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생각 외로 비스나의 안에는 사람이 꽤나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플레이어가 아닌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김진석은 모르겠지만 그들은 길드의 관계자들. 길드원들의 아이템을 관리하는 자들이었다.
그들까지 플레이어일 이유가 없었고 그들은 한 번 올 때마다 수십 수백 개의 아이템을 사가는 VIP였으니 충분히 비스나의 본점 안으로 들어올 자격이 있었다.
물론 플레이어가 아닌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최소 S급 플레이어 이상이었다. 아무리 질보다 양을 택한 비스나라고 한들 질이 안 좋은 건 아니었다.
그중 질이 좋은 아이템은 당연히 가격이 비쌌고 주요 고객은 바로 S급 플레이어들이었다.
하지만 김진석의 눈에는 한참 모자랐다.
“하긴. 레어마켓도 처음엔 쓸모가 없었지.”
말이 심하긴 했지만 사실이었다.
김진석이 지원해준 엄청난 자원으로 인해 지금의 모글레이처럼 그도 만족할만한 아이템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레어마켓이랑 연이 있으셨죠. 혹시…….”
“그곳에 관심 두지 마라. 그때는 전부 죽여버린다.”
마피아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김진석이 마피아들을 살려주었다고 친해졌다거나 한 게 아니었다. 지금 김진석이 마피아들을 부른 이유는 그저 부려먹을 사람이 필요했기에다.
슬금슬금 기어오르려는 마피아에게 김진석은 확실한 경고를 날렸다.
마피아들은 김진석의 경고를 무시한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지 이미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스킬북은 어디있지?”
* * *
“시간이 조금 걸리겠는데.”
마치 서재처럼 널려있는 스킬북의 향연에 눈을 떼지 못했다. 수많은 스킬북의 스킬 이름이 김진석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스킬북의 가격이 일정 구간부터 달랐다.
“여기부터 여기까진 100만 루블. 저긴 천만 루블에서부터 10억 루블까지. 가격이 천차만별이군. 왜지?”
1루블이 20원 정도였으니 천만 원에서부터 200억까지. 물론 200억짜리 스킬북은 하나였지만 가격의 차이가 엄청났다.
“저희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물건의 가치를 매길 수 있는 플레이어가 비스나에 있다는군요.”
즉 그 플레이어가 스킬북의 가치를 매겼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200억의 스킬북을 확인하면 됐다.
“잠시만요!”
김진석이 그 스킬북에 손을 데려는 그때 어디선가 비스나의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달려오고 있었다.
“함부로 손대면 안……?!”
하지만 그 직원은 하필 김진석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P……?”
그 이후의 말은 하지 못했다. 넬이 순식간에 그를 제압한 것이다.
문제는 그 직원의 목소리는 조용한 비스나의 안에 울려 퍼졌다. 직원이 제압된 걸 본 비스나의 경비가 순식간에 총을 들고 그들을 겨눴다.
그 총은 비스나에서 개발한 특수 제작된 플레이어에게도 통하는 총이었다.
“멈ㅊ…….”
물론 경비들도 마찬가지로 넬에게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그만. 놔줘.”
“쳇.”
사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었다. 그저 아까의 일에 대한 화풀이였을 뿐이었다.
김진석이 그녀에게 폭력을 허락할 때는 딱 하나. 그들에게 적의를 보일 때. 그 하나였다.
비스나의 본점인 만큼 고작해야 경비가 이들만 있는 건 아니었으니 어디선가 계속 몰려들고 있었다.
이제는 A급 플레이어서부터 S급 플레이어까지 경비에 속해있었다.
물론 그들이 몰려들어봤자 전부 제압할 수 있겠지만 김진석은 이곳을 약탈하러 온 것이 아닌 물건을 사러 온 것이었다.
굳이 죄 없는 이들까지 죽이고 제압하는 일은 귀찮았으니 양손을 하늘로 들어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제스처를 보냈다.
넬도 마찬가지로 두 손을 들었지만 그녀의 입가엔 여전히 미소가 남아있었다.
“단순히 오해였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김진석과 넬의 얼굴에는 긴장감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때 경비 사이를 해치며 다가오는 자가 있었다.
