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즐겁군.”
입으론 전혀 웃고 있지 않지만 그렇게 말하는 김진석의 모습은 너무나도 섬뜩했다.
거의 무한한 삶을 살아온 제니아조차도 두려움에 뒷걸음질을 칠 정도였다. 사실 뱀파이어들은 한국에 있는 괴물. 김진석을 죽이려고 했다.
그렇기에 뱀파이어의 전력이 모였지만 기습하기 전에 하필 MIA의 전류 거미가 한국에 와있었고 그 전류 거미에게 들킨 것이다.
김진석은 처음엔 길드원을 죽인 뱀파이어들에게 극도로 분노했었다.
하지만 알렉산더의 철갑 기병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후작급 이상의 뱀파이어들이 모인 이곳은 김진석의 회의감을 해소해주기에는 충분했다.
게임과 비교하자면 하나하나가 필드 보스급 이상인 뱀파이어였다.
알렉산더의 철갑 기병들에겐 전혀 느끼지 못했던 죽음의 공포. 그걸 이 뱀파이어들에게 느낄 수 있었다.
다른 플레이어라면 트라우마가 올 수준이지만 김진석은 달랐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그 공포감은 회의감을 희열감으로 바뀌게 하기 충분했다.
지구에 와서 알렉산더의 철갑 기병들을 제외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사용하며 싸운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알렉산더의 철갑 기병 때는 죽음의 공포조차 느끼지 못했다. 숫자만 많은 쓰레기나 다름없었으니.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온몸이 권속에게 물어뜯기며 피로 된 창과 검에 베이고 뼈가 보일 때까지 살이 잘려나가고 있었지만 김진석이 느끼는 감정은 공포나 고통이 아닌 즐거움이었다.
광기에 가까운 그 집착은 이젠 즐거움의 감정으로 변해 있었다.
“오랜만에 즐겁다고 느끼고 있다. 감사를 표해야겠군.”
뱀파이어의 몸에 박힌 칼날을 빼며 말하는 김진석의 모습은 그의 말과 대비되지 않았다.
수백에서 천은 넘을 법한 후작과 공작급 뱀파이어가 고작 하나의 인간에게 죽었다. 눈앞의 둘. 제니아와 비간은 그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다행히 뱀파이어가 나타났다고 해서 사람들이 전원 대피했고 플레이어들은 물론이고 길드원까지 전부 대피해 지금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자는 앞의 둘밖에 없었다.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정말 김진석을 몬스터로 오인할 수도 있었으니.
“즐겁군. 즐거워.”
광기가 가득 담긴 그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그의 모습은 도저히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한들 김진석이 광기에 잠식된 건 아니었다. 앞의 두 뱀파이어를 남겨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다른 뱀파이어들의 여러 능력을 지켜보았지만 이 둘이 가장 위협적이었다.
후작급 뱀파이어 비간. 그는 공작급 뱀파이어보다 피를 지배하는 능력이 훨씬 뛰어났다.
공작급 뱀파이어 제니아. 그녀의 권속은 까다로웠고 신체 능력 또한 가장 뛰어났다.
“되도록 살려둬. 마음에 드는 놈들이야.”
“알겠습니다.”
어느새 그의 뒤에는 비네가 나와 있었다.
뱀파이어들은 인간들을 먹이로 삼아 생활했다. 인간과 뱀파이어. 둘은 공존이 불가능했다.
고작 인간을 먹이로밖에 보지 않는 뱀파이어였으니 당연했다.
그렇지만 그들 중에는 늑대인간과 같이 인간을 동정하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앞의 둘이었다.
물론 그들을 회유할 생각은 아니었다.
“나와 같이 키워. 그리고 나를 죽이게 만들어.”
비간과 제니아는 김진석이 뱀파이어를 전부 죽일 때까지 살아남은 말 그대로 강자다.
김진석이 마지막까지 살려둔 게 아닌 그들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김진석은 그들의 힘을 원했다. 그들이 가진 힘이 아닌 김진석 자신의 힘을 견딜만한 힘.
비록 김진석에겐 부족했지만 뱀파이어의 능력만 있다면 혼자서라도 지구를 점령할 수 있을 힘을 가진 이들이다.
