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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최초 플레이어-129화 (129/201)

129화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분명 멀린의 숨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세피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김진석의 부름에 답했다.

멀린은 이젠 알 수 없는 김진석과 그를 따르는 끝없는 악의를 가진 괴물들을 보고 이젠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지금 세피드가 보고 있는 광경은 넬이 즐겁게 인간들을 고문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서 자신들과 같은 이들이 그녀를 두려워하면서도 희열을 느끼는 이상한 모습까지.

“저긴 별 신경 쓰지 마……. 아니 어쩌면 신경 써야 할지도 모르지.”

김진석의 보기 드문 모습에 세피드는 의문을 표했다. 그 또한 그의 스킬이었고 김진석의 감정이 흘러들어오고 있었지만 처음이었다.

그의 기분이 이렇게까지 다운돼 있는 경우는.

“무슨 일… 있습니까?”

세피드는 알 수 없는 이 분위기에 긴장하며 김진석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감정이 가라앉는 건 세피드였다.

“너희와 같은 이들이 이 세계에서 억압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대충 예상했겠지만 저들이 그 당사자이고.”

엄청나게 축약된 말이었지만 세피드는 이해했다.

대 악마이면서도 누구보다 귀족과 같이 고고하며 기사와 같이 정의로운 이. 세피드. 존재 자체가 의문인 그였지만 딱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대 악마 중 김진석을 가장 닮은 자다.

즉 소시오패스나 다름없는 이다.

정의를 지키지만 그 정의는 오로지 자신만의 정의였으며 그 정의를 이루기 위해선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귀족과 같이 고고하며 기사와 같이 정의롭지만 결국 그는 대 악마다.

“…왜 죽이지 않는 거죠?”

“너희와 같이 소환된 이들이다. 소환한 당사자가 죽으면 사라진다고 하더군.”

“넬. 그녀가 고문하는 이유는 뭐죠?”

“모르간과 가웨인이란 친구가 있지. 너희와 같은 이들인데 그들이 구한다는 걸 알자 소환을 취소해버렸지. 아마 급히 생각한 대책인 것 같은데 문제는 효과적이란 거지. 그래서 그녀가 있는 거야.”

그때 뒤에서 그녀의 끔찍하고도 소름 끼치는 광기의 웃음이 들려왔지만 둘은 그걸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루크는 아니었다.

“이들 또한 당신이 소환한 이라는 것 또한 밝혀지면…….”

“그쪽만 입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모르지.”

김진석은 일부로 루크에게 선택하게 했다. 이 모습을 보여줄 필요도 없었지만 루크의 정보 수집력은 매우 뛰어났다.

물론 작정하고 숨기려면 평생 숨길 수도 있겠지만 김진석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귀찮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했으니.

그렇기에 루크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숨겨서 득을 볼 건가. 아니면 밝혀서 손해를 볼 건가.”

숨기면 지금처럼 평범하게 지낼 수 있겠지만 밝히면 김진석이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왜 하필 접니까?”

루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전 세계랑 전쟁해도 이길 수 없을지언정 지지 않을 자가 바로 김진석이다.

그는 괴물이다. 하지만 평범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건 하면서 살고 싶은 괴물이다.

그런 괴물이 자신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자신과의 관계를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중국과의 관계를 선택할 것인지.

그런데 왜 하필 자기인가.

“그쪽 길드원 탓을 해야지. 그들이 나를 이끌었잖아?”

루크는 운이 없었을 뿐이었다.

김진석이 이곳에 와서 가장 처음으로 만난 능력 좋은 사람이었으니. 루크는 자기 주제를 잘 알고 있었다.

상황 파악이 빠르고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이 뛰어나다. 이미 그것만으로 김진석의 눈에 들기엔 충분했다.

“물론 이들을 해방할 거지만 막무가내는 아니야. 멀린.”

“…예.”

넬의 지독한 모습에 자신마저도 기가 눌릴 정도인 멀린은 간신히 김진석의 말에 대답했다.

“네, 주인. 여경래 할아버지를 데려와.”

“…알겠습니다.”

원래라면 한번 의심이라도 해봤겠지만 포기했다. 멀린 그리고 가웨인과 모르간은 깨달았다. 이 괴물을 거스르는 순간 저들과 같은 처지가 될지 모른다는 것을.

