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대치 상황이라곤 했지만 루크의 뒷목에선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사실상 전혀 대치 상황이 아니었다. 그냥 김진석이 루크를 봐주고 있을 뿐. 정말 싸움이 일어나면 한순간에 결판이 나겠지.
루크도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사실 루크도 중국인을 위해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루크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김진석을 위해서다.
김진석의 말을 규합해봤을 때 그는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중국의 S급 플레이어에게 소환된 이들을 풀어주었다.
그들은 지금 중국에서 날뛰고 있고 실제로 플레이어들이 실종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엔 김진석이 관계되어 있다.
루크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특히 중국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물론 김진석이 그들에게 당할 거로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김진석이 자신을 죽이러 온 이들을 곱게 보내줄 리가 없었으니.
문제는 김진석은 그걸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 김진석은 자신을 드러내는 걸 싫어하고 조용히 지내는 걸 좋아해 보이지만 실상은 소시오패스나 다름없었다.
원하는 모든 걸 이뤄야 하는. 이뤄내는 미친놈이다.
단지 원하던 게 별로 없었을 뿐.
단지 그가 평범한 삶을 원했기에 조용히 지내고 있었을 뿐. 만약 그 평범한 생활을 깨는 자가 나온다면.
그가 초래할 결과는 뻔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제이다를 통해서 김진석에게 선물까지도 받았다. 제이다도 처음 보는 갑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그녀 또한 자신처럼 선물을 받았다는 걸 알았다.
게다가 그가 준 건틀렛은 루크의 가장 큰 단점 중 하나인 공격력을 보완해주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아무리 막 나간다고 한들. 남을 챙길 줄 아는 자였다. 그런 김진석이 한낱 PK 플레이어. 범죄자가 되지 않았으면 했다.
김진석도 루크의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NPC. 몬스터들이 지구로 넘어오는 이상 그들도 언젠가 넘어오겠죠. 전 그 세상에서 맺었던 인연을 허투루 넘기고 싶지 않습니다.”
잠시 흥분한 김진석이었지만 이내 진정하며 말했다.
“중국은 자업자득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사리분별이 가능합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직접 물어보세요.”
그때 별장 안으로 걸어오는 두 명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오랜만입니다.”
중국에서 그 누구보다 찾고 있을 이들, 처음 보았을 때보다 한껏 분위기가 다운된 가웨인과 모르간이었다.
“당신들은…….”
“이자는 누굽니까?”
가웨인은 처음 보는 인간을 보고 경계하는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은 지구의 인간에게서 환멸을 느꼈을 테니깐.
김진석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역으로 물었다.
“멀린과 같이 왔나?”
“…그걸 어떻게… 아니. 당신이 보냈겠죠.”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지만 김진석은 이미 멀린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죽일 수가 없으니 계속해서 쌓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찌해야 합니까?”
가웨인과 모르간은 자신과 같은 이방인들을 구해주었고 그들을 소환한 플레이어들을 납치했다.
대부분. 아니 중국의 모든 이방인을 소환하는 플레이어들은 전부 그 본인의 힘이 약했으니 납치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을 영원히 잡아두고 있을 수가 없었으니. 가웨인과 모르간은 자신들을 이곳으로 보낸 김진석이 이 해결책을 이미 알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
“집 청소부터 해. 먼지 많이 쌓였던데.”
“…….”
말없이 가웨인과 모르간은 자연스럽게 별장 어디선가에서 청소도구를 꺼내더니 별장 구석구석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죽일 수 없다는 건 무슨 뜻이죠?”
“직접 물어보라고 했잖나. 직접 물어봐.”
루크는 혼란스러웠다.
김진석이 저들과 관계되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들은 자연스럽게 별장을 청소하고 있었고 심지어 길게 자라난 잔디마저도 깎고 있었다.
최소 S급 플레이어라고 알려진 가웨인이 자신의 검으로 말이다.
루크가 혼란스러운 감정을 추스르고 있는 사이에 금방 집 청소를 마친 이들은 다시 김진석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있습니까?”
“멀린.”
가웨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김진석은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멀린을 불렀다.
“도대체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그냥 보인다니깐.”
그래도 여전히 여경래는 숨겨두고 혼자 앞으로 나선 멀린이었다.
