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그건…….”
한빈혁 디렉터가 김진석의 활의 정체를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카인의 활입니까?”
“맞습니다. 시험의 탑을 클리어하는 보상으로 얻을 수 있는 그 활입니다.”
한빈혁 디렉터는 신기하다는 듯이 김진석이 손에 든 활을 살짝 만져봤다. 활의 촉감은 마치 구름과 같았고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직업 무기들은 하나같이 제가 다 디자인했습니다만… 밋밋하긴 하네요.”
그는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유독 카인만 이러했다. 그림자가 컨셉인 활을 다루는 직업이긴 했지만 스킬도 밋밋했고 무기도 밋밋했다.
하지만 김진석도 딱히 한빈혁 디렉터를 탓하지도 않았다. 나름 재밌게 한 직업이었고 그로 인해 살아남았으니.
“한번 이 무기가 얼마인지 측정할 수 있습니까?”
“아, 잠시만요.”
김진석은 고요한 카인의 활의 가격을 측정해 대충 비슷한 가격의 대검과 단검을 사용하면 되겠거니 했다.
신시아는 김진석에게서 활을 받아 능력을 사용해 가격을 측정하려 했다.
“…팔 수 없는 물건이라고 나오는데요?”
“아. 직업 무기라 그럴 겁니다. 아마 이 세상에서 김진석 씨밖에 사용할 수 없는 무기일 테니.”
한빈혁 디렉터는 신시아의 말에 곧바로 답을 내놓았다.
결국엔 신에게 가격을 측정해 팔려고 해도 그게 수요가 있어야 팔리는 건데 아무도 사용하지 못하는 활을 누가 사겠는가.
“우선 거래는 끝마쳐야죠. 금화 10만 개. 거기서 100개 빼고 무기 3개와 강화까지 생각하면…….”
제이다는 이러다가 평생 대화만 하겠다 싶어서 자신이 할 일을 다 했다.
“995억 정도 받으면 되겠네요. 대량 거래니깐 최소 금액으로 했습니다만… 괜찮죠?”
김진석은 어안이 벙벙했다. 평생 만져볼 수도 없는 돈이 수중에 들어오게 생겼으니깐. 제이다의 괜찮냐는 물음에 대답하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애초에 그에겐 금전 감각이란 것이 아예 없을 정도였다. 먹고 자는 것이 보장된 삶을 살았으니 그에게 돈은 필요한 것을 사는 게 전부.
하지만 그 필요한 것도 죄다 게임에 치중되어있었으니 버는 족족 게임에 쓰는 김진석에겐 저금이란 개념도 없었다.
제대로 배운 것도 없었고 그날그날을 살아가는 게 더 중요했으니깐.
“김진석 씨?”
“아. 그렇게 해주시면 됩니다.”
김진석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게다가 1/10도 아직 안 썼다는 것. 세금 대충 떼도 900억이 넘는 돈을 가졌는데 아직 1/10도 아니라는 건…….
제이다는 이미 김진석의 통장을 직접 개설해주고 자산 관리도 해주고 있는 와중에 아직 몬스터를 잡지 않아서 텅 빈 통장에 갑자기 900억이 넘게 생겼다.
“VIP 대우도 있습니까?”
“…예?”
10만 개 정도 팔았으니 VIP 대우를 받아도 되지 않을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한 번에 995억을 거래했는데 아마 맞겠지.
“상점 등급을 좀 높여주시죠.”
“…금화 1만 개는 소모되는데 제가 쉽게 결정할 사항이 아니에요.”
1만 개면 백억이다. 아무리 이 사업이 돌아가는 이유가 신시아 때문이라곤 하지만 그녀 혼자서 모든 걸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한빈혁 디렉터. 그도 자그마치 일시불로 995억을 지불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더 벌 수 있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고작 금화 100개. 1억으로 5억을 순식간에 벌어들였으니.
김진석뿐만 아니라 여러 플레이어가 이 기업. 레어마켓을 이용하기에 995억을 바로 지불할 수 있었던 거지만 그렇다고 백억을 쉽게 볼 수 있진 않았다.
물론 김진석도 자신의 수중에 돈만 보면 조가 넘게 있었지만 그는 자선사업가가 아니었다. 정당한 거래였고 비록 아이템은 아쉽지만 당장 쓸 대검과 단검을 얻었다.