그가 자비를 베푸는 이유는 바로 그가 소환한 악마들과 같은 처지인 이들이기 때문에. 고작 그 하나 때문에 그들은 괴물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멀린은 금방 여경래를 데려왔다. 그는 어리둥절한 채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지만 멀린은 몸으로 넬이 있는 방향을 막아서고 마법을 이용해 소리를 없앴다.

“저들과 같이 주인과 소환된 자의 유대감이 있는 이들은 건드리지 않을 거야. 여기에 있는 노예처럼. 장난감처럼 다루는 놈들에게만 적용하지.”

루크의 입장에서는 다행이었다. 김진석도 자신이 밝히는 것을 원하는 눈치는 아니었으니깐.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 * *

중국에 새로운 인간형 몬스터가 나타났다.

통칭 흑기사라 불리는 빛조차 빨려 들어갈 칠흑과 같은 갑옷을 입은 인간형 몬스터는 인간과의 대화가 가능했다.

그 폐쇄적인 중국에서 몬스터가 나타났다 하면 원래라면은 중국 내부에만 알려지고 어떻게든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관리했다.

그들끼리 몬스터들을 잡을 힘이 있었으니깐.

하지만 이번에 중국에 나온 새로운 인간형 몬스터는 곧바로 바깥에 알려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흑기사는 나타나자마자 중국 최강의 플레이어를 순식간에 제압한 뒤 그들에게 요구한 것이다.

“너희들이 억압하고 있는 이들을 해방하라.”

무정부 상태인 중국에서 최강의 플레이어는 곧 대통령이나 다름없는 자였는데 그를 단숨에 제압한 것이다.

게다가 그 흑기사는 최강의 플레이어에게 아무런 해를 가하지 않고 그 얘기를 끝낸 뒤 곧바로 사라졌다.

하지만 흑기사가 준 시간은 고작 하루.

그 어떤 기계도 흑기사가 나타났는지조차 알려주지 않았고 그 어떤 플레이어도 흑기사가 중국 최강의 플레이어에게 다가가는 것도 몰랐다.

그로 인해 중국은 처음으로 외부, 다른 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굴욕적이지만 방법이 없었다. 중국 최강의 플레이어가 너무나도 무력하게 제압당했다. 하지만 인간과의 대화가 가능했으니 어떻게든 협상할 거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흑기사가 어디에 있는지 위치조차 특정할 수가 없다는 것. 중국의 땅덩어리가 크긴 했지만 그보다 사람이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흑기사의 존재조차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중국은 급히 다른 나라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하루란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마땅한 해결책을 내지 못한 채 다음날.

몬스터의 침공이 다시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실종되었던 NPC들을 다루는 자들의 NPC가 포탈을 타고 나타나 중국 전역을 휩쓸고 다녔다.

그들은 하나같이 전부 A급 플레이어 이상인 존재였고 적어도 그들을 막으려면 동일의 숫자. 혹은 더 많은 A급 플레이어들이 나서야만 했다.

중국은 안 그래도 플레이어 숫자가 가장 많은 나라이기도 했고 게다가 외부에서 용병 플레이어도 데려왔으니 그렇게 문제없이 막을 줄만 알았다.

흑기사가 나타나지만 않았더라면.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을 전신을 감싼 흑색 갑옷을 입은 인간형 몬스터. 흑기사가 나타난 곳은 전부 쑥대밭으로 변했다.

A급 플레이어, S급 플레이어, 최상위 S급 플레이어. 그런 건 흑기사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하나같이 전부 사지가 잘려나가는 일을 겪으며 전장에서 이탈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죽은 자들은 없다는 것인데 그게 오히려 이상했다.

흑기사는 팔다리를 전부 없앨지언정 죽이지는 않았다. 그게 더 잔인한 일이고 그게 더 힘든 일이었지만 절대로 죽이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실종되는 플레이어와 흑기사가 지키는 NPC들. 그제야 그들은 흑기사가 원하는 것이 뭔지 깨달았다.

“NPC들을 해방하는 건가…….”

억압된 이들. 그리고 많은 나라 중에서 중국에 나타난 것. 종합적으로 생각해보면 그게 정확했다.

하지만 중국의 플레이어들은 포기할 수 없었다. NPC를 소환하는 플레이어들은 NPC가 없다면 고작해야 D급. 잘해봐야 C급 플레이어 수준이었으니.

