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공작급 악마. 말리는 학살 현장을 목격하고 있었다.
남작급 악마는 물론이고 자작, 백작, 후작 상관없이 전부 저 인간의 대검에 몸이 찢겨 나갔다. 하지만 정작 이곳에서 가장 강한 악마인 말리는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가장 강한 만큼 김진석을 억제해주는 것이 아닌 저 인간을 처음 발견한 악마, 스토르와 대화하고 있었다.
“저 인간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거지?”
“그의 말에 따르면 성녀를 구하려고 왔답니다.”
스토르는 공작급 악마에게 깍듯이 대하고 있었다. 악마들은 신분 사회가 뿌리 깊게 박혀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가장 기본적인 약육강식의 세계였다.
즉 자기보다 강한 악마에게 꼬리를 내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거슬리는군. 어디서 저런 강한 인간이 나타나서…….”
“생포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지금 저 모습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말리가 가리킨 곳에는 악마를 학살하고 있는 인간, 김진석이 보였다.
악마들도 나름, 선전하고 있었다. 과연 이곳에 모인 악마들이 전부 귀족급 악마인지 순식간에 당한 마법을 쓰는 악마들을 통해 배워 절대 서로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김진석을 구석으로, 정확히는 성녀의 곁으로 몰아내려고 했다.
스토르의 말에 따르면 그는 그녀를 구하러 온 것이었으니 그녀를 건드리는 모습만 보여도 김진석의 행동에 제약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김진석은 성녀는 안중에도 없었다.
자신들이 인간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안 것인지 아니면 진짜 안중에도 없는지는 몰랐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렇게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후작급 악마 넷, 자작급 악마 20, 남작급 악마 40 이상이 그의 손에 죽어버렸다.
전부 하나같이 깔끔하게 절반으로 양단되어 말이다.
“드랍률이 별론데? 이제 고작 두 갠가?”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김진석의 모습은 악마들에겐 마치 저승사자로 보였다. 낫 대신 자신의 몸에 1,5배만한 거대한 대검을 든 저승사자.
마법을 사용하는 후작급 악마 넷을 죽인 그때부터 그는 악마 전원과 정면승부를 택했다.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지는 스킬은 자체적으로 봉인해둔 채 먼저 달려드는 김진석은 도저히 막을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대검을 한 번이라도 받은 악마는 그대로 반으로 갈라져 죽는다. 그렇기에 악마들은 귀족급 악마를 그에게 바치며 버텼다.
시간을 끌고 있었다.
“긴급 소집을 내가 한 번 더 했으니 금방 몰려올 거다. 그때까지 버텨보지.”
* * *
김진석은 생각보다 체계적으로 자신을 상대하는 악마들을 보고 놀랐다.
마치 자기가 레이드 보스 몬스터가 된 것 같았다. 저들은 저들 중 가장 레벨이 낮은 악마들을 방패막이로 사용하며 자신을 압박해왔다.
처음에는 레벨이 낮은 악마들이 달려들어 일부로 대검을 몸에 박힌 채 김진석의 행동을 방해하려고 했다.
실제로 몸이 절반으로 나뉘기 직전임에도 그 손은 김진석의 대검을 잡고 어떻게든 버티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에 잠시 멈칫한 틈을 타 악마들은 김진석의 몸에 상처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쌍검을 사용하는 악마가 사선으로 김진석의 몸을 그었고 그의 몸에선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그 모습에 쌍검을 사용하는 후작급 악마는 그대로 김진석을 죽이려 했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검을 베어 올렸다.
과연 후작급 악마인지 아니면 감인지 놈은 이를 악물고 날개를 펼쳐 더욱 속도를 내 달려드는 그대로 김진석을 빗겨나갔다.
하지만 쌍검은 땅에 떨어졌으니, 그의 두 손이 잘린 것이다.
“크아악!”
“호오. 날개를 펼치면 오히려 속도가 줄어들 텐데 어떻게 속도를 더 낸 거지?”
날개를 펼쳐 날아오른 것이 아닌 더욱 속도를 낸 것이다. 김진석은 그 특이한 움직임에 관심을 가졌다.
