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주변 환경만큼이나 아름다운 푸르른 새.
하늘보다 푸르며 얼음보다 차가워 보이는. 게임 속에선 전설이라고 불린 새. 블루가 에베레스트의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긴 세 갈래의 꼬리가 넘실넘실 흔들리며 고고하게 날아다니는 블루는 김진석이 보기에도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준이었다.
[블루 LV:82]
과연 전설의 새라고 불린 녀석이었는지 레벨 또한 뛰어났다.
“당신이 잡지는 못할 것 같은데요.”
하지만 이미리와의 레벨 차이가 너무나 많이 났다. 그녀가 몬스터를 잡는 방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몰랐지만 불가능해 보였다.
“전 녀석을 보러 왔을 뿐이에요. 전설 속 몬스터는 전설에 남겨둬야죠.”
그런데 이미리는 블루를 잡으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저 눈에 전설의 몬스터를 담아두고 싶어서 에베레스트산을 오른 것이다.
몬스터들이 나타나 이제는 아무도 오르지 않는 에베레스트산을 말이다.
다행히 블루는 김진석과 이미리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녀석은 둘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고고하게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김진석은 녀석을 바라보다가 인벤토리에 고이 모셔두었던 한영석의 시신을 꺼냈다.
이미리는 흐뭇하게 블루를 바라보다가 김진석이 한영석의 시신을 꺼내는 걸 보고 입을 다물며 한발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김진석이 에베레스트의 오른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김진석은 손으로 파도 굴착기와 비슷한 속도로 땅을 팔 수 있었지만 인벤토리에 준비한 삽을 꺼내 조심히 파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자리를 만들었다.
“아름다운 풍경과 아름다운 몬스터를 평생 바라보며 가세요.”
그리고 거기에 한영석의 시신을 조심히 누이며 말했다. 산을 좋아한 그의 묫자리가 이곳이 어울리는지는 모르겠다.
“편히 가세요.”
하지만 이건 김진석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 *
“돌아오셨습니까.”
루크는 비행기를 타고 돌아온 김진석을 버선발로 맞이했다. 김진석은 루크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알고 있었다.
“중국은 결정했나?”
“예. 해방하기로요. 하지만 중국은 무정부 상태입니다. 모든 플레이어가 말을 들을 리 없죠.”
그 뜻은 즉 전과 같은 상태란 거다.
하지만 다수의 NPC를 소환하는 플레이어는 해방하기로 했고 그들은 흑기사의 눈앞에서 부들부들 떨며 NPC들을 소환해 해방했다.
그리고 NPC들을 얼굴에 보라색 기이한 문양이 있는 할아버지가 데려갔다.
“다른 세계의 이들을 소환하는 자들이 전부 숨어버렸습니다.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말이죠.”
중국의 정확한 상태를 모르는 이들은 NPC를 소환하는 이들이 실종되는 것을 보고 전부 숨어버렸다.
세피드가 그냥 해방하라고만 했으니 다들 숨어버린 것이다. 평범한 플레이어로 변하기 싫어서.
“평생 숨어 지내보라지.”
세피드가 죽지 않는 이상 그는 평생을 쫓아다닐 거다. 중국에서 실제로 최상위 S급 플레이어와 S급 플레이어들이 모여서 흑기사에게 대항해보았다.
물론 결과는 똑같았다.
그 어떤 NPC들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그들 전부를 깨부쉈다. 처음으로 최상위 S급 플레이어와 S급 플레이어들은 절망을 느꼈다.
검 창 활 총 미사일 마법. 그 어떤 수단을 써도 그 갑옷의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그 소문은 전 세계로 퍼져 통칭 흑기사로 불리는 세피드는 처음으로 새로운 등급이 매겨졌다.
“재앙등급?”
“혹은 천재지변. 그렇게 불립니다. 인간이 대항할 수 없는 괴물.”
루크는 그렇게 말하며 김진석을 쳐다봤다.
재앙. 천재지변. 흑기사. 김진석이 불러낸 괴물이다. 게다가 넬 또한 그와 같은 김진석에게 소환된 이였다.
루크는 마음속에서 김진석에 대한 등급을 조정했다.
전 세계랑 싸우게 된다면 설령 이길 수 없을지언정 지지 않는다고 했었나.
“…이기겠군.”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뒤에서 포탈을 타고 멀린이 나타났다.
