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모글레이]
이름 그대로 거대한 검이란 뜻인 모글레이는 영국 설화에 나온 대검이었다.
성기사단의 대검이 망가진 이후에 김진석은 레어마켓을 찾아가 새로운 대검을 구매했었다. 그것도 상점의 등급을 높여가면서까지 말이다.
비록 공격력과 같은 스테이터스가 나오지 않아 정확한 성능은 알 수 없지만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단단한 무구가 바로 이 모글레이라는 것을.
김진석이 한 손으로 끌고 다니긴 했지만 모글레이의 무게는 자그마치 3t이다. 3000kg 라는 압도적인 무게를 바탕으로 상대를 뭉개버리는 모글레이는 김진석의 마음에 든 무기였다.
원래라면 검날이 없이 둔기로써 사용했겠지만 레어마켓에서 따로 강화까지 해주며 절삭력까지 뛰어난 무기가 되었다.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었지만 어차피 돈 쓸데도 없는 김진석은 이 무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신기하네. 대부분 저런 놈들은 인간을 무시하기 마련인데.”
처음에 보았던 네임드 악마. 스토르는 말단 악마가 눈 깜짝할 사이에 죽어버리자 김진석이 강자라는 것을 눈치채고 곧바로 도움을 요청했다.
상대를 깔보는 느낌은 없었다. 그리고 김진석이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저들의 레벨은 누구의 욕망을 빼먹냐에 따라 정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저들이 플레이어에 집착하는 것이고 인간을 경계하는 것이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게다가 공손한 태도까지. 이 정도면 충분히 인간과 공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예를 들어 범죄자들을 악마들에게 넘겨 욕망을 거세시킨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물론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에 거세시킨다고 한들 처음 보았던 아이들처럼 회복되겠지만.
그래도 주기적으로 검사를 한다거나 하면 될 텐데. 아마 위대한 분이란 놈 때문에 그런 걸 거겠지.
“성녀의 도움 요청에 온 사람인데.”
“아…….”
스토르란 악마는 김진석의 말에 아차 했다. 더 많은 인간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들이 벌인 일이었으니 김진석과 같이 강한 인간이 오는 것도 예상했어야 했다.
게다가 그의 뒤에는 성녀와 그녀의 동료들이 쓰러져 있었다. 이미 그녀에게서 상황을 전부 들었을 것이다.
재빠르게 상황 파악을 끝낸 스토르는 온몸을 감싸고 있는 쇠사슬을 순식간에 김진석에게 쏘아냈다.
쇠사슬은 수십 갈래로 갈라져 쏜살같이 날아가 김진석의 몸을 꿰뚫을 것만 같았다.
“제안 하나 하지.”
하지만 쏘아진 쇠사슬은 어느새 스토르의 목에 겨눠진 거대한 대검에 감겨 있었다.
크기 하나만으로 압도하는 그 대검, 모글레이를 한 손으로 꼿꼿이 들어 일자로 겨누었음에도 그 손에는 어떠한 떨림도 없었다.
게다가 쇠사슬은 분명 상대를 죽이기 위해 날아간 것이다. 모든 인간은 생포해야 했지만 눈앞의 인간, 김진석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상대를 꿰뚫기 위해 날아간 쇠사슬이 왜 대검에 감겨 있는가.
“성녀의 동료를 돌려내라. 다른 인간들은 내버려 둬도 돼. 그렇게 하면 난 아무 짓도 안 하고 그들과 성녀를 데리고 이곳에서 나가지.”
악마는 기본적으로 대상이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었다.
김진석과 같은 힘을 알 수 없는 강함 이를 가진 자에게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그의 말에 거짓이 없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른다는 말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너희가 성녀를 꾀어내기 위해 그들을 이용했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깐.”
기절한 성녀의 기억을 읽어 알아본 사실이었다.
악마들은 욕망을 잃어 삶의 행복을 잃어버린 이들을 성벽 앞으로 데려와 성녀가 보는 눈앞에서 그들을 희롱했다.
죽이지만 않으면 상관이 없으니. 그리고 고통에서 오는 욕망도 있었으니 그 방법은 악마의 시점에서는 꽤나 효율적이었다.
김진석은 사실 어떻게 해도 상관없었다. 이 악마들을 전원 다 죽이고 영국을 구하든 아니면 성녀의 그녀의 길드원만을 구하든.
물론 그냥 나간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는 지구에 왔을 때 로스트 월드 악마들의 방주. 아크가 살아있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부터 최대한 인간의 전력을 보전하려고 했었다.