고작 그때까지가 5초. 그 5초 사이에 김진석의 가슴에서 쏟아지는 피가 멎어있었다. 아직 완벽히 상처가 나은 건 아니었지만 상처가 아무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관심은 관심이고 김진석은 가볍게 대검을 휘둘러 쌍검을 사용하는 악마를 절반으로 나누어 주었다.
후작급 악마가 잔혹하게 죽는 모습을 눈앞에서 본 악마들은 살짝 주춤거렸지만 이내 아직 상처가 낫지 않은 김진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문뜩 김진석은 왜 이렇게 악착같이 달려드는지 궁금해졌다.
“도망가면 살 가능성이 있을 텐데 왜 굳이 달려들까.”
“그건 당신 같은 인간은 알 수 없습니다.”
그때 그제야 땅으로 내려오는 공작급 악마. 말리가 말했다.
“요즘 악마는 다 예의가 좋네.”
“…언제까지 그런 여유가 있을지 궁금하군요.”
김진석은 말리가 왜 지금에서야 내려온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알 수밖에 없었다. 김진석이 죽인 숫자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난 숫자의 악마들이 하늘에서 날아오고 있었으니깐.
최소 수천, 수만 이상인 악마들이 검은 박쥐 날개를 펼쳐 날아오는 모습은 마치 어둠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저희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인간이 있다면 그의 배에 다다르는 숫자가 태어나죠.”
악마는 인간의 욕망에서 태어난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었다. 즉 악마의 숫자도 끝이 없다는 뜻이다. 비록 처음 인간의 욕망과 후에 회복되는 욕망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들의 숫자는 무한대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들의 행동이나 사용하는 무기 등. 그 모든 것이 그들을 태어나게 한 인간이 사용하는 것과 똑같았다.
대검을 사용하는 인간의 욕망에서 태어난 악마는 그 악마도 대검을 사용한다는 뜻이었다.
“징글징글하게 많긴 하네.”
김진석은 마치 파리 떼처럼 날아오는 저들의 모습에 질렸다.
“고작 나 하나 잡기 위해 저렇게까지 동원해야 하나?”
“저들은 그저 일부일 뿐입니다. 저희 악마의 극히 일부.”
하늘을 뒤덮고 김진석의 주변을 둘러싼 엄청난 숫자의 악마들이 그들의 극히 일부라는 건 과장이 심했다.
물론 지금도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지만 강한 악마란 악마는 대부분 데리고 온 게 이 정도 숫자였다.
영국의 사람들에게서 태어난 악마들은 워낙 약했으니깐.
하지만 이들에게 시간을 주고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정말 저 정도 숫자는 극히 일부가 될 수도 있겠지.
“물론 저희도 의미 없는 희생을 하는 건 조금 그러니 제안 하나 하죠. 저 뒤에… 성녀였죠? 그녀를 풀어주는 대신 당신이 잡혀줘야겠습니다.”
지금까지 의미 없는 희생이 대부분이었지만 말리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악마가 성녀를 노리는 이유는 가장 강한 플레이어였기 때문. 하지만 그보다 강한 김진석을 발견한 지금. 그녀에게 집착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어찌 됐든 김진석도 그녀를 구하러 온 것이었으니 자기희생 정신이 강한 자라면 선택하겠지.
아니 애초에 선택지 따위는 없었다. 저항하고 강제로 빼앗길 것인가 아니면 성녀라고 살릴 것인가.
당연히 그가 선택할 선택지는 하나겠지.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말리는 상대의 눈에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인간 남자에게서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즉 그는 처음과 같이 별다른 감정이 없다는 거다. 지금, 이 상황에도 말이다.
오히려 여유를 되찾은 말리가 김진석에게 물었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
“음… 모르겠는데. 딱히 그런 건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악마들이 죽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서일까.
물론 죽지는 않지만 인간에게서 욕망을 빼앗는다는 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악마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어쩌면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일일지 모르는데 저렇게 의연한 반응이라니. 욕망이 없는 것일까. 아니 그런 인간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온갖 생각이 다 들 때.
“그거 아나? 너희만 시간을 끈 게 아니야.”
“…뭐?”
