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지금은 저희가 아직 부족하니 나중에 부탁드립니다.”
김진석은 금화가 더 있다고 말했지만 정작 이들이 돈이 없었고 우선 거래를 마쳤으니 나중을 기약하며 김진석과 넬. 제이다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뭘 받고 싶은데?”
“옷. 이쁜 옷!”
대충 예상은 했다. 언젠가부터 패션 잡지를 읽고 있었으며 환각으로 그에 맞는 옷을 몸에 맞춰 입어보기도 했으니깐.
그녀는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얼굴은 살짝 앳돼 보인다는 게 흠이었다.
김진석이 그녀를 보고 여고생 같다고 생각한 게 바로 그 때문이다.
집도 구했고 돈도 벌었다. 넬은커녕 김진석 자신도 옷이 부족했으니 어차피 사긴 해야 했다.
해가 살짝 져 어두컴컴해지기 직전이었지만 둘에겐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설령 그사이에 몬스터가 나와도. 범죄자가 그들을 노려도 말이다.
“대충… 800억 정도 남았지?”
제이다의 엘프 가죽 갑옷과 루크에게 줄 건틀렛까지. 두 개 합쳐서 거의 200억 가까이했지만 상관없었다.
800억을 평생 펑펑 써도 다 쓰지 못할 마당에 자산에 백 분의 일도 안 됐으니.
“바로 가자.”
그 말에 넬은 말없이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김진석은 그런 넬을 보고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 * *
김진석은 거리로 나설 때 걱정했다. 사람들이 몰려들면 어찌해야 하나. 하지만 그건 괜한 걱정이었다.
가끔 시선이. 대부분 남자의 시선이 몰려들긴 했지만 그건 넬의 미모 때문이지 S급 플레이어라는 건 별 관심이 없었다.
“하긴. 연예인도 아닌데.”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나 S급 플레이어가 연예인이지 일반인들에게는 그냥 강한 플레이어 중 하나일 뿐이었다.
어린. 정확히는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플레이어에 대한 환상이 있었지만 나이가 조금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군인들. 특수부대 정도로만 생각할 뿐이다.
젊은 사람들에게도 그나마 유명한 S급 플레이어에게나 환상이 있지 나온 지 별로 안 된. 그것도 제대로 정보도 없는 김진석과 넬에게 관심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인터넷을 보고 찾아왔는데 뭐 이리 크냐.”
김진석은 당연히 여성의 옷에 관심도 없었고 알지도 못했으니 대충 인터넷을 뒤져서 가성비 따지지 않고 그냥 제일 좋은 여성 옷을 파는 데로 찾아왔는데 처음 봤을 때 무슨 백화점인 줄 알았다.
백화점 안에 옷을 파는 곳이 있나 보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그냥 이 건물 전체가 여성 의류를 파는 곳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곧바로 여성 직원이 배웅나왔다.
그 직원은 넬을 보고 휘둥그레한 얼굴로 쳐다보다가 김진석을 보고 뭔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손님~ 혹시 플레이어이신가요?”
“무슨 문제 있습니까?”
“아뇨. 이곳은 여성 의류 전문인 곳이라 남성 옷은 안 팔아서요. 몬스터 소재로도 만드는 곳이라 가끔 남성들이 여성 옷을 사가는 경우가 있어서요.”
충격이었다. 몬스터 소재인 만큼 좋은 아이템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여성 옷을 남성이 사가다니.
“…그런 부류는 아닙니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요! 그런 분이라면 옷을 미리 큰 걸 준비해야 해서요. 손님 같은 분이라면 더더욱.”
김진석은 워낙 멀리서 봐도 거구라 만약 여성 옷을 입는다면 큰 걸 준비하긴 해야 했다. 자신이 여성 옷을 입는다라…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전 됐으니 저 친구 옷 좀 봐주세요. 돈은 생각하지 마시고 좋은 거로만. 그리고 심기는 건드리지 마세요. 성격이 그리 좋지 않거든요.”
아무렇지도 않게 폭언을 내뱉는 김진석이었다. 직원 여성도 여자 친구로 보이는, 같은 여성인 자신도 질투할만한 외모를 가진 여성에게 이런 폭언이라니.