언제가 일어날 일을 대비해서. 그때 살아남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목표를 바꿨다. 지구의 플레이어들이 예상외로 강한 이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 전부를 살리는 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강한 인간을 살리는 건 똑같았다. 하지만 그 뒤에 수식어가 붙었다.
김진석 자신의 말을 전적으로 믿는 강한 인간들이란 수식어가. 그의 길드원이 대부분 그러했다.
다른 세계에서 온 이들은 전부 김진석에게 빚이 있었고 제이다도 마찬가지. 여기서 살려줄 성녀와 그녀의 길드원들도 마찬가지다.
위대한 분이 조금 거슬렸지만 솔직히 말해 김진석은 그 위대한 분이 소환되든 말든 별 상관없었다.
정말 괴물 같은 악마가 소환된다고 한들 김진석은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으니깐.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이들도 결국 악마였으니 정말 만에 하나의 확률로 이들이 소환하려는 위대한 분이란 놈이 악마의 방주 아크라면.
“넬과 녀석들이 과연 나를 따라줄까.”
로스트 월드에선 대 악마들이 아크를 믿고 전원이 지구로 올 정도로 아크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비록 시험의 탑에 갇힌 그들이었지만 아크가 만약 지구에 소환된다면 김진석을 따르는 대 악마들은 과연 김진석의 말을 따를 것인가.
아무리 김진석이라도 대 악마 전원이 함께 달려들면 역부족인 건 사실이었다.
김진석이 지구에서 유일하게 믿는 이들이 바로 4명의 대 악마들이었다. 자기 스킬인 만큼 강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오는 믿음이었지만 어쨌든 뜻은 같았다.
그런 대 악마들이 김진석을 배신한다면 그는 그저 소환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었지만 꽤 나 충격이 클 것이다.
스토르는 갑자기 사색에 잠긴 김진석을 보고 슬금슬금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어디선가 바람 소리가 들리며 도망갈 필요가 없어졌다.
“지원군이 온 것 같군요.”
스토르의 말에 사색에서 빠져나온 김진석은 감정 없는 눈으로 하늘을 쳐다봤다. 기이한 붉은 하늘 상공에는 검은색 점이 보이고 있었다.
그 점은 점점 커졌으며 이내 엄청난 숫자의 악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말단 악마 수준이 아닌 귀족 악마. 남작 이상의 악마들로 레벨이 최소 70이 넘어가는 괴물들이었다.
그런 괴물이 최소 백여 마리. 김진석이라도 부담이 될만한 숫자였다.
“…그래서. 대답은?”
하지만 김진석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대답을 바랄 뿐이었다.
스토르는 그의 알 수 없는 여유로움에 의문을 가졌지만 뒤로 날아오는 악마들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절하겠습니다. 우리가 포기할 이유는 없다. 둘 다 가지면 되는 것을.”
그제야 스토르의 본모습이 나오는 것 같았다.
본인보다 강한 자인 김진석에겐 쭈그리고 있었지만 다른 악마들이 오고 나서야 본래의 고압적인 모습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스토르? 무슨 일인가?!”
“스토르님? 무슨 일로 이렇게 급히 소집을…….”
“앞의 인간은 뭐지?”
스토르가 진행한 긴급 소집은 백작 이상의 귀족들만 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그나마 그것도 영향력이 강한 악마들이어야 그 긴급 소집을 받아들였다.
스토르는 악마들 사이에서도 가차 없이 규칙을 어긴 악마를 처형한다고 유명했기에 귀족 악마들이 금방 날아온 것이다.
대부분이 스토르보다 직급이 낮은 악마였지만 몇몇은 스토르보다도 높은 직급을 가진 악마도 있었다.
“무시하지 마십시오. 최소 후작 이상의 인간입니다.”
그 말에 악마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김진석을 바라봤다. 스토르의 긴급 소집에 응한 악마 중에서는 후작 등급의 악마도 있었다.
악마의 직급은 강함으로 이어졌지만 같은 직급이라고 동일한 힘을 가진 건 아니었다.
“내가 먼저 상대해보지.”
김진석의 앞으로 박쥐의 날개를 접고 걸어오는 악마가 있었다.
[크루노 LV:83]
80레벨 이상부터는 1레벨 1레벨의 격차가 컸고 자그마치 레벨 83의 악마였다. 그는 김진석이 손에 들고 있는 거대한 대검에 흥미가 있는 것 같았다.