“김진석 플레이어인가. 요즘에 유명하신 분이로군.”
김진석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김진석의 감정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건 그는 일반인이라는 것을 뜻했다.
“반갑네. 비스나의 주인 세르게이라고 하네.”
푸근한 인상에 배가 많이 나와 있었고 백발과 안경을 낀 그는 자신을 세르게이라고 소개했다. 어딘가 한영석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유명하신 분이 우리 가게에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그는 일반인이었고 김진석이 PK 플레이어란 것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여유가 넘쳤다. 아마 저 여유는 총을 든 이들과 주변의 플레이어들 때문이겠지.
게다가 명백한 경고의 의미로 레이저 포인터가 김진석의 이마 정중앙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으니 여유가 넘칠만했다.
“오해가 있었습니다.”
“오해라는군. 다들 흥분을 가라앉히게.”
경비들은 눈앞의 남자가 김진석이란 걸 알자 곧바로 최고 경비 태세로 전환했다.
“저자는 PK 플레이어이며 최상위 S급 플레이어를 넷이나 죽인 잡니다!”
“죽일 거였으면 진작에 죽였겠지. 저기 쓰러진 경비 중에 죽은 자가 있나?”
김진석과 넬의 발밑에는 기절해 쓰러진 경비들이 널려있었다.
하지만 세르게이의 말대로 죽은 자는 없었다. 만약 죽였다면 넬이 김진석에게 크게 혼났을 게 분명했으니깐 능력으로 기절만 시켰을 뿐이었다.
“그리고 저자는 추정 자산만 최소 10조가 넘는다. 즉 대형 고객이란 거지.”
세르게이는 비스나의 사장이다.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누구보다 빨리 세계에 적응했으며 몬스터의 소재로 아이템을 만든 장본인이었다.
한국에서조차 비스나의 체인점이 있을 정도였으니 그들의 영향력은 가히 대단했다.
그전에는 고작해야 중소기업의 이사 정도였을 그가 지금의 그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어쩌면 플레이어보다 빠른 상황 판단 능력 덕분이었다.
갑자기 레어마켓이 치고 올라가 비록 지금은 2위에 머무르고 있지만 그들의 영향력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리고 세르게이는 레어마켓이 갑자기 치고 올라갈 수 있었던 이유가 눈앞의 남자. 김진석 때문이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만약 비스나도 그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2위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사실 세르게이도 PK 플레이어가 돼 사라진 김진석의 행방을 찾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신의 본점에서 나타났다는 소릴 듣고 급히 달려온 것이다.
옆에서 얌전히 지켜보던 마피아들도 김진석의 자산 얘기를 듣자 깜짝 놀랐다. 스킬북을 사려고 할 때부터 돈이 많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 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김진석은 그들에게 별 볼 일 없었다.
“스킬북을 사러 왔다만 손을 데려고 하니 제재하려고 해서 말이야. 우리도 과잉반응했으니 미안하군.”
사실 비스나의 잘못은 없었다.
당연히 200억이나 되는 물건을 함부로 만지려 한 김진석의 잘못이었고 저기 누워있는 직원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당연히도 200억이 넘는 물건을 그대로 내버려 둘 리가 없었으니 건드리면 건물 전체에 알림이 가는 건 물론이고 그 순간 A급 플레이어도 기절할 만한 강력한 전류가 흐르게 된다.
저 직원은 애꿎은 희생자가 나오는 걸 막으려고 한 것이다.
물론 김진석이 그것에 꿈쩍도 하지 않았겠지만.
“스킬북이라…….”
세르게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건의 가치를 매길 수 있는 플레이어가 스킬북의 가치를 매긴다고 한들 그 스킬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상 함부로 살 수 없었다.
당연히 200억이 넘어가는 스킬이라고 한들 그 스킬이 자신한테 아무런 쓸모가 없으면 돈만 날리게 되는 거다.
하지만 거의 웬만한 기업보다 돈이 많은 김진석이었으니 그 정도 돈 지랄은 별거 아닌 수준이겠지.
아마 제2 올림푸스의 제우스를 원하는 것이겠지.
