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넬이 한빈혁 디렉터를 둘러보고 있을 때 마찬가지로 주변에서 벌벌 떨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김진석은 언제나 플레이어들 앞에 나서서 말하는 한빈혁 디렉터만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 주변에 있는 이들도 로스트 월드의 개발자들이었다.
즉 넬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너뿐만 아니라 모든 악마의 아버지 같은 존재야. 그러니 괜한 짓 하지 말고 돌아와.”
“흠~”
끝까지 넬은 한빈혁 디렉터를 쳐다보다가 흥미를 잃은 듯 뒤로 돌아 김진석의 뒤편에 섰다.
“바포메트에게만 걸리지 마.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니깐.”
“…그도 지금 지구에 있습니까?”
넬의 말에 한빈혁 디렉터는 현기증이 올 것 같았다.
바포메트는 한낱 인간이 자신의 아버지 격인 존재라는 것에 흥미를 가질 게 분명했다. 들키면 꼼짝없이 큐브 속에 갇힐 것이다.
“미리 말해두는 게 좋을까, 아니면 숨길까.”
“솔직히 인간이 우리 아버지라는 걸 누가 믿겠어요? 그냥 내버려 둬요. 저렇게 심약한 인간이…….”
김진석은 말을 가리라는 뜻으로 넬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한빈혁 디렉터와 그의 동료들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플레이어와 몬스터. 그것도 로스트 월드에서 최종 보스 격인 레이드 보스 몬스터들인 악마들과 너무나도 친하게 지내는 저 모습은 도대체 무엇인가.
“도대체 무슨 일을 겪으신 겁니까? 플레이어들은 게임 속에서 튜토리얼만 진행하고 나오는 거 아니었습니까?”
“MMORPG의 튜토리얼은 조금 다른 듯해서 말이죠.”
“아…….”
김진석의 말에 한빈혁 디렉터는 물론이고 주변 그의 동료들의 탄식까지 들려왔다. 그들 모두가 자신이 만든 로스트 월드를 한 사람이었고 게임에 관심이 있는 자들이었으니 김진석의 말을 모를 리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아뇨. 나름대로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적어도 그에게는 나쁘지 않았다.
김진석은 한빈혁 디렉터에게서 시선을 떼고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포탈을 타고 넘어온 곳은 건물 안이었고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적어도 한국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영어 간판이 즐비했으니 당연했다. 그리고 꽤나 높은 건물인지 다른 건물들이 한참 아래에 있었다.
풍경에서 시선을 벗어나 한빈혁 디렉터의 동료들에게 시선을 옮겨 그들을 감정하다가 특이한 이를 발견했다.
[신시아 LV:15]
게임 개발자 중에 플레이어가 있었고 그녀가 했던 게임은 김진석은 처음 듣는 이름의 게임이었지만 그 이름만 봐도 그녀의 능력이 뭔지 알 것만 같았다.
[신비한 상인.]
“굳이 금화를 취급하는 이유가 그쪽 때문입니까?”
“…네?”
김진석이 콕 집어 말한 여성. 신시아는 깜짝 놀랐다.
“그걸 어떻게…….”
물론 굳이 그 말에 대답해주진 않았다.
간신히 진정된 한빈혁 디렉터는 고개를 젓고 김진석을 보며 원래의 용건을 말했다.
“인벤토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금화를 얼마나 가지고 계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김진석은 금화를 하나하나 꺼내지 않고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수표로 변환해 한빈혁 디렉터에게 건네주었다.
“10만 금화 수표입니다. 이 정도면 뭘 만들 수 있죠?”
비록 게임에서는 그리 많은 금화는 아니었지만 현실로 나온 지금에서 10만 금화는 전 세계를 뒤져도 김진석밖에 지니고 있지 않겠지.
“…신시아 씨?”
“아… 네 잠시만요?”
10만 금화. 사실 루크가 한빈혁 디렉터에게 말했을 땐 셀 수 없을 수준의 많은 금화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로스트 월드에 들어갔다 나온 최상위 S급 플레이어라면 수백 수천 개의 금화를 가지고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그 예상을 가볍게 부숴버렸다.
