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넌 아무렇지도 않아?”
“조금… 따끔한 느낌?”
넬에게도 통할 정도면 이 장벽은 가히 대단하다고 불릴 만했다. 장벽을 넘어가는데 고작 따끔한 느낌이 전부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이 스킬의 유용성은 증명된 것이다.
누가 봐도 자기가 성스럽다고 주장하는 듯한 모습의 이 하얀 장벽은 실체가 없었다. 실제로 김진석은 아무것도 없는 거처럼 자연스럽게 장벽을 넘어갔다.
넬도 살짝 따끔한 것을 제외하곤 장벽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때 갑자기 장벽 안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김진석이 있는 곳으로 몰려들었다. 당연히 김진석과 넬의 존재를 눈치채진 못했지만 당황한 눈치였다.
“성녀님이 분명 뭔가가 침입했다고 하셨는데……?!”
악마의 침공에서 살아남은 플레이어들은 과연 레벨이 높았다. 하지만 그래 봐야 S급 플레이어. 말단 악마 수준이었다.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성녀 덕분이었다.
“그래도 아직 살아있나 보네.”
“뭐 계획이라도 있으세요?”
넬의 물음에 김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부터 그는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물론 지금 이런 상황에선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저 악마들은 인간을 죽이지 않는다는 거야.”
영국을 점령한 악마들은 절대 인간을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욕망이 강해진 인간들이 서로 싸워서 다치자 치료까지 해주는 모습도 보였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욕망으로 태어나는 이들이니 부모가 인간이나 다름없었다. 인간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하는 이들이니 저들에게 인간은 매우 소중한 존재였다.
“계속 두면 그 위대한 분이란 놈이 나올 수도 있으니 가자고.”
* * *
“아무것도 없다고?”
“예. 성녀 님이 말씀하신 곳 근처 전부를 둘러봤지만 침입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말에 엘리자베스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지금 자신이 머리가 아프고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고 한들 잘못 느꼈을 리가 없다. 악마는 성벽을 못 들어온다.
하지만 그 말은 즉 인간은 들어올 수 있다는 거다.
악마들에게 당한 인간들은 마치 세뇌당한 듯 보였다. 악마의 정확한 능력은 모르지만 만약 세뇌된 악마가 인간들에게 명령해서 장벽 안으로 들여보낸 거라면…
“쓸데없는 걱정이다.”
“…뭣?!”
그때 갑자기 엘리자베스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성녀의 기사를 자처한 이들이 갑자기 나타난 거구의 남자를 향해 칼을 뽑으려고 했다.
“안된단다?”
“악마……?!”
하지만 어느새 나타난 여성 악마가 그들을 제압해버렸다. 밖의 악마들이 했던 방식 그대로 눈의 초점이 사라지더니 무릎을 꿇어버렸다.
“어떻게 악마가 이 안으로?!”
박쥐의 날개와 그녀의 수법은 비정상적으로 아름다운 저 외모만 빼면 완벽히 밖의 악마와 같았다.
“오해하지마. 그녀는 밖의 다른 악마들과 다르니깐.”
그런데 정작 엘리자베스 뒤에 서 있는 거구의 남자는 악마로 보이지 않았다. 악마의 기본인 박쥐 날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어딘가 익숙했다.
“…김진석 플레이어?”
“오. 날 아나?”
“꽤 유명해지셨네요?”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여유로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영국을 점령한 악마의 틈을 뚫고 이곳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온 이들은 도대체 정체가 무엇인가.
게다가 저 여성 악마의 얼굴도 익숙했다.
“넬… 플레이어인가요?”
“저도 유명한가 본데요?”
넬은 자신을 알아보는 것에 신기했다. 사실 그녀의 비정상적인 외모는 너무나도 유명했다. 원래부터 미녀와 야수 커플로 있다가 김진석이 벌인 사건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그녀가 묻혔을 뿐.
아니 김진석이 벌인 일로 인해 그의 연인으로 알려진 넬도 마찬가지로 유명해졌다. 주로 안 좋은 쪽으로.
“설마… 악마에게 영혼을 파신 겁니까?”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 * *
[엘리자베스 LV:85]
김진석은 엘리자베스의 레벨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지구에서 보았던 그 누구보다 레벨이 높았다.
비록 초췌한 몰골에 제대로 씻지도 못해 꾀죄죄한 모습이었지만 김진석의 눈에는 그런 사소한 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처음으로 지구에서 쓸만한 인간을 발견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라…….”
김진석은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영혼을 팔았다는 말에 긍정적인 뜻이 아닌 그녀의 인성이 마음에 든 것이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예?”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 엘리자베스가 한 말은 비유였겠지만 영국에 나타난 악마들은 정말 영혼을 가져가는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김진석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넬의 모습은 밖의 악마와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뭔가 불쾌한 골짜기가 느껴지는 밖의 악마와 넬은 달랐다.
영국의 나타난 악마는 마치 조각상 같다고 해야 하나. 분명 외견은 인간과 같았지만 인간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뒤에 날개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설마 당신이……?!”
“오해하지 말라니깐… 아니 됐다.”
김진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악마와 결탁을 했건 뭘 했건 의미가 없지. 상황이 더 나빠질 것도 없잖아?”
영국 전체를 돌아본 건 아니었지만 그나마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플레이어들은 이뿐이겠지.
애초에 악마와 인간의 상성이 워낙 좋지 않았다. 레벨도 압도적으로 높을뿐더러 인간의 욕망이란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으니.
인간에게 욕망이 없다는 건 그건 사실상 인간이 아니었다.
그런 욕망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악마였고 그 악마들은 인간의 욕망을 이용할 줄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렇기에 김진석은 엘리자베스를 인정했다.
