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한편. 김진석은 한 악마를 붙잡았다.
“스토르?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보십쇼.”
이미 전의를 잃은 스토르는 김진석의 말에 순순히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악마라고 해서 달려왔는데 우리 악마들이 아니네?”
“보기보다 열등한 것들이었네. 하지만 흥미는 있군. 인간의 욕망에서 태어난 이들이라…….”
“야! 그러고 보니 네가 말했다고 하는 거 다 들었다?!”
“그러니깐 조심했어야지. 그렇게 대놓고 하는데 눈치채지 못할 리가 있나.”
저 괴물 같은 4명의 대 악마들은 1시간도 지나지 않아 악마를 말 그대로 도륙 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아무런 일도 없던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저들의 몸에는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지금 죽은 악마들이 전부인가?”
“…아닙니다. 아직 이곳에 오지 않은 오망성을 관리하는 악마들이 남아있습니다.”
오망성. 흔히 악마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그 진은 이들이 위대한 분이라는 자를 소환하기 위해 만들고 있었다.
“너흰 마치 이곳으로 넘어온다는 것을 이미 알고 행동하는 것 같던데.”
“그건 최소 공작급 악마 이상만이 알고 있습니다만…….”
말끝을 흐린 스토르였다.
공작급 악마는 이미 죽은 지 오래였다. 바로 김진석과 대 악마들의 손에.
저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어차피 상관없었다. 넬이 확인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깐. 하지만 적어도 거짓은 없어 보였다.
실제로 스토르와 레벨이 비슷한 악마를 잡고 확인했을 때 뭔가에 잠겨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넬이 말했었으니깐.
“뭐… 그건 됐고. 가장 궁금했던 건데. 내게서 욕망을 빼낼 수 있나?”
영국을 멸망에 가깝게 만든 악마들을 죽이면서 김진석은 생각했었다. 인간의 욕망에서 태어난 악마들은 그 인간과 비슷하게 태어난다고.
그렇다면 자신의 욕망에서 태어난 악마는 과연 그와 같은 수준의 악마가 태어날 것인가.
“그건… 위험하지 않을까요?”
“분명 욕망 중에 성욕은 없을 거야.”
넬의 말은 무시하고 세피드의 말에 대답했다.
“너희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김진석의 말에 세피드는 뭔가 감명받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세피드의 말에 피식 웃으며 세토르를 돌아본 김진석이었다. 하지만 넬의 말을 무시했다고 했지만 은근 신경 쓰고 있는 게 있었다.
과연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가.
사실 넬은 항상 김진석을 유혹해왔다. 패션 잡지를 보며 모습을 꾸미는 것도 그 일환이었지만 정작 김진석은 그녀를 무시해왔다.
그도 한창의 남자인데 성욕이 안 드는 건 아니었다.
로스트 월드에선 다이아와 노라에게 좋은 감정이 드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녀들과 관계를 맺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건 넬에게도 마찬가지. 누가 봐도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가졌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넬이었지만 김진석은 무시로 일관했다.
김진석은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잘 컨트롤 하지 못했다.
언제나 하고 싶은 것을 해왔으며 그걸 방해하는 자는 짓밟으면 될 뿐이었다. 그런 그가 성욕이란 욕구를 가지게 된다면.
그걸 원하게 된다면. 아마 제어할 수 없겠지.
그렇기에 아예 경험을 하지 않는 것으로 인해 그 욕구를 제어했다. 알지 못하니 원하지도 않는 것이다.
소설이나 영화,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이 설화나 역사에서 나오는 영웅들을 보면 대부분 여자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았다.
최소 김진석은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넬과 함께 지내며 믿을 수 있는 여성이라고 생각이 되자 그 감정이 자꾸 새어 나오고 있었다.
김진석도 결국 남자였고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답다고 해도 무방할 넬의 유혹은 절대 그냥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면 답은 하나.
그 욕망을 제거하면 된다.
김진석의 말에 스토르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애써 감춰가며 김진석에게 뻗으려고 할 그때.