“…플레이어란 말에 부정은 안 하셨는데 플레이어 신분증을 보여주실 수 있으신가요? 몬스터 소재는 플레이어에게만 팔고 있어서요.”
몬스터 소재를 일반인이 사용할 수 없었다. 물론 건축 자재로 사용하거나 낮은 등급의 몬스터 소재는 상관없었지만 그걸 사용해서 다른 일반인에게 해를 입히면 팔았던 사람의 잘못도 있었다.
몬스터 소재인 만큼 비쌌고 당연히 플레이어보다 일반인이 더 많으니 일반인들에게 팔았지만 플레이어들에게만 파는 곳도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김진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분증을 보여주며 말했다.
“여기요. 넬. 너도 와서 신분증 줘.”
“…저분도 플레이어세요?”
당황한 듯이 말한 여성 직원은 김진석이 건네준 신분증을 받아 확인했다.
“S급 플레이어이신가요? 김진석… 플레이어?”
주변에서 다른 여성 직원이 조용히 말을 듣고 있다가 S급 플레이어란 소릴 듣고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그리고 사실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니 매장 안에 있던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고 어디선가 하나씩 옷을 들고 넬에게 다가왔다.
플레이어. 그것도 S급 플레이어는 급이 다르다. 물론 이들이 급을 나누는 기준은 가진 돈에 비례했다.
평범한 플레이어들과 달리 S급 플레이어는 벌어들이는 금액 자체가 차원이 달랐으니 이들에게는 잘 보여야 할 손님 중 하나다.
하지만 넬은 그들을 무시한 채 김진석에게 신분증을 건네줬고 김진석이 마저 앞에 여성 직원에게 넬의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이… 분도 S급 플레이어이신가요? 넬… 플레이어?”
더듬으면서 말하고 있었다.
김진석은 처음부터 이미 대충 예상했었다. 이들이 넬을 그리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자신이 플레이어라는 것을 밝혔을 때. 김진석에게도 해당하는 말이겠지만 험악하게 생긴 거구의 남자와 살짝 앳되지만 매우 아름다운 여성.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돈 많은 플레이어를 꼬신 여성이라고 생각하겠지.
물론 이 또한 김진석을 욕하는 것도 되겠지만 김진석 자신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깐 그러려니 했다.
그래서 일부로 처음 이들에게 경고 차원으로 말했던 것이다. 넬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고.
주변 여성 직원도 눈앞에 여성 직원과 같은 생각이었는지 옷을 가지고 오다가 넬도 S급 플레이어란 소리를 듣고 멈칫했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넬의 심기를 거슬렀다.
“원래 성격 같았으면…….”
그 뒷말은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김진석은 왠지 알 것만 같았다.
새빨간 동공을 치켜뜨며 말하는 넬의 눈을 직접 바라본 여성 직원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졌다.
매장 안은 싸늘한 분위기로 가득 찼다.
김진석이 깊은 한숨을 쉴 때. 뒤에서 누군가 매장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 김진석 씨? 넬 플레이어도 계시네요?”
“…이미리 씨.”
누군가는 이미리였다. 그녀는 매장 안 분위기가 이상한 걸 신경 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이번에 에베레스트 가잖아요? 거긴 추울 게 분명하니깐 방한 옷 좀 사 가려고 했는데 우연이네요. 여기 자주 오세요? 전 여기 단골이라…….”
만나자마자 말이 많은 이미리였다.
“어? 얘가 또 알아서 볼로 들어갔네?”
분명 이미리의 옆에는 볼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리카이스가 있었지만 김진석과 넬을 본 순간 곧바로 볼로 들어가 버렸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넬 옷 좀 봐주시죠.”
어차피 여기 직원들은 이미 굳어버려서 움직이지도 못할 테니깐.
* * *
“정말 죄송합니다. 이번에 사가신 옷은 전부 그냥 드릴 테니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이미리도 여성이었는지 옷을 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만큼 여러 벌을 샀는데 그동안 매장 매니저가 오더니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빌고 있었다.
