 우선 김진석은 죽은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것도 확실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소환된 이들이 주인에게서 벗어난 경우를 직접 보았으니깐.
피가 메마른 다는 게 기분이 이런 것일까.
그런데 지금. 넬은 김진석이 있었던 세계. 그들이 침략하려고 했던 세계의 인간이 지금, 이 지구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다른 대 악마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그곳으로 날아갔다.
* * *
“대 악마다! 전투 준비!”
“…넬 플레이어?”
넬의 모습을 보자마자 이미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던 로스트 월드에서 나온 이들은 곧바로 전투태세로 들어갔다.
제이다는 언제나 김진석에게만큼은 아름다운 웃음을 짓던 넬이 검은 날개를 펼치고 이렇게까지 분노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원래 다른 인간들에겐 차가운 표정이었지만 지금 그녀의 모습은 억누를 수 없는 분노를 억지로 억누르는 표정이었다.
분명 길드원들이 쓰러져 잠에든 건 그녀의 짓이었다. 이제는 알렉산더의 철갑 기병들이 와도 김진석이 없어도 그들만으로 나서서 처리할 수 있는 무력을 가졌다.
그런데 넬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왜 저는…….”
그런 넬이 왜 제이다 본인은 남겨두었을까.
“후… 당신은 그이를 위해 헌신했으니깐. 알 자격이 있어.”
제이다는 서울에 함께 들어갔을 때. 넬의 모습을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넬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제이다는 언제나 김진석을 위해 행동했다.
그런 그녀를 넬은 처음으로 배려했다.
크게 심호흡한 넬은 감정을 억누르고 적발의 여성, 엘프 여성, 그리고 회색빛의 머리를 가진 여성을 바라보았다.
“너희가 알고 있는 애들하고 우리는 달라. 쓸데없는 힘 빼지 마. 아무리 그이가 믿는 이들이라고 한들 진짜 죽여버리는 수가 있어.”
하지만 새어 나오는 감정을 숨길 순 없었다.
노라와 다이아. 그리고 세라스는 알고 있었다. 김진석이 갑자기 사리지기 전에 악마들이 김진석을 따르는 듯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들의 세계로 침공한 악마는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의 악마는 그들이 알던 악마와 전혀 다른 힘을 가지고 있었다.
“…너희 세계에 그 남자. 있어?”
“그게… 무슨 소리죠?”
넬의 말에 제이다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넬은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그 남자. 아무래도 다른 차원으로 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