한빈혁 디렉트는 말을 잃은 채 신시아를 불렀고 그녀는 금화를 손에 잡고 허공에 무언가 손짓하며 둘러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한 게임. 신비한 상인은 말 그대로 플레이어가 신비한 상인으로서 여러 NPC들에게 아이템을 파는 게임이었다.
특이하게도 수많은 NPC가 존재했으며 온갖 이상한 종족부터 괴물들까지. 여러 대상에게 아이템을 파는 게임이었다.
당연히 많은 NPC가 존재하는 만큼 그들은 많은 걸 요구했다. 하지만 신비한 상인이 된 플레이어는 신에게 선택받은 존재였으며 플레이어는 신에게 그들이 원하는 아이템을 받는다.
상인이기에 그들이 주는 재화를 받았는데 신비한 상인은 그걸 다시 신에게 팔아 적정 가격을 받아낸 다음 다시 그들이 원하는 물건을 사 마진을 내는 게임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로스트 월드에서의 10만 금화는 신에게서 어떤 물건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인가.
“…취급할 수 있는 모든 아이템을 사고도 남겠는데요? 제가 아직 등급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은데…….”
신비한 상인 또한 게임인 만큼 성장하는 재미가 있었지만 아직 그녀의 등급은 부족했다. 지구에 있는 그 어떤 물건도 팔면 값어치를 하지만 게임 속에서 나온 아이템은 그 값어치가 차원이 달랐다.
고작 로스트 월드의 금화 하나만으로 같은 무게인 다이아몬드보다 비싸게 쳐주었으니. 그들이 게임 속 물건을 찾는 건 당연했다.
아쉽게도 그녀가 뭘 살 수 있는지는 김진석이 볼 수 없었다.
“뭐가 있는지 알려주시죠.”
“…너무나 많아서 그냥 뭘 원하시는지가 더 중요할 것 같네요.”
그렇게 말하는 신시아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니 오히려 김진석은 대답하기 어려웠다. 그저 로스트 월드의 아이템이 있거나 자신에게 쓸만한 것이 있으면 집어가려고 했는데 원하는 아이템을 그 앞에서 사는 방식이라니.
“예를 들어 뭐… 검이라거나 방패라거나. 소재도 가능합니다. 만약 소재를 고르신다면 저기 이현 씨가 가공해줄 겁니다. 물론 결과물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한빈혁 디렉터의 말을 듣고 김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대검. 적어도 도신은 2M 이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단검은 최소 2개 이상으로. 둘 다 최대한 단단했으면 좋겠습니다.”
김진석의 말에 신시아는 허공에 손짓하며 뭔가를 넘기면서 뭔가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선택했다.
그와 동시에 신시아의 앞에서 대검이면서도 양날 검이 아닌 외날 검인 기이한 은색 대검에 무슨 귀족들이 사용할 법한 단검 주제에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단검까지.
[성기사단의 대검]
성기사단의 단장이 사용한 대검. 은으로 만들어 부정적인 기운을 가진 상대에게 매우 효과적이다.
[세이버 대거]
겉으로는 귀족이 사용할 법한 대거. 실제로 귀족에게 진상되는 대거였지만 실질적으로 사용된 적은 매우 적다. 귀족에게 진상하는 만큼 날카롭지만 내구성이 떨어진다.
대검과 단검은 맞았다. 하지만 둘 다 내구성이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성기사단의 대검은 은제로 만들어 가볍긴 했지만 단단하지 못했고 세이버 대거는 설명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둘 다 물건에 하자가 있는 것 같은데.”
“…대단하시네요. 그걸 보자마자 어떻게 아시지? 걱정하지 마세요. 이현 씨가 보완해줄 거예요.”
[이현 LV:15]
또 다른 게임 개발자. 그는 전설의 대장장이라는 게임 속 세계에 들어갔었다. 이름에서 알다시피 플레이어가 대장장이가 되는 게임.
신시아가 아이템을 구매하자 이현이란 자가 앞으로 나와 품에서 웬 대장장이가 두드릴만한 망치를 꺼냈다.
갑자기 그 망치에서 푸른빛이 돌더니 이현은 그 망치를 들고 세이버 대거와 성기사단의 대검을 살짝 툭 쳤다.
[강화된 성기사단의 대검]
[강화된 세이버 대거]
그의 능력인 것 같았다. 설명을 보니 이 무기만을 강화하는 게 아닌 소재 자체를 강화시킨 것 같았다.