“음……?”
가장 먼저 이상함을 감지한 건 바포메트였다. 악마들이 죽으면서 떨어뜨린 구슬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그 구슬이 땅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그러더니 갑자기 땅속에서 검은색과 붉은색이 섞인 오라 같은 것이 튀어나와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그 오라는 하늘에서 어떠한 현상을 띄고 있었다.
“오망성?”
하늘에 오른쪽 절반은 붉은색 나머지는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악마의 현상. 오망성이 그려지고 있었다.
“아아… 위대한 분이시여.”
스토르가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위대한 분이란 놈이 지금 소환되는 것 같았다.
“쯧. 왜 하필 지금…….”
김진석은 몰랐지만 오망성은 인간들에게서 뽑아낸 욕망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악마들도 인간의 욕망에서 태어난 존재다.
악마들이 죽으면 그 욕망의 구슬이 떨어진다.
결국 이 모든 건 김진석과 대 악마들이 대량의 악마들을 학살하며 떨어진 구슬로 인해 벌어진 일이란 거다.
원래라면 영국에 인간들에게서 욕망을 뽑아내며 적어도 한 달에서 3달은 지나야 완성될 오망성 진이었는데 악마들이 전부 죽어버림과 동시에 오망성이 완성되어버린 것이다.
김진석이 뭔가 손 쓸 새도 없이 오망성은 완성되었고 이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칠흑의 공간이 생겼다.
지구에 와서 처음으로 김진석은 긴장하며 저 칠흑의 공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네. 저 뒤에 인간들을 네 공간에 넣어줘.”
악마들을 죽일 때도 내버려 두었던 성녀와 플레이어들을 그제야 비네의 공간에 집어넣으라고 말했다.
그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칠흑의 공간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떨어졌다. 하늘에 오망성의 크기는 지름 몇백 미터는 돼 보였는데 그 오망성을 꽉 채워서 나오고 있었다.
이내 모습을 보인 건 마치 신화 속에서 볼 법한 머리 여러 개가 달린 히드라의 모습이었다.
두 거대한 팔과 긴 꼬리. 그리고 머리 7개와 그 7개를 지탱할 거대한 몸집. 하지만 특이한 것은 7개의 머리가 전부 다르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머리는 사자.
두 번째 머리는 여우.
세 번째 머리는 뱀.
네 번째 머리는 원숭이.
다섯 번째 머리는 산양.
여섯 번째 머리는 멧돼지.
마지막 일곱 번째 머리는 곰이었다.
그 모습은 지금껏 김진석이 보았던 그 어떤 몬스터보다도 너무나도 기이했다.
[칠죄종 LV:95]
인간의 7대 죄악을 부르는 명칭인 놈은 과연 그만한 레벨을 가지고 있었다. 과연 놈을 지구에 있는 플레이어들이 당해낼 수 있을까.
하지만 김진석은 칠죄종을 보고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아크가 아니네.”
사실 예상은 했지만 만약의 경우가 있었으니. 저 기괴한 모습을 보고도 김진석은 오히려 귀여워 보였다.
“그런데 다른 악마들은 전부 인간의 모습이면서 저놈은 왜 괴물이야?”
그 물음에 답해줄 자는 없었다.
스토르는 이미 감명받아 칠죄종에게 엎드려 절하고 있었다. 김진석은 어차피 비네가 몰래 잡아뒀다고 생각했겠지만 이미 다 들킨 악마들이 있었으니 필요 없었다.
대검으로 가볍게 목을 그어 구슬로 만든 다음 김진석은 칠죄종을 올려다보았다.
그 크기는 과연 모든 인간의 욕망이 모인 듯한 거대했다. 적어도 수백 미터. 놈은 그 덩치에 걸맞게 느릿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총 14개의 눈은 정확히 이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 행동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다른 세계의 악마들이여.”
김진석의 대 악마들이 자신과 다른 세계에서 온 악마들이란 건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7개의 머리가 동시에 고개를 조아렸다.