“인원수가 너무 많아 저희가 모두 수용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다. 넬이 고문해서 강제로 소환하고 있긴 했지만 그들을 풀어준다면 언제 다시 돌변할지 몰랐으니깐.
물론 그러면 다시 잡으면 그만이지만 귀찮아졌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두고 있는데 문제는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그들이 소환한 다른 세계의 이들은 먹거나 잘 필요가 없는 이들이다.
“기다려. 금방 해결책을 마련할 거니깐. 그렇지 않나?”
다행히 서울 봉쇄지역 탈환 작전은 잘 나아가고 있었다.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며 그만큼 김진석의 땅이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인들을 집어넣으려고 산 땅이 아니었다.
“해결됐어요.”
“…음?”
김진석은 자연스럽게 뒤에서 나오는 비네를 맞이했다.
“벌써?”
“간단하더라고요. 죽이고 살리면 됩니다.”
“…예?”
비네의 말에 루크와 멀린은 잘못 들었다는 듯이 되물었다. 김진석도 비네의 말에 놀라긴 했다.
“그렇게 쉽게 살릴 수 있어?”
“고작 이런 나약한 인간들은 하루에 수백 수천 명도 살릴 수 있어요.”
비네는 대 악마면서도 네크로맨서다. 즉 죽은 이를 살릴 수 있는 자였다. 하지만 흔한 네크로맨서와 같이 해골로 되살아나거나 하는 게 아닌 그녀는 완벽히 생전의 모습 그대로 되살릴 수 있었다.
그 어떤 부작용도 없는 말 그대로 살려내는 것이다. 물론 그게 가능한 이유는 비네와 잡힌 중국인들의 엄청난 레벨 차이였다.
레벨 60~70만 되도 비네가 손쉽게 살릴 순 없겠지. 그리고 죽은 지 오래된 이들도 되살릴 순 없었다.
“이들이 소환하게 한 다음 죽여 버리고 다시 되살리면 통제권이 사라집니다.”
“생각보다 쉬웠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모르는 루크와 멀린은 둘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은 사람을 살린다니. 아무리 세계가 게임처럼 바뀌었다고 한들 죽은 사람을 되살린다는 건 신이나 할법한 일이다.
“실험하다가 실수로 죽여서 살렸는데 되더라고요.”
“다행이네.”
정작 당사자인 김진석과 비네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었다. 지금껏 김진석과 그가 소환한 다른 세계의 이들의 무력이 괴물 같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애들 진짜 해방해줬어?”
“아뇨, 정말 방금 알아냈어요.”
“그럼 바로 가자. 넬이 심심해하겠네.”
그 말과 동시에 김진석은 멀린을 쳐다봤고 괜히 흠칫 놀란 멀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포탈을 만들었다.
“아. 그리고 세피드도 불러. 녀석이 해야 할 일이 있어.”
“이미 기다리고 있어요.”
비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김진석은 루크를 바라봤다.
“루크 씨도 따라오실 겁니까?”
“…아뇨. 저는 길드장님을 보필하겠습니다.”
다행히 이 모든 대화에 관심이 없었던 이미리는 성격도 사글사글하고 외모도 아름다우니 한국에서 인기가 많은 그녀는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 * *
“오셨습니까.”
포탈 속으로 들어가서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칠흑의 갑옷을 입은 세피드였다. 분명 죽이지 말라고 했건만 새까만 갑옷에는 피가 덧칠되어있었다.
물론 세피드가 말을 어겼을 리 없으니 꽤 나 고생했겠지. 김진석은 인벤토리에서 물티슈를 꺼내 닦아주려 했다.
하지만 세피드의 날개로 만들어진 갑옷이었고 녀석의 날개는 새처럼 깃털이 달린 날개였으니 깃털에 찐득하게 붙어있는 피가 물티슈로 닦이지 않았다.
“나중에 집에 와서 씻어. 나 대신 고생 많았다.”
김진석의 솔직한 말에 세피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하지만 어디선가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에 세피드조차도 흠칫 놀라 말했다.
“감사합니다만 그 말씀은 넬에게 먼저 하심이…….”
김진석이 넬을 쳐다보자마자 곧바로 강렬한 시선이 사라진 걸 느낀 세피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넬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김진석이 자신을 바라보자 씩 웃었다. 문제는 그녀의 손과 얼굴에는 핏자국으로 가득했고 그녀의 앞에는 그 피의 주인으로 보이는 인간이 쓰러져있다는 거였지만.