그런데 그게 목숨보다 중요한 일인가.

흑기사와 그를 따르는 NPC들이 날뛰면 날뛸수록 중국에서 NPC를 소환하는 플레이어들은 계속해서 실종됐다.

S급 플레이어조차도 실종되면 위치를 특정할 수 없을 기이한 곳에 GPS가 가리켜 찾을 수조차 없었다.

NPC에게 자살을 명해도 아무 의미 없었다. NPC의 군세는 잠깐 멈칫거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를 악물고 더욱 몰아쳐 왔으니깐.

그렇게 하나둘 실종되면 될수록 NPC의 군세는 더더욱 커져만 갔다.

결국 그들은 선택해야 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실종될지. 아니면 해방할지.

* * *

한편.

정작 중국을 쑥대밭으로 만들라고 지시한 장본인인 김진석은 한국에도 중국에도 없었다. 눈이 뒤덮인 지역. 정확히는 산이었다.

“끝내주지 않나요? 이 광경?”

“…그러네요.”

에베레스트. 이미리와 함께 에베레스트에 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전설의 몬스터 블루라고 불리는 몬스터를 보러 왔고 김진석은 일이 계속 생겨 미뤄뒀던 한영석의 시신을 묻어주기 위해 오르고 있었다.

이미리는 에베레스트와 전혀 맞지 않게 웬 원피스를 입고 오르고 있었다. 허벅지도 훤히 보이는 짧은 원피스였지만 몬스터 소재로 만든 거라 따듯하다고 한다.

“…다리는 안 춥나요?”

“네?”

이미리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묻고 있었다. 여자는 하체가 추위에 안 탄단 더니 진짜 그런 것 같았다.

물론 S급 플레이어이기도 했으니 그러려니 했다.

처음으로 넬은 추위가 싫다고 김진석을 따라나서지 않았다. 대 악마인 그녀가 이미리보다 추위를 탈 리가 없으니 아마 사람들을 고문하는 게 좋아서겠지.

지금 그녀는 점점 사람이 많아졌으니 고문할 사람도 많아졌지만 오히려 즐겁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김진석도 굳이 넬에게 두 번 권하지 않았다.

에베레스트의 정상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점점 신기한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설인. 얼음 골렘. 빙(氷)호(虎) 등등.

특히 얼음 호랑이는 흑호가 관심을 보였지만 문제는 레벨 차이가 심하게 난다는 것. 흑호는 놀자고 표현한 거지만 빙호에게는 그게 공격이었고 죽음이었다.

“조심해야지.”

낑낑거리는 토라진 조그마한 흑호였다.

이미리는 조그마한 흑호를 보고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보고 있었고 원래라면 곧바로 손을 가져다 대 만졌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언제나 그녀의 옆에 당당히 서 있는 리카이스가 흑호를 보며 본능적인 뒷걸음질을 쳤다는 것을 이미리는 눈앞에서 바라봤다.

이미리는 언제나 해맑았지만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비록 지금은 아니지만 루크와 함께 다니며 그에게 많은 걸 배웠다. 그중 제일 중요한 육감. 그걸 배웠다.

김진석과 넬. 최소 같은 인간들인 그들에겐 배운 육감은 적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짐승. 그녀가 다루는 아이들에겐 육감이 어쩌면 루크보다도 뛰어나게 작용 됐다.

흑호. 김진석의 아이인 흑호에게는 육감이 그녀에게 경종을 울렸다. 그 이후로 흑호에게 관심만 보일 분 김진석에게 딱히 뭔가를 물어보지도 않았다.

둘은 원래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이미리가 일방적으로 말을 거는 관계였는데 정작 그녀가 말이 없자 어색한 그대로 에베레스트산의 꼭대기로 향했다.

그렇게 꼭대기에 도착할 때쯤.

아름다운 꾀꼬리 소리가 들려왔다.

“블루에요!”

그 말과 동시에 뛰쳐나간 이미리였다. 리카이스는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한숨을 쉬는 듯한 느낌으로 크게 숨을 쉰 뒤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김진석은 왠지 익숙한 모습에 피식 웃었다.

로스트 월드 속 자신이 이미리와 같았고 리카이스는 노라와 다이아의 역할이었다.

“기분이 묘하네.”

어쩌면 지금 기분이 노라와 다이아가 느낀 기분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김진석은 이미리의 뒤를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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