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최초 플레이어-124화 (124/201)

124화

멀린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레벨은 쓸데없지 않았다. 최상위 S급 플레이어가 고작 레벨 70인 마당에 레벨 80의 대마법사 멀린은 쓸데가 많겠지.

대마법사인 만큼 온갖 마법을 사용하는 데다가 미래까지 볼 수 있었다.

“그 아서왕이 과연 이걸 바라고 있는지 모르겠군.”

김진석은 일부로 멀린을 몰아치고 있었다. 레벨 70 수준은 무더기로 달려들어도 김진석이 이길 수 있을 자신이 있었지만 80은 다르다.

레이드 몬스터도 레벨 80부터 시작됐기에 저 레벨이 진짜 80레벨인지 알 수가 없었다.

즉 80레벨 이상부터는 쓸만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번지수를 잘못 찾았어. 너희들을 구하고 너희들의 주인을 죽이는 건 너희들의 몫이야. 아서왕도 마찬가지. 내가 아니라 모르간과 가웨인에게 부탁해라. 모든 선택은 둘의 몫이니.”

김진석은 그저 둘의 등을 떠밀었을 뿐. 선택은 그들의 몫이다. 그대로 도망가 살지. 아니면 자신과 같은 처지인 이들을 구할지.

“단 그때는 모든 사실을 그들에게 고할 것. 벌써 세 번 말하는 거지만 마지막으로 말하지. 같잖은 수작 부리지 말고 진심을 다해라.”

그렇게 말하며 김진석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자는 노인. 여경래를 깨웠다.

“…깜빡 잠이 들었나?”

“여경래 할아버지. 맞습니까?”

멀린은 이름을 알고 있는 김진석을 보고 이젠 놀랄 힘도 없었다.

“당신은……?”

“할아버지 암살 대상이죠.”

김진석의 말과 주변을 둘러보고 여경래는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일은 김진석도 예상하지 못했다.

“멀린은 아무 잘못 없습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암살 의뢰를 받아들인 것도 제 독단입니다.”

어눌한 한국말로 여경래는 김진석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멀린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노인으로 보이는 자가 젊은 김진석에게 애원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좋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죽으면 저자도 죽을 텐데 결국엔 똑같을 텐데요.”

“…적어도 고통은 없을 테니.”

김진석은 여경래의 말에 한숨이 나왔다.

“세상은 불공평하군. 가웨인과 모르간은 그런 주인을 만났는데 정작 그쪽은 이런 주인을 만나다니.”

“…….”

굳이 말하진 않았지만 멀린은 생각이 많았는지 고개를 숙였다.

“할아버지가 죽으면 손녀는요.”

“…제가 죽으면 손녀에게 제 유산을 비롯해 중국 측에서 보상을 해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과연 그럴까.

물론 플레이어가 살아있을 땐 가족에게 잘 대해주었겠지만 죽었을 때는… 굳이? 그것도 무정부 상태인 중국에서?

“어차피 중국은 지금 할아버지 손녀에게 신경 쓸 틈이 없을 겁니다.”

한국에서 중국까지 가는 데 오래 걸리지도 않을 테고 가웨인과 모르간은 중국에 가자마자 곧바로 행동을 시작했을 테니깐.

아무것도 모르는 여경래는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멀린의 옆으로 가 절하듯 고개를 숙이며 땅바닥에 몸을 댔다.

하지만 거기서 뭔가 더 말하기 전에 김진석은 둘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나가세요. 그리고 중국으로 돌아가서 선택하세요.”

“…뭘 선택하라는 말씀을…….”

“가면 알게 되니 가세요.”

그 말과 끝으로 멀린과 여경래. 둘은 어느새 별장 밖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어디서 저런 괴물들이…….”

둘의 말이 갈렸다.

“멀린.”

“…미안하군. 내가 약했기에…….”

“아니. 차라리 잘된 일이야. 아무리 내 손녀를 낫게 할 엘릭서를 준다고 했지만 암살 같은 의뢰를 받아들인 내 잘못이다.”

둘은 마치 친구처럼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여경래의 손녀. 그녀는 게임 속 세계에서의 트라우마 때문에 중국의 한 정신병원에 있었다. 무슨 일인지 만나려고 할 때마다 잠을 자고 있었지만 그녀의 안색만 봐도 전혀 좋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정말 이 세계에 엘릭서가 있는 게 맞나? 우리 세계에서도 그건…….”

“실제로 있다네. 그게 내 손녀의 정신병을 낫게 할지는 모르겠다만… 시도는 해봐야지.”

멀린은 아예 엘릭서의 존재를 의심하고 있었다. 죽은 자를 제외하고 모든 상처를 낫게 하는 약이라니. 너무나 형편 좋은 소리 아닌가.

“돌아가자. 손녀가 있는 곳으로.”

* * *

멀린과 여경래. 둘이 돌아간 다음 날.

“손님이 많네요?”

“…혹시 뭐 결계 같은 거 만들 수 있나?”

“사람이 오자마자 그게 무슨 소립니까…….”

루크가 김진석을 찾아왔다. 당연히 그가 찾아온 이유는 하나였다.

“직접 만나보고 싶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만나보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로스트 월드 속 물건을 취급하는 기업. 그 기업에서 연락이 왔다는 거다. 김진석과 같은 물건을 대량 취급하는 자는 VIP 수준이긴 했다.

하지만 50만 개의 금화라니. 그게 사실인지. 최상위 S급 플레이어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지만 확실한 게 좋았으니 그 기업이 직접 김진석을 찾아온 것이다.

“한국까지 직접 찾아온 건가요?”