만약 소재를 말해 그에게 맡겼다면 더 좋은 아이템이 나왔을까.
“금화는 몇 개 남았죠?”
“대검은 40개. 대거는 개당 30개. 고작 100개밖에 안 썼어요. 아니… 원래 고작이 아닌데…….”
눈앞의 10만 개의 금화가 있는 것을 보고 금전 감각이 이상해진 신시아였다.
김진석은 먼저 대검을 손에 들었다. 너무나도 가벼웠다. 공격력이 나와 있지 않아 정확한 건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5티어 이상이 사용할만한 무기였다.
단검도 마찬가지. 50레벨 이상이 사용할법한 무기였지만 김진석에겐 너무나도 부족했다.
“등급을 높이는 방법은 뭐죠?”
“기부하면 돼요. 일정 이상 돈을 기부하면 알아서 등급이 올라요. 그런데 특이하게도 지구에 있었던 물건으로는 기부가 안 되더라고요. 뭔가 제한이 있나 봐요. 게임에선 그런 게 없었는데.”
신시아는 처진 눈에 안경을 낀 얌전한 성격을 가진 여성과 같이 보였는데 그녀의 목소리 톤이 한껏 올라가 있었다.
물론 값어치만 따지면 다이아 수만 개의 값어치를 손에 들고 있었으니 아무리 얌전한 사람이라도 기분이 올라갈 수밖에.
“이게 지금 가지고 있던 대검과 단검 중 가장 좋은 건가요?”
“가장 좋은 건 아니지만… 기준이 이상해서 제가 직접 선별한 거예요. 최상품은 아닐지언정 괜찮은 물건들인데… 별론가요?”
신시아는 괜히 김진석의 눈치를 보게 됐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그 뒤에 넬의 존재. 물론 겉모습만 같을 수 있겠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녀는 이젠 숨기지 않고 대놓고 날개를 드러내고 있었으며 재밌다는 듯이 한빈혁 디렉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메인 디렉터이긴 했지만 진짜 넬을 디자인한 자는 따로 있었다. 하지만 당연히 자기가 직접 만든 넬이니 얼마나 가학적인 성향을 가졌는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었으니 그는 절대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이 정도 물품은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워요. 게다가 강화까지 되었으니…….”
제이다도 신시아의 말에 동의했지만 김진석의 무력을 알고 있는 그녀는 당연히 김진석이 이 물건에 성에 안 찰 걸 알고 있었다.
“금화 100개는 금전적 가치가 얼마나 합니까?”
“부르는 게 값이긴 한데… 보통 개당 100에서 120 사이 정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대량으로 나와서 그런 듯합니다.”
물론 단위는 만원이었다.
김진석 또한 제이다의 말에 금전적 가치가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평생 100만 원을 가져본 적도 손에 꼽을 수준인데 금화가 개당 최소 100만 원이란다.
최소 가격으로만 처도 김진석은 지금 조를 넘게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금전 감각이 이상해지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고작, 이게 1억이 넘는다고?”
“고작은 아닌데…….”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반문하는 신시아였지만 물론 김진석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0~15가 D등급 플레이어. 15~30레벨이 C등급 플레이어. 이렇게 대충 15레벨로 등급이 나뉘고 있는 것 같았다.
기준도 다르긴 했지만 어쨌든 5티어 아이템은 A급 플레이어가 사용할만한 아이템인데 그게 1억이라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걸 수도 있었다.
“애초에 이 무기 수준이면 돈보다 구하는 게 더 어렵습니다. 몇억을 불러서라도 가져올 플레이어는 많을걸요? 김진석 님이 이상한 거예요.”
애초에 A급 플레이어 수준이 되면 몇억 정도는 금방 벌 수 있다. 제이다는 김진석처럼 맨손으로 다니는 신체 능력 플레이어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대검하고 단검은 신기한 조합이네요?”
“사용할 줄 아는 게 그 두 개와 활뿐이라.”
제이다는 그러고 보니 김진석이 활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잘 사용하지 않다 보니 잊고 있었다.
“활은 필요 없으세요? 활도 품목에 있는데…….”
“괜찮습니다. 이게 있거든요.”
김진석은 신시아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자신에게 귀속된 무기. 고요한 카인의 활을 꺼내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