“하지만 영국이 멸망한 건 아니야. 오히려 인간들은 멀쩡해. 그저 욕망을 빼앗긴 것뿐이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엘리자베스는 김진석의 진의를 알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밖의 악마들이 성벽으로 날아들었다. 물론 언제나처럼 악마들은 성벽에 부딪혀 붉은색과 검은색이 섞인 구슬로 돌아갔지만 문제는 그녀의 상태였다.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지만 이를 악물고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었다. 그런데 김진석과 넬의 성벽 안 침입으로 인해 집중력이 깨졌고 성벽에 금이 가고 있었다.
“…쿨럭.”
“이런. 시간이 없는 건 여기도 마찬가지군. 내 제안은 간단해. 네 길드. 너를 포함해 전부 내 길드로 와.”
피를 울컥 토하는 엘리자베스였지만 김진석의 얼토당토 없는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그 전에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저희는 궤멸 상태…….”
“됐고. yes or no로만 대답해.”
플레이어라곤 성벽 안에 있는 백여 명이 전부였다. 그나마 그것도 성벽이 부서지게 된다면 끝이겠지.
이런 터무니 없는 제안은 엘리자베스도 자주 들었었다.
그녀의 길드. Red Cross는 힐러만이 그 길드에 소속될 수 있다. 사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제한을 걸어둔 적이 없었지만 그녀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길드다 보니 저절로 힐러들만이 Red Cross 길드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몬스터 날뛰던 처음엔 힐러의 존재는 극히 드물었고 중요했다. 체계가 완벽히 잡혀 몬스터가 나타나도 즉각 대응이 가능한 지금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힐러만이 존재하다 보니 힘이 약했고 강제로 그들을 끌고 가려는 세력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중국이 존재했다.
다행히 그녀는 영국에서 유명했고 성품도 좋아 인기도 많았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영국과 중국은 플레이어 전력이 비슷했다.
아무리 중국이라도 영국의 플레이어. 그것도 성녀를 건드리는 건 위험했다.
그러나 그것도 과거의 영광이다. 이미 그녀의 길드원은 이 안에서도 고작 다섯 명뿐이었다. 게다가 그녀들도 성벽에 집중한 엘리자베스를 끊임없이 치료해서 탈진상태였다.
“Yes를 선택하면… 살 수 있나요?”
엘리자베스는 성벽에 금이 가고 있는 것을 보고 사실상 포기 상태였다. 만약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면, 살 수 있다면 아마 그녀의 말대로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것이다.
그녀는 어디 게임이나 영화 속에서 볼 법한 성녀가 아니었다. 그저 하나의 플레이어. 사람이었다.
“밑져야 본전이지 않나?”
그런 그녀의 귓가에 들리는 김진석의 목소리는 악마의 달콤한 유혹이나 다름없었다.
밖의 악마들은 성벽에 금이 가자 더더욱 몰려들었고 네임드 악마들도 보이고 있었다. 성벽이 뚫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엘리자베스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조건이 있어요.”
“호. 조건을 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건가?”
김진석의 냉소에도 엘리자베스는 조건을 걸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사실상 부탁이었다.
“영국을… 아니 제 길드원들만이라도 좋으니 그들을 구해주세요.”
목소리의 떨림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할 말을 해야 했다. 눈앞의 악마에게.
그녀의 말과 동시에 성벽이 부서졌다.
아름다운 하얀색과 황금색이 섞인 성벽의 파편이 흩뿌려졌고 악마들이 순식간에 물밀 듯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하나. 여기서 가장 강한 플레이어인 성녀였다.
하지만 그 목표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뤄질 수 없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점점 눈이 감기고 있었다. 진작부터 한계였고 지금까지 버틴 것도 용했다. 그렇게 기절하듯 쓰러지며 눈이 완전히 감기기 직전.
“이젠 내 길드원들인데 당연한 거 아닌가.”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건 몰려든 악마들의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는 모습과 그들을 거대한 대검으로 양단한 김진석이란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악마였다.
* * *
네임드 악마. 스토르는 갑자기 사라진 악마의 생체 반응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드디어 말단 악마들이 성녀라고 불린 인간의 장벽에 금을 가기 시작했다. 그곳으로 몰려간 악마들의 생체 반응이 사라지는 것은 자주 있던 일이었다.
장벽에 금이 갔다는 보고를 들은 스토르는 다른 네임드 악마와 함께 성녀를 잡아들이려고 날아가는 와중에 하늘에서 성벽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원래는 거기서 멈춰야 했겠지만 흥분한 말단 악마들이 미친 듯이 안으로 몰려 들어가 버린 것이다.
스토르와 다른 네임드 악마들은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 날아 내려가는 순간. 갑자기 말단 악마의 생체 반응이 사라져버렸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무슨?”
땅바닥에 후두둑 떨어지는 구슬들은 악마들이 죽었다는 걸 증명했다. 네임드 악마인 스토르 자신조차도 말단 악마들을 이렇게 단번에 죽이는 건 불가능했다.
“…남작 이상의 악마들을 전부 소집해! 당장!”
스토르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거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자신보다 강한 인간이 저 앞에 있다는 것을.
악마의 지위는 귀족의 계급과 같았으니. 말단 악마는 서민이라고 한다면 스토르와 같이 이름이 있는 악마는 귀족으로 취급받았다.
스토르의 계급은 백작. 귀족 악마들을 소집할 권한이 있는 자였다.
급히 옆에 말단 악마에게 소리치는 순간. 바닥에 떨어진 구슬 사이로 천천히 걸어오는 한 인간 남자가 있었다.
그 인간은 대검을 땅에 질질 끌면서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 대검의 길이는, 적어도 3M는 넘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 무기도 영국에서 나온 거 아니었나. 기막힌 우연이군.”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걸어오는 인간 남자를 보며 스토르는 침을 꿀걱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