이들도 기업이고 사업이다. 고작 저 정도 아이템이 지구에선 쓸만한 아이템이었으니 굳이 돈을 더 들여서까지 등급을 더 높일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금화 1만 개 이상의 아이템을 사겠습니다. 그러면 됩니까?”
“…잠시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더는 플레이어와 게임 메인 디렉터의 관계가 아닌 소비자와 판매자의 관계로 돌아가 한빈혁은 자신의 동료들과 회의를 진행했다.
“이게 부정적인 대상에게 효과적이라고요?”
넬은 날개를 접은 채 은으로 만든 대검을 손으로 집었다. 일부로 손가락에 날을 가져다 대 그어봤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별론데요?”
“네가 부정적인 대상이 아닌 거겠지.”
김진석은 그냥 대충 대답한 것인데 넬은 그 말에 뭔가 감명받은 얼굴을 했다. 정작 김진석은 그녀를 신경도 쓰지 않고 세이버 대거를 이리저리 만져보고 날카로움을 실험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소비자를 앞에 두고 회의를 오래 할 이들이 아니었으니 그들은 금방 돌아왔다.
“저희도 김진석 씨를 조사했었습니다. 로스트 월드에서 자그마치 5년을 넘게 살아있던 자라고 소문이 나 있더군요. 하지만 정신병원에 있던 자들과 다르게 김진석 씨는 한국 사람들에게 평가가 좋더군요.”
아마 새로운 몬스터를 잡으려고 미등록 플레이어일 때 한국을 들쑤셨던 걸 말하는 거겠지.
“그런 김진석 씨를 믿고 한번 투자해보겠습니다.”
사실 한빈혁 디렉터를 제외하고 다른 그의 동료들은 김진석의 제안을 거절하려 했었다. 아무리 백억 이상의 아이템을 사겠다고 말해도 결국엔 백억이 날아가는 건 똑같았으니깐.
레어마켓은 꽤나 인기가 많았고 물품의 질도 높은 곳으로 인정되고 있었으니 금화가 있는 이상 그들에게 돈을 버는 건 매우 쉬운 일이었다.
단지 게임 속 물건을 구하는 게 어려웠을 뿐.
플레이어들이 더 늘어나지 않으니 게임 속 물건들은 한정되어 있었고 게다가 플레이어들이 많진 않았지만 몬스터들에게 죽어 나갔으니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레어마켓에게 일을 맡기면 아주 좋은 물품으로 만들어 주지만 문제는 최근 들어서 그 물건의 소요가 게임 속 물건이 줄어드는 만큼 줄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한국 1위 길드인 황혼 길드에서 대량 거래를 제안해왔고 김진석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침체기였던 레어마켓을 구원해준 그였으니 그를 믿고 투자할 만했다.
지금도 셀 수 없는 숫자의 물품들이 있었지만 등급을 높이면 어떤 물품들이 나올지 아무도 몰랐기에.
“감사합니다.”
물론 이 사실을 김진석이 알았다면. 그리고 그에게 수많은 금화가 있단 걸 알았다면 딱히 고민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김진석은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한 행동이 벌써 두 번이나 선의로 돌아온 것에 대해 얼떨떨했다.
신시아는 금화 1만 개를 따로 분류해 신실한 신자가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더니 이내 금화 1만 개가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등급이 올랐어요. 대검이나 단검을 확인해보면 될까요?”
“음… 아뇨. 방어구 있습니까? 최대한 가볍고 단단한 것으로. 움직이는 데 전혀 불편함 없는.”
아무리 조가 넘는 돈을 가지고 있다 한들 대검과 단검을 이미 구매했다. 자그마치 5억이나 주고.
이미 있는 무기를 굳이 또 살 필요도 없었으니깐.
아직은 말이다.
“잠시만요……? 너무 많아가지고.”
“가격은 상관하지 마세요.”
김진석의 말에 제이다는 의문을 느꼈다. 그녀는 김진석의 엄청난 재생 능력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재생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는 방어구를 착용하지 않는다.
물론 급소나 이런 곳은 보호할 건 착용하긴 하지만 웬만한 방어구를 입지 않은 이유는 그들 몸이 방어구 그 자체였으니.
굳이 비싼 돈 들여 살 이유가 없었다. 물론 루크가 사용하는 재생하는 갑옷과 같이 갑옷 자체에 특수한 능력이 있다면 착용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디 그런 방어구가 많겠는가.