“놈들을 숨겨두고 있겠지. 너희 동료들도.”
“…예.”
“한번 보지.”
하지만 그 말에 멀린은 물론이고 가웨인과 모르간마저도 경계했다. 김진석의 목적이 정확하지 않은 이상 그들에게 무슨 일을 벌일지 몰랐으니깐.
물론 그들의 경계는 김진석이 알 바 아니었다.
“내가 강제로 알아내게 하지 마.”
김진석이 강제로 알아낼 방법은 하나였다. 그들을 숨긴 멀린의 주인. 여경래를 붙잡으면 간단했으니깐.
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었다.
“그레모리인가…….”
솔로몬의 대악마. 끝없는 악의가 느껴지는 넬을 보고 멀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비록 할아버지의 모습이긴 했지만 그 또한 악마의 자식이다.
인큐버스. 여성을 홀리고 정기를 빨아먹는 악마. 서큐버스의 반대 격 악마이다.
악마는 악마를 알아본다. 왜 이 괴물 같은 악마가 한 인간을 따르는지 모르겠지만 그 인간의 호의가 사라진다면 이 악마는 얼마든지 날뛸 수 있겠지.
“알겠습니다.”
“루크 씨. 따라오세요.”
멀린은 한빈혁 디렉터를 만나기 전 만났던 딜런 플레이어와 비슷하지만 다른 포탈을 만들어냈다.
김진석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 안으로 들어섰고 가웨인과 모르간도 그 뒤를 따랐다.
“안 따라오나?”
“…가죠.”
멀린은 멀뚱멀뚱 서 있는 루크를 보고 말했고 루크는 어쩔 수 없이 그 수상해 보이는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 * *
포탈 속의 광경은 처참했다.
극소수의 인원을 제외하고는 전부 중국인인 이들이 마치 닭장 안에 갇힌 것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철창 속에 갇혀있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가웨인과 모르간과 같은 이방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너희 동료는?”
“…이들이 소환을 취소해버렸습니다. 이들이 다시 소환하지 않는 이상 방법이 없겠죠.”
소환을 할 수 있다는 건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것. 중국인들은 모르간과 가웨인의 목적을 깨닫자마자 바로 소환을 취소해버린 것이다.
모르간이 마법을 사용해 이들을 전부 기절시켜버렸지만 이미 소환이 취소된 이들을 다시 불러낼 방법이 없었다.
“고문이든 뭐든 해서 다시 소환시키면 되는 거 아닌가?”
“기사 된 도리에서 고문 같은 걸 할 순 없습니다.”
고지식한 기사도. 그 자체였다.
“…넌?”
“어미 된 도리에서 자식을 지켜줘야죠.”
여기서 처음으로 김진석은 가웨인이 모르간의 아들이란 것을 깨달았지만 어차피 게임 속 인물들이었으니 뭐든 불가능하랴.
“그리고 이대로 사라져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해서요.”
죽은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소환을 취소했으면 더는 고통받을 일도 없었으니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모르간이었다.
“그럼 왜 이들을 죽이지 않았지?”
김진석의 말에 뒤따라 온 루크가 흠칫 놀라 그를 쳐다봤지만 김진석의 시선은 모르간과 가웨인. 그리고 멀린에게 가 있을 뿐이었다.
“…저희만으로는 역부족입니다.”
중국에 얼마나 많은 플레이어가 있겠는가. 아무리 S급 플레이어 수준의 둘과 최상위 S급 플레이어 하나가 있다고 한들 멀린은 여경래라는 짐 덩이가 있었고 가웨인과 모르간은 숨어다녀야 했기 때문에 힘들었다.
김진석도 이미 알고 있었다. 철창에 갇힌 이들의 레벨은 전부 낮았다. 고작해야 여경래와 비슷하거나 더 낮은 레벨들.
게다가 중국에는 모르간과 가웨인이 주동자란 사실이 전부 밝혀진 지 오래였다. 아무리 모습을 변장하고 숨겼지만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이방인들을 소환하는 플레이어들은 이방인들을 더더욱 몰아세웠다.
자신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자살을 명한 것이다.
“…지독한 놈들이군.”
“…….”