“대검을 사용하는가. 나도 마찬가지인데 말이지.”
김진석보다도 거대한 덩치를 가진 그 악마는 그 등에 매단 대검의 크기도 모글레이와 비슷할 정도로 무식하게 컸다.
“한 수 부탁…….”
하지만 그 말은 끝마칠 수 없었다.
갑자기 크루노의 시선이 하늘로 치솟더니 빙그르르 돌았다. 크루노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사태 파악할 그때.
그 시선에서 자신의 몸이 보이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아… 목이 날아갔구나.
그게 끝이었다.
“내 첫 번째 제안을 거절했으니 이번이 마지막 제안이다.”
어느새 김진석의 모글레이에는 피가 흥건히 묻어있었다. 정확히 날의 끝에만.
“이곳에서 도망가 목숨을 부지할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 선택해라.”
김진석은 3M에 다다르는 모글레이를 가볍게 휘둘러 피를 털어냈다. 그런데 그 피를 털어낸 방향은 악마들이 모여있는 방향이었다.
도발이었다.
“오. 이게 스킬북인가? 처음 보네.”
하지만 정작 김진석은 죽은 악마의 근처에 책이 떨어진 것을 보고 줍고 있었다. 마치 악마들이 무슨 선택을 하든 결과는 똑같을 거라는 듯이.
“…후작 이상의 악마는 둘. 그 아래는 최소 넷 이상이 모여라.”
스토르의 소집을 받고 온 이곳에서 유일한 공작 악마인 그는 단칼에 후작 악마를 죽인 김진석을 경계하고 악마들을 통제했다.
“대답은?”
돌아온 대답은 악마의 총공세였다.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올라 산개한 악마들은 각자 자신의 방법으로 김진석을 공격했다.
대부분이 육탄공세였으며 몇몇이 뭔가 주문 같은 걸 읊다니 온갖 마법이 김진석을 덮쳤다.
먼저 마법이 김진석에게 적중해 먼지구름이 일었으며 그 사이로 악마들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내 당황했다.
“아니… 어디로?!”
그때 하늘에서 단말마가 들렸다.
급히 하늘을 바라보니 그곳엔 마법을 사용한 악마들이 날개를 잃은 채 땅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분명 이름이 있는 악마는 네임드일 텐데 왜 이리 약하지?”
정작 그 일을 벌인 김진석은 악마들의 힘에 의문을 가졌다.
마법을 쓰기 때문에 분명 몸이 약할 거라는 극히 게임의 시선으로 보고 놈들을 먼저 공격하긴 했지만 너무나 쉽게 당했다.
물론 급습까지 사용한 것이긴 하지만 너무 무기력하게 당한 것이다.
“도대체 레벨을 어디서 어디부터까지 믿어야 하는지… 이것들보단 보리스가 더 강했던 것 같군.”
러시아의 마피아. 부두목 보리스의 레벨도 높긴 했지만 이들보다 약했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이렇게 무기력하게 당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런 능력도 없이 그저 신체 능력 하나만으로 김진석을 깜짝 놀라게 한 인물이었다.
“…버텨라. 어떻게든.”
[말리 LV:85]
여기서 가장 레벨이 높은 악마였다. 엘리자베스와 레벨이 같은 악마였지만 김진석은 슬슬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위대한 분이 소환되더라도 무리 없이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다른 것에 흥미를 더 가지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스킬북을 읽으면 스킬이 늘어나겠네?”
올림푸스의 제우스와 싸웠을 때부터 스킬북에 관심을 가졌었다. 문제는 한국의 스킬북은 워낙 수량이 적었다.
이젠 돈 걱정이 없는 김진석은 스킬북을 대량으로 사들일 수도 있었겠지만 솔직히 돈 낭비라고 생각했었다.
한국에선 스킬북의 가격이 훨씬 비쌌기 때문이다.
미국 기준으로 1억으로 알고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3억이 넘어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최근 상위 A급 플레이어가 스킬북으로 좋은 스킬을 얻었다는 소문이 나서였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쓸데없이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김진석은 스킬북을 사는 걸 보류했었다. 하지만 스킬북을 눈앞에서 보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아름다운 웃음소리.]
정말 쓸데없는 스킬이었지만 중요한 건 스킬의 이름이 김진석의 눈에는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김진석의 눈에는 저 앞에 악마들이 전부 스킬북으로 보였다.
“생각이 바뀌었다. 도망가지 마.”
전부 내 스킬로 바뀌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