지금은 부족했지만 만약 비네에게 개조 받아 대 악마들처럼 강해진다면.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다.
대 악마들은 김진석 자신을 죽이지 못한다. 하지만 이 뱀파이어들은 달랐다.
자신의 동족을 죽인 김진석을 죽이려고 한다면 비네의 개조든 뭐든 전부 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놈들을 죽이며 김진석은 강해질 것이다.
“이렇게 좋은 실험체는 처음인데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비네의 몸에서 뼈로 된 손이 나오더니 순식간에 뱀파이어들을 낚아채려는 순간.
“…음?”
비네의 몸과 연결된 뼈로 된 손이 갑자기 부서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수많은 박쥐가 날아들었다.
“왕이시여…….”
“왕이시여…….”
비간과 제니아는 날아드는 박쥐를 보더니 이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왕이란 자를 맞이했다.
[드미트리 LV:98]
검은색 머리와 검은 눈. 피처럼 붉은 눈동자와 왁스를 미친 듯이 바른 듯한 머리 스타일과 느끼한 남자의 얼굴.
하지만 살짝 벌려진 입가에 눈에 띄게 긴 송곳니는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 보였다.
뱀파이어의 왕. 뱀파이어의 시조. 드미트리. 그가 지구에 나타났다.
그런데 김진석은 그의 얼굴이 뭔가 익숙했다.
“드미트리. 뱀파이어… 맞군. 그 게임이야.”
온갖 그래픽 좋은 게임이 판치는 와중에 웬 인디 게임이 갑자기 인기가 폭발한 적이 있었다. 도트 그래픽. 고전 게임과 같았고 가볍게 즐기기 좋은 게임이었다.
하지만 그 세계는 인간과 뱀파이어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 뱀파이어와 반대되는 늑대인간과 그 세계에서 나온 전류 거미 등등.
온갖 괴물이 등장하는 사이에 플레이어는 하나의 종족을 선택해 그 종족을 번영시켜야 한다.
거기서 뱀파이어를 선택하게 되면 플레이어는 혈혈단신으로 하나의 뱀파이어를 준 다음 번영하라고 한다.
흔히 알고 있는 햇빛, 마늘, 은 등등에 매우 취약한 일반적인 뱀파이어. 하지만 게임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내성도 생기며 동족을 늘리고 다른 종족들을 침략하는 방식이다.
간단한 방식이었지만 생각보다 중독성이 뛰어났다.
뱀파이어를 골랐을 때 플레이어에게 주는 캐릭터의 이름. 바로 드미트리였다.
도트 게임이라 확실하지 않았지만 저 이름과 뱀파이어의 특성들을 보면 확실했다. 특히 뒤에 비간과 제니아.
게임 속에서 정예 몬스터로 취급받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나온다… 라.”
플레이어블 캐릭터. 간단히 말하면 플레이어가 조종할 수 있는 가상의 인물이다. 즉 플레이어 본인 그 자체였다.
지금껏 게임 속 세계에서 나온 자들은 전부 몬스터나 적의 포지션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드미트리는 달랐다.
플레이어가 어떻게 행동하냐에 따라 드미트리의 성격도 바뀌었으며 게임의 엔딩도 달라졌다.
특히 드미트리가 나오는 게임의 엔딩은 매우 다양했다.
가장 대표적인 두 개의 엔딩이 있는데.
하나는 다른 종족들과 외교를 통해 화합해 평화 엔딩.
다른 하나는 다른 종족들을 전부 몰살시켜 세계에 하나의 종족만 남는 몰살 엔딩.
말만 들으면 후자가 더 어려워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다른 종족들이 원하는 건 전부 달랐지만 본인이 선택한 종족이 저들이 원한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 다른 종족을 약탈해 얻어서 가져다줘야 하다 보니 매우 까다로웠다.
하지만 몰살 엔딩은 말 그대로 세계에 단 하나의 종족만 남기고 전부 죽여버리면 그만이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몰살 엔딩을 선호했으니.
몰살 엔딩의 끝은 왕으로서 추앙받으며 그 누구보다 강력한 힘을 손에 넣은 채 게임이 끝난다.
지금 눈앞의 드미트리처럼.
“… 비네.”
“예사롭지 않은 힘을 가졌네요. 제 뼈를 부수다니.”