김진석은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긴 했지만 매니저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한국에서 실상 지금 가장 핫한 플레이어였으며 그것도 최상위 S급 플레이어와 S급 플레이어다.
게다가 넬은 몰라도 김진석은 한국에서 평가가 매우 좋았다.
만약 이들이 언론에 나와서 이 매장에 대한 안 좋은 한마디라도 하는 순간 말 그대로 개 박살이 날 게 분명했다.
다행히 이들은 외모도 밝히는 것을 꺼려할 정도로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플레이어들도 많이 들르는 이곳이 최상위 S급 플레이어에 입에서 안 좋은 소리가 나오는 순간… 끔찍한 결과를 맞이하겠지.
매니저와 지금 일하고 있던 모든 여성 직원이 전부 나와서 고개를 숙이면서까지 해야 할 일이었다.
김진석은 오히려 갑자기 사람들이 나와 고개를 숙이니 이목이 쏠리는 걸 보고 대충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휘저었다.
넬은 방금 막, 산 옷을 입고 기분이 풀린 건지 나풀나풀 움직이고 있었다.
“돌아가자.”
* * *
며칠 후. 아침 일찍부터 루크가 김진석을 찾아왔다.
“중국 전체가 난리가 났습니다. 플레이어들이 소환한 이들이 풀려나면서 동시에 인간이 실종되고 있습니다.”
드디어 시작되고 있었다. 가웨인과 모르간이 행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물론 김진석이랑 겉으로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겉으로는.
“중국 플레이어가. 그것도 S급 플레이어가 실종되었습니다. 한국에서. 당신의 근처에서. 그리고 그 플레이어가 소환한 이들이 지금 중국에서 날뛰고 있단 소식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정보를 그렇게 얻는지 모르겠지만 루크는 이미 중국에서 일어난 일을 김진석 때문이란 걸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거지?”
하지만 김진석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루크의 말에 주변 기온이 내려갈 정도로 차가워졌다.
“…멈춰주십시오. 중국의 플레이어들이 죽으면 애꿎은 민간인들이 몬스터에게 당할 것입니다. 사람이 많은 만큼 몬스터도 많이 나오는 나라입니다.”
플레이어가 많다는 건 몬스터도 많다는 것. 다행히 중국 플레이어들의 평균 수준이 높아서 큰 피해는 없었지만 문제는 그런 그들이 하나둘 실종되고 있던 것이다.
처음엔 하나둘에 그쳤다. 하지만 그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더니 벌써 수백에 다다르고 있었다.
“넌. 중국에서 소환된 이들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알고 있나?”
김진석의 존대가 사라졌다. 대부분 사람을 만났을 때는 존대해주는 김진석이었지만 존대가 사라진 경우가 있었다.
“…그들이 중국에서 험한 대접을 받고 있단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들은…….”
“어쩔 수 없다?”
바로 상대에게 존대해 줄 가치가 없을 때.
“그들은 NPC.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이들입니다. 물론 중국에서의 그들에 대한 처사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게 그들이 강해진 방식이고 살아남은 방식이기에 저희가 뭐라 할 수도 없고 그럴 힘도 없습니다.”
“그러면 중국인들이 실종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군. 그들도 살아남은 방식이 있고 막을 힘도 없을 테니깐.”
루크는 말을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김진석은 인간관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으로 그가 신뢰했던 자가 있었고 그들은 루크가 NPC라고 부른 자들이다.
루크 또한 플레이어들이 소환한 이들이 안타깝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전 세계에도 여럿 소환된 인물들이 있었지만 유독 중국만이 그들을 험하게 다뤘다.
하지만 고작 한국 1위 길드가 중국에게 뭐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루크의 말 그대로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중국처럼 소환된 이들을 고작 NPC로 노예 취급하는 이들이 있었고 김진석과 같이 그들을 사람으로 인정하라는 이들이 생겨났다.
그런 이들에게 NPC란 단어는 역린이었다.
“죄송합니다. 저희는 그들을 구할 힘이 없죠. 하지만 당신은 있습니다.”
“난 아무것도 안 했다. 그저 그들이 그들 자신을 구하고 있을 뿐이야.”
대치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