그의 능력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행운이 그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많았다. 스킬북을 미친 듯이 읽긴 했지만 수천, 수만 개의 스킬북을 읽어도 쓸만한 능력을 얻는 경우는 손에 꼽았다.
하지만 제우스는 달랐다. 쓸만한 걸 넘어 그것 하나만으로도 최상위 S급 플레이어가 될만한 능력을 수십 개를 가지고 있었다.
“저희가 자랑하는 플레이어가 값을 매기긴 했지만 솔직히 추천해 드리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200억의 값어치를 매긴 스킬북은 역사상 처음이기에 저거 하나만큼은 감히 추천해 드려보겠습니다.”
세르게이는 김진석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능력이 있어서 추락하는 레어마켓을 업계 탑으로 이끌었는지 궁금했다. 그렇기에 진실만을 말하고 있었다.
자신의 상품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스킬북은 세르게이도 추천하지 않았지만 200억의 가치가 있는 스킬북은 달랐다.
비스나와 값을 매기는 플레이어는 긴밀한 사이였고 그 덕분에 업계 1위까지 올라갈 수 있던 것이다.
그만큼 그 값의 신빙성이 있었으니 처음으로 200억의 가치가 있는 스킬북을 추천해 보인 것이다.
다른 무기나 방어구는 200억이 넘는 아이템은 많았지만 스킬북이 그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흠…….”
하지만 김진석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그 이유는 당연히 그 스킬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깐.
[인벤토리]
이미 가지고 있는 인벤토리. 사람에 따라 200억의 가치를 훌쩍 뛰어넘는 스킬이긴 했다. 하지만 김진석에겐 전혀 필요가 없는 스킬이었다.
그보다 김진석이 눈에 가는 건 오히려 가격이 싼 스킬북이었다.
“등급을 매기는 플레이어의 등급은 무엇이지?”
“C등급이지만 특수성 때문에 사실상 등급은 의미가 없습니다.”
김진석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재생]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원하는 재생을 읽을 수 있는 스킬북이 고작 4000만 원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건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 적어도 눈에 보이는 것만 벌써 4개였다.
“도대체 어떻게 가치를 매기면 이렇게 되는지 궁금하지만 내 알 바 아니지.”
김진석은 그 보이는 4개 전부를 가리키며 산다고 말했고 그다음 목표를 찾아 나섰다.
* * *
“감사합니다. 또 들려주십시오.”
비스나의 CEO인 세르게이가 직접 나서서 김진석을 배웅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김진석의 정체를 궁금해했지만 김진석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비록 세르게이가 원하는 건 이루지 못했지만 적어도 김진석과 얼굴을 텄다는 것으로 우선 만족했다.
“러시아에서의 일은 끝입니까?”
“그런데.”
마피아들은 김진석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돌변해서 자신을 죽일지 모르는 괴물 같은 플레이어였으니 그의 옆에만 있는 것만으로도 기가 빨리는데 돌아간다는 말에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이반.”
“…언제 제가 이름을 말했습니까?”
물론 그 말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재생이란 스킬. 가지고 있나?”
“없습니다. 꿈의 스킬이 괜히 그런 게 아닙니다.”
신체 능력을 앞세워 싸우는 플레이어들에게 재생이란 꿈의 스킬이었다.
“네 아버지에 대한 보답이다. 부디 원하는 스킬이 나오길 빌지. 최소 네 아버지만큼 컸으면 좋겠군.”
“…감사합니다.”
감정 없는 고마움에 김진석도 딱히 별말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 눈 깜빡할 사이에 김진석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너무나도 신출귀몰한 그의 모습에 이반은 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거 고작 200만 루블인 것을 직접 봤다만…….”
이반 또한 스킬북을 여럿 사서 읽었지만 제대로 된 스킬은 얻은 적이 없었다. 설거지, 청소 등등 정말 쓸데없는 스킬들이었다.
그리고 그건 대부분 싼 가격의 스킬북이었다.
그는 아무런 기대 없이 스킬북을 열었고 자신의 몸에 스며드는 스킬을 읽었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서 뜬 글씨에 이반은 그대로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