그리고 김진석은 요구할 때 따로 옵션을 붙이지 않았다.
“아깝지 않겠어요? 김진석 씨라면 웬만한 방어구는 성에도 안 차실 텐데…….”
김진석은 제이다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리고 이내 신시아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뭔가 선택하더니 그녀의 앞에 방어구가 나타났다.
[엘프 가죽 갑옷]
엘프족 전사가 사용하는 방어구. 놀랍도록 가볍다. 활 사용 시 명중률 20% 증가.
녹색 로브 같은 생김새 위로 가죽이 덧대어져 있으며 후드와 마스크까지 있었다.
“활을 사용한다고 하시길래 활을 중점으로 봤어요. 활을 사용하면 명중률 20% 증가라고 하는데 어떻게 적용될지는 잘 모르겠네요.”
굳이 김진석이 요구한 건 아니었지만 만약 이런 옵션의 방어구가 있다면 충분히 김진석도 착용할 만했다.
하지만 이건 김진석이 사용할 게 아니었다.
“제이다 씨.”
“…네?”
입을 헤 벌리며 꼴사납게 엘프 가죽 갑옷을 쳐다보고 있던 제이다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하지만 그 뒤에 올 말에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선물입니다. 저 대신 모든 일을 맡아주시니 이 정도 성의는 괜찮겠죠. 앞으로 더 많은 일을 부탁할 테니 부담가지지 마시고 받아주세요.”
“네?”
“금화 7천 개가 들어갔어요. 축하드려요!”
“…네?!”
금화 7천 개. 단순 계산만으로 70억이다. 김진석은 그 가치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저 명중률이 제대로 작동만 한다면 활을 사용하는 모든 플레이어에게 꿈과 같은 방어구였으니.
“그래서 다이아 씨가 화살을 잘 쐈나?”
“…네?”
“아뇨. 혼잣말입니다.”
할 말을 잃어 네. 밖에 할 줄 모르게 된 제이다였다. 하지만 아직 김진석의 선물은 끝나지 않았다.
김진석은 인벤토리에서 한 활을 꺼냈다.
[까마귀 깃 활.]
공격력 62. 레벨 제한 60
까마귀의 깃털로 만든 활이다. 생각보다 무겁다.
로스트 월드의 무기답게 제대로 공격력과 레벨 제한이 나오는 활. 과거 김진석이 자주 사용했던 활이다.
김진석이 사용한 모든 무기는 전부 악마의 방주. 아크와 싸울 때 부서졌지만 활만큼은 고요한 카인의 활을 사용했기에 남아있었다.
“제가 로스트 월드에서 사용한 활입니다. 아마 지금 당장은 사용하시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몬스터를 잡고 성장해 언젠가 S급 플레이어가 된다면. 그때는 사용하실 수 있으시겠죠.”
제이다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사실 제이다는 루크에게 김진석의 감시를 부탁받았다. 하지만 절름발이인 그녀가 실질적으로 최상위 S급 플레이어의 감시를 한다는 것이 불가능했으나 그녀는 그 부탁을 받았다.
비서나 다름없는 위치였지만 그녀는 아직 플레이어의 삶에 미련을 못 버렸고 어쩌면 그 최상위 S급 플레이어에게 어떤 콩고물이 떨어질까 싶어 부탁을 받은 것이다.
물론 그 사실은 김진석도 알고 있었지만 제이다에게 처음부터 발을 고쳐주었다. 물론 입막음 용도였지만 따로 그녀에게 족쇄를 채운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70억이 넘는 방어구와 그 본인이 사용했던 가치를 알 수 없을 활까지.
“…감사합니다.”
제이다는 어쩌면 처음으로 김진석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건틀렛도 하나 주세요. 루크 씨도 나 때문에 고생했으니 하나 사주지 뭐. 공격력이 부족한 것 같던데 이 갑옷과 비슷한 수준으로 하나 골라주세요.”
“네. 잠시만요.”
신시아는 초대형 VIP를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
“저는요?”
“…네가 사용할 만한 게 있어?”
뒤에서 괜히 부럽다는 식으로 제이다를 바라보고 있는 넬을 보고 김진석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여기선 딱히?”
“…알았어. 나중에 사줄게.”
그제야 넬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고 김진석은 그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