“나도 시간이 조금 필요했지. 그래서 조금 주의를 끌었는데 이렇게 몰려와 줄 줄이야. 대충 간부라고 볼 이들은 전부 모인 거겠군.”
말리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묻기 전에. 이미 상황은 벌어지고 있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악마들 위에서 바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무슨… 소리지?”
당연히 하늘에서도 바람이 분다. 하지만 지금 그들을 스쳐 가는 바람 한 점 없었는데 도대체 이 바람 소리는 무엇인가.
한 악마가 그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보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또 다른… 악마?”
말리는 눈앞의 남자 인간과의 대화를 나누라 지상에 내려와 있었기에 가장 먼저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총 네 명의 악마. 각자 그들과 다르지만 비슷한 날개를 펼쳐 날아오는 모습은 말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데려왔어요!”
“아니. 왜 자꾸 요즘 자주 부르세요?”
“비네. 너만 부른다네. 우린 아니야.”
“넬. 확실히 네 말이 맞는 것 같군. 그의 곁에서 재밌는 일이 많이 벌어지네.”
기이한 네 악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악마들을 뚫고 들어와 눈앞의 인간 남자 앞에 멈춰 섰다.
“오랜만이네. 비네 빼고. 너 때문에 내가 고생까지 했는데 말이지.”
“저것들에게? 당신이? 고생을?”
굳이 꼬박꼬박 말대꾸하다가 결국 김진석에게 한 대 맞았다.
요즘 부쩍 친해진 둘을 보고 넬은 은근슬쩍 비네를 경계하고 있었다.
말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분명 저 모습은 악마와 다름없었는데 인간과 친하게 지내다니.
“…악마가 왜 인간을 따르지? 그들은 고작…….”
“닥쳐라. 열등한 것들.”
말리의 입을 막은 건 바로 바포메트였다.
김진석은 처음 보는 바포메트의 거친 말에 깜짝 놀랐다. 언제나 신사처럼 설령 상대가 인간이어도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깔린 바포메트가 저런 말을 하다니.
“인간의 욕망에서 태어났으면서 결국 인간을 닮고 싶어 그런 모습을 하다니. 그나마 그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열등한 것들이 왜 인간을 욕하는 건가?”
악마의 외견에 불쾌한 골짜기가 느껴졌던 이유.
그건 그들이 인간을 닮고 싶어서 직접 만든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악마들의 본모습은 저 모습이 아니었다.
인간의 추한 욕망에서 태어난 이들답게 그들의 외모 또한 추했다. 그걸 가리기 위해 저런 모습을 만들어낸 것이다.
바포메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 그 모습을 굳이 마법의 힘을 빌려 변형하는 모습은 그들의 내면만큼이나 추해 보였다.
예외로 지구에서 성형 수술을 한 인간들도 싫어하는 바포메트였다.
“그래서… 그 말은 사실인 거죠?”
“음?”
그런 바포메트의 모습을 감상하다가 비네의 말에 의문을 띄웠다.
“쟤네 인간에서 태어났다는 거. 그러면 인간이랑 같은 몸을 가진 거 아니에요?”
“나도 몰라. 네가 확인해 봐.”
“그 말을 기다렸어요.”
비네는 지금껏 보았던 그 어떤 웃음보다 밝게 웃었다.
“아. 그리고 이놈들은 인간에게서 욕망을 뽑아내 그걸로 악마를 만들어. 네가 가지고 있는 인간들을 주면 악마가 늘어난다는 거다.”
“아… 전부 가져가면 안 돼요?”
“안 돼. 죽여서 스킬북 먹어야 해.”
마치 부모가 장난감을 사주지 않는 어린아이처럼 토라진 비네였지만 그래도 악마가 늘어난다는 말에 금방 기분이 회복되었다.
그때 갑자기 정확히 김진석의 눈을 향해 화살이 날아왔다.
하지만 세피드가 먼저 앞으로 나서서 화살을 맨손으로 잡아냈다.
“뭣…?!”
그 화살을 날린 자는 공작급 악마였다.
“대화 중인데 예의가 없네. 지금껏 보았던 악마와는 다르네.”
“해도 되죠?”
“마음대로.”
그 말과 동시에 지진이 일어나는 듯 땅이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