처음으로 비네가 타격을 입었다.
물론 그리 큰 타격은 아니었지만 지금 동안 김진석과 대 악마들에게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했던 다른 몬스터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드미트리는 아무런 말도 없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비간과 제니아에게 시선을 향했다가 주변의 죽은 뱀파이어들의 시신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진석과 비네를 바라봤다.
“넬에게 말해서 전 세계를 향해 경고를 보내.”
김진석은 한 손에 든 모글레이와 다른 손에 든 리딜을 꽉 쥐며 말했다.
“멸망 당하고 싶지 않다면 빨리 성장하라고.”
그와 동시에 김진석의 몸에선 붉은색 오라가. 드미트리의 주변으로는 둥둥 떠오른 핏방울이 비네의 눈에 보였다.
* * *
갑자기 한국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한국이 아예 지진이 없다고는 말하진 못하겠지만 그 지진의 강도가 달랐다. 서울 근처에서 느껴지는 그 지진은 지진학자가 말하길 최소 7.0이 넘어간다고 말했다.
유례없는 일이었다. 7.0의 강도는 사람들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지진학자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대부분 지진은 1분 내외로 끝난다. 길어봤자 3분.
하지만 1시간이 넘도록 지진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지진을 예상하고 설계한 건물이 있다고 한들 1시간이 넘게 지속된다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서울 근처는 이방인 길드와 그들의 지인. 플레이어들이 대부분이었으니 사상자는 없었다.
문제는 기껏 복구했던 건물과 땅이 전부 뒤집혔다는 것이다.
그제야 지진학자들은 이게 지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엔 여진이 남아있다고 생각했지만 강도가 전혀 줄어들지 않는 여진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때. 과거에 있었던 기괴한 일. 하늘이 붉어졌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하늘이 붉어졌다.
플레이어들이나 다른 사람들은 이 현상이 무엇인지 이미 정확히 알고 있었다.
지구에 몬스터가 나타나기 전. 검은색 글씨가 경고했을 때의 일이다. 그리고 지금. 똑같이 하늘에 검은색 글씨가 나타났다.
‘세계는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멸망을 맞이할 준비 하라.’
사람들은 예사롭지 않은 일이란 걸 느꼈다.
검은색 글씨가 이렇게 확실한 경고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이 말을 무시했을 때의 대가가 무엇인지는 이미 전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대변하듯 이방인 길드의 길드원 중 한 명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강대한. 전 세계 최상위 S급 플레이어들이 전부 모여서 상대해도 모자라다고 평가받는 이방인 길드원 중 하나가 죽었다.
그가 죽은 장소는 서울의 근처. 계속해서 지진이 일어나고 있는 그곳이었다.
한국은 위험하지만 어쩔 수 없이 최상위 S급 플레이어. 이설을 파견했다. 그녀 또한 서울 근처에 거주지를 마련했기에 흔쾌히 허락했다.
그런데 그녀가 간다고 하니 그녀의 오빠인 이현 또한 간다고 말했고 그가 간다면 보디가드들도 전부 가야만 했으니 결국 한국에 있던 S급 이상의 플레이어들이 전부 지진이 일어나고 있는 중심. 서울로 향했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지진이 심해졌지만 S급 이상 플레이어들이 고작 그 정도로 멈출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알 수 없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숨을 쉬기도 힘든 짙은 피 냄새. 거리에 널려있는 뱀파이어로 추정되는 비쩍 마른 시신. 그리고 건물이 무너졌지만 지진으로 인해 무너진 게 아닌 깔끔하게 잘린 단면까지.
게다가 서울 한가운데만 하늘에 정확히 먹구름이 끼어있었고 그 아래로 번개가 내려치고 있었다.
서울로 들어가는 플레이어들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최대한 경계하며 서울로 들어간 그들의 눈앞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두 명의 뱀파이어였다.
뱀파이어들은 인간이 왔는지도 모르고 있는지 멍하니 한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플레이어들은 뱀파이어들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들도 마찬가지로 벙찔 수밖에 없었다.
그곳엔 뱀파이어로 추정되는 남자가 고고하게 서 있는 모습.
그리고 최악이며 최강으로 불리는 플레이어 김진석. 그가 피를 토하는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