“고생했어.”
그 한 마디로 넬은 지금까지의 노고가 풀리는 듯했다. 물론 노고는 없었다.
넬의 주변으로 수많은 인간이 피를 흘린 채 쓰러져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녀답게 그들에게 아무런 생명의 지장이 없었다.
그때 김진석의 주변으로 이 세계에서 소환된 이들이 모여들었다.
그 수는 언뜻 봐도 수십. 레벨이 가장 낮은 자도 최소 45는 넘었으니 A급 플레이어 이상인 자들만 수십이었다.
S급 플레이어라도 압박감이 느껴질 숫자였지만 김진석은 별 감흥 없이 제일 레벨이 높은 자를 확인했다.
[퍼시벌 LV:65]
영국도 아니고 중국에서 원탁의 기사가 뭐 이리 많이 발견되나 싶었지만 그들은 대부분 모바일 게임에 나왔고 중국이 그런 게임을 즐겨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자신의 몸보다 긴 창을 든 퍼시벌이란 자는 정말 순박한 시골 청년처럼 생긴 자였지만 그의 레벨은 절대 순박하지 않았다.
가웨인과 비슷한 레벨인 그는 S급 플레이어 수준이었다.
“저희를. 우리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퍼시벌을 필두로 수많은 이들이 고개를 숙여 김진석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들은 너무나도 순진했다.
가웨인과 모르간에게 들은 바로는 이 세계에서 소환된 이들은 하나같이 전부 자신의 세계에서 생을 마감하고 전성기 시절로 돌아와 다른 세계에 괴물들을 처리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그게 전부인 줄 알았는데 그들의 세계에선 느낄 수 없었던 인간의 잔혹함을 전부 온전히 느꼈다.
처음에는 그들을 대접해주었지만 명령하면 강제로 들어야 하고 자신에게 해를 가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지구의 인간들은 돌변했다.
입에도 담지 못할 몹쓸 짓을 당한 이들이었다.
세피드는 김진석의 뒤에서 흐뭇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닙니다. 반갑습니다. 김진석이라고 합니다.”
“아! 전 퍼시벌이라고 합니다. 원탁의 기사 소속입니다.”
둘은 서로에게 악수를 건넸다.
퍼시벌은 가웨인과 모르간과 다르게 그나마 인간에 대한 증오심이 그리 깊지 않아 보였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뭐 하는……?!”
“꺽……!”
숨이 넘어가는 소리. 그리고 숨이 넘어가는 자가 소환한 이의 비명이었다.
비네가 죽여버린 것이다.
“저 빨리 실험하러 가고 싶은데요.”
“…조금 기다려 봐.”
혀를 찬 비네는 죽인 자를 곧바로 되살렸다. 그와 동시에 그가 소환한 자는 뭔가가 툭 끊긴 것처럼 허물없이 쓰러지더니 곧장 일어났다.
“…통제가 사라졌다.”
“뭐?”
어디선가 나타난 가웨인은 그를 보고 깜짝 놀라 사실이냐는 듯 되물었다. 게다가 비네는 뼛조각과 같은 거로 정확히 목을 그어 그를 죽어버렸다.
절대 치료될 수 없는 상처였다. 그런데 그녀를 죽인 여성이 고작 손가락을 휘두르는 것으로 쏟아졌던 피가 다시 상처 속으로 들어가며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돌아왔다.
마치 되살아난 것처럼.
“그대들이 복수할 기회를 주겠습니다. 비록 본인의 손으로 할 순 없겠지만 요청하면 들어드리죠.”
“아! 저 빨리 실험하고 싶다고요!”
“바포메트는 얌전히 잘 기다리는데 왜 너만 그래.”
김진석은 비네랑 계속 티격태격 대고 있었다. 신과도 같은 힘을 발휘해놓고 서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멀린은 이미 얘기를 들었음에도 저 말도 안 되는 힘에 경악했다.
김진석의 말에 그들은 고민했다. 김진석의 뒤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비네가 무서웠지만 김진석이 비네의 눈을 솥뚜껑만 한 손으로 가려버리며 해결했다.
그때 퍼시벌이 가장 먼저 나서서 말했다.
“제 주인이었던 자는 저 여성의 고문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죽음의 고통까지.”
순박한 시골 청년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물론 김진석은 퍼시벌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충분하다고 하다면 충분한 거겠지.
“다른 이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