“그대들이 관리하는 세계라는 걸 알았다면 오지 않았을 겁니다.”
과연 레벨이 95일만 했다. 상대와의 수준 차이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레벨 95와 99는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듯 보였지만 전혀 아니다.
김진석의 감정으로 볼 수 있는 레벨은 99가 전부였다. 게임 시스템상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았다. 그 말은 즉 레벨 99가 정말 레벨 99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거다.
김진석과 아크는 같은 레벨이었지만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그리고 김진석의 대 악마들 또한 표기만 99이지 적어도 세 자릿수의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칠죄종이 나오고 난 이후로 오망성이 사라진 것이다. 다시 돌아갈 수가 없어졌다.
그 거대한 크기에 맞지 않게 목소리는 중후하고 온화한 할아버지의 목소리와 비슷했지만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김진석은 아크가 아닌 것에 긴장이 전부 풀렸고 이내 칠죄종에게 물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 * *
“으… 여기는?”
정신을 차린 성녀. 엘리자베스는 깨어나자마자 주변을 살폈다.
새하얀 벽으로 사방이 막혀 있는 이곳은 계속 있으면 정신병이 걸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다행히 주변엔 마찬가지로 기절한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마지막에 분명… 악마와 거래했었는데.”
이미 엘리자베스의 마음속엔 김진석이 악마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 악마가 혹시 나인가?”
“흐엑?!”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나온 귀여운 목소리였다.
“도대체 어디서…….”
그걸 물어보기도 전에 그녀는 깨달았다. 이곳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그가 어디서 나타났건 그게 무슨 상관인가.
“제 길드원들은 어디 있나요?”
애초에 거래가 그것이었으니 그녀는 길드원들을 먼저 찾았다. 주변에 플레이어들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누워있었지만 그녀의 길드원은 3명뿐이었다.
처음부터 그녀와 같이 있었던 힐러들.
“나도 몰라. 네가 직접 찾아봐.”
“…네?”
너무나 무책임하고 당당한 그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어이가 없었다.
“아. 그리고 너희 길드가 우리 밑으로 들어올 필요는 없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너희가 쌓아놨던 지반을 전부 무너뜨릴 생각은 없으니깐. 그냥 우리 길드원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면 충분해.”
“네? 아니 그게 무슨…….”
물론 그 말에 대답해주진 않았다.
김진석이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엘리자베스의 시야가 갑자기 새하얀 벽에서 영국의 거리로 바뀌었다.
그런데 그 거리에서 위화감이 들었다.
“…어째서?”
평범한 영국의 거리였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됐다. 분명 악마가 침공한 이후로 사람들이 광폭하게 돌변하며 자신의 욕망을 분출하고 거리도 그 욕망에 휩쓸려 망가졌다.
그건 영국의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 컸는데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런던. 영국의 수도인 곳이었다.
가장 크게 욕망에 휩쓸린 곳이었는데 거리가 너무나도 멀쩡했다.
심지어 사람들도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마치 악마가 나오기 전의 광경처럼.
“도대체 이게 무슨…….”
사람들은 거리 한복판에 나자빠져 있는 웬 이상한 여자를 이상한 눈으로 보다가 그녀가 엘리자베스인 것을 알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성녀님? 왜 이곳에…….”
“마실 나오셨나요?”
인품과 인성이 좋았던 그녀는 거리의 일반 시민들도 허물없이 대화를 걸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그들에게 물었다.
“혹시 악마들은 못 보셨나요?”
“…네? 악마요?”
“설마… 그런 몬스터가 나타난 건가요?!”
그녀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혼비백산하며 피신했다. 악마라는 몬스터를 아예 처음 듣는다는 모습과 그들의 행동은 엘리자베스의 머릿속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내가 꿈을 꾼 건가…?”
“약속 지키길 빌지. 너 같은 인재를 죽이는 건 아쉬우니깐.”
마치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김진석의 목소리는 엘리자베스는 꿈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