김진석은 물론이고 루크마저도 그럴 줄은 몰랐는지 할 말을 잃었다. 모르간과 가웨인은 직접 눈으로 쳐다봤다.
자신의 동포들이 목숨을 내던지는 모습을.
그 이후로 그들은 플레이어들을 납치하는 것을 포기했다.
“네 동포가 그런 상황에 부닥쳤는데도. 아직도 기사도를 유지할 건가?”
“…….”
김진석의 말에 대답할 수 없는 가웨인이었다.
사실 가웨인도 흔들리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기사다운 그였지만 그의 눈앞에서 목숨을 내던진 이도 세계는 다를지언정 그와 같은 기사였다.
기사는 절대 자살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걸 강제로 깬 게 바로 지구의 플레이어들이다.
“모르간. 한 놈만 깨워 봐.”
“전에도 그렇지만 이름은 어떻게 안 건가요?”
신기하다는 듯 김진석을 쳐다본 모르간은 김진석이 누굴 가리키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어디론가 향하더니 콕 집어 한 명의 플레이어를 깨웠다.
“자살을 명한 잡니다.”
이방인들에게 자살을 명한 이후로 더는 나서지 않았지만 그걸 알게 된 계기가 바로 이자 때문이었다.
[리 메이 LV:15]
평범하게 생긴 중국인 여성인 그녀는 모르간이 뭔가를 읊자 서서히 기절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김진석은 그녀가 서서히 깨어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꺄아… 읍!”
“아. 혹시 비명을 지른다고 이들이 깨어나거나 하나?”
“…아뇨.”
넬을 제외한 이들은 김진석의 무자비 하고도 무덤덤한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김진석은 철창 속에 손을 집어넣어 엄청난 힘으로 여성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대로 끌려온 여성은 철창에 부딪히며 동시에 어깨가 탈골돼 덜렁거리고 있었다.
정작 그 일을 벌인 김진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었다.
“그럼 다행이군.”
“흐…윽.”
중국인 여성은 팔과 어깨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고통을 참을 수 없었고 흐느끼고 있었다.
“죽은 이들을 다시 소환할 수 있나?”
하지만 김진석의 말에 중국인 여성은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물론 그녀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릴 김진석이 아니었다.
“끄야악!”
탈골된 팔의 반대편에 김진석은 이번에 새로 얻은 세이버 대거를 꺼내 정확히 팔의 이음새인 팔꿈치에 찔러넣었다.
“다음은 다리다. 다시 묻지. 죽은 이들을 다시 소환할 수 있나?”
중국인 여성의 팔꿈치를 찌르며 튄 피를 옆에 있던 넬의 얼굴에 튀었다. 그녀는 손가락 두 개로 뺨에 튄 피를 만지고 쳐다보더니 씨익 웃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무표정으로 사람을 고문하는 김진석과 그걸 보고 쾌락에 찬 웃음을 짓는 넬.
모르간과 가웨인. 그리고 조용히 지켜보던 멀린은 괴물보다 더 괴물 같은 둘의 모습에 치를 떨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김진석은 중국인 여성에게서 확답을 받을 수 있었다.
“하루가 지나면! 가능해요… 그러니 제발…….”
“다시 재워.”
모르간은 김지석의 말에 곧바로 그녀를 다시 마법으로 기절시켰다.
“…이 사실이 밝혀지면 PK 플레이어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루크는 무자비한 김진석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확신이 없었다. 그보다 더 무자비한 이들이 있었으니깐.
“그러라지. 그럴 수 있다면.”
법에 대한 건 잘 모르는 김진석이었지만 하나만큼은 알고 있었다. 지켜야 한다는 것. 그게 가장 화났다.
지금 배 째라는 식으로 말하는 김진석이었지만 아무리 그라도 혼자서 중국과의 전쟁을 할 순 없었다.
게다가 김진석이 한국인인 이상 중국인들은 한국을 싸잡아서 공격하겠지.
정말 김진석이 혼자서 노력한다면 중국을 전부 무너뜨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시간은 매우 길 것이고 그동안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되겠지.
그렇다면 김진석 자신이 하지 않으면 됐다.
“넬. 네가 가장 잘하는 걸 이들에게 해. 그리고… 세피드를 불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