“네. 지금 곧바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1시간 후면 한국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약속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만나고 싶다고 외국에서 비행기까지 타고 한국에 왔다는데 거절할 것까지는 없었다.

“그런데 굳이 직접 찾아올 이유가 있나요?”

“예? 아까 만나고 싶다고…….”

“아뇨. 당신이요.”

“…제이다 플레이어는 바쁘다 그러고 김진석 씨의 핸드폰 번호도 모르는데요.”

그제야 김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걸 제이다에게 일임한 김진석이었으니 제이다가 없으면 그에게 연락할 수단이 없었다.

루크에게 신형 스마트 폰도 받았지만 누구에게 연락받을 일이 없었으니 잘 사용하지 않았다.

“부 길드장은 자기 길드원 번호도 다 가지고 있나?”

“가지고 있진 않지만 따로 적혀있긴 하죠.”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번호를 알려주었다.

* * *

“반갑습니다. 김진석 플레이어. 딜런이라고 합니다.”

[딜런 LV:40]

완벽한 한국말을 고사하는. 자신을 딜런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플레이어인 듯했다.

짧은 금발과 안경을 착용하고 몸은 호리호리했지만 플레이어답게 얇은 근육이 옷 밖으로도 보였다.

하지만 김진석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레어마켓의 관계자라고 하지 않았나?”

레어마켓. 로스트 월드의 물건을 집중적으로 취급하긴 하지만 게임 속 물건을 전부 사들이는, 아이템을 만드는 기업 중 가장 큰 기업이었다.

로스트 월드가 한국 게임이라 그가 한국어를 할 줄 아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감정이 보여준 그의 상태창에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게임이 있었다.

“…어떻게 아셨죠? 전 그저 김진석 플레이어. 그쪽을 데리러 오라는 말을 받았을 뿐입니다.”

워프. 그가 한 게임은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주황색 포탈과 파란색 포탈을 만들어 물체는 물론이고 자신의 몸마저도 한쪽 포탈로 들어가면 한쪽 포탈로 나오는 게임이었다.

물론 몬스터가 나오지 않고 평범한 퍼즐 게임이었지만 현실에 와서 그 능력은 무궁무진했다.

그는 품에서 이상한 기계장치를 꺼내더니 손에 집어넣고 사용했다.

“이 포탈 안으로 들어가시면 김진석 플레이어.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람 하나. 김진석에게는 조금 비좁아 보이지만 몸을 낮추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조그마한 포탈이 생겨났다.

“여권 같은 건 필요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딜런의 말은 김진석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눈은 오로지 딜런의 손에 들려있는 포탈을 만드는 이상한 기계장치에 꽂혀있었다.

“그 기계장치를 부수면 그쪽은 어떻게 됩니까?”

“…일주일 정도 지나면 제 손에 장착된 채 복구됩니다.”

“아무나 그 기계장치를 사용할 수 있는 겁니까?”

“아뇨. 저만 가능합니다. 아. 같은 게임 속 세계로 들어간 플레이어라면 사용이 가능할 거란 의견도 있더군요. 확인해보진 않았습니다.”

정작 포탈엔 들어가지 않고 딜런과 대화를 나누는 김진석을 보고 얌전히 지켜보고 있던 제이다는 고개를 저었다.

루크는 서울 봉쇄지역 토벌 작전을 신경 쓰느라 바빴으니 김진석에게 얘기만 건네주고 곧바로 집을 떠났다.

그 와중에도 루크는 자신이 할 일을 제이다에게 모두 알려주었다.

“기다리고 계신 것 같은데 이제, 그만 들어가시죠.”

“아.”

보다 못한 제이다가 알려주었고 그제야 김진석은 포탈 속 너머로 보이는 누군가가 보였다. 아마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자였을 테니 뭔가 미안했다.

“가시죠.”

포탈 너머로 흐릿하게 보였던 그자는 포탈을 넘어가니 보이는 평범하게 생긴 남자는 김진석이 로스트 월드로 들어가기 전부터 유명했던 자였다.

정확히는 로스트 월드를 즐긴 플레이어들에게만.

“반갑습니다. 한빈혁 디렉터입니다. 알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로스트 월드를 했던 자라면 모를 리가 없습니다. 반갑습니다. 플레이어 김진석이라고 합니다.”

옆에 있던 넬과 제이다마저도 김진석의 깍듯한 모습에 깜짝 놀랐다. 물론 고개를 숙이거나 한 건 아니지만 먼저 악수를 내민 적은 처음이었다.

한빅혁 디렉터. 로스트 월드의 메인 감독이었다.

한국의 게임 산업이 그 때문에 바뀌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플레이어들과 소통도 잘하고 플레이어 친화적인 디렉터였다.

김진석은 본능적으로 감정을 사용했지만 그에게서 보이는 건 없었다. 즉 그는 일반인이란 소리였다.

“꽤나 수척해지셨네요.”

원래도 마른 편이었지만 지금은 거짓말 보태서 뼈가 보일 수준이었다.

“…욕을 좀 많이 먹어서 말이죠.”

하하 웃으며 말하는 한빈혁 디렉터였다.

사실 지구가 이렇게 변한 후 가장 많이 변화한 것이 게임 산업이었다. 최소 게임 속 세계를 갔다 온 플레이어들은 게임사에게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플레이어 본인들도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게임사들이 낸 차선책이 바로 자기들이 가장 잘 아는 게임 속 물건을 현실에서도 구현하는 것.

한빈혁 디렉터. 그가 한국인이면서 한국에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로스트 월드로 들어가서 멀쩡히 나온 플레이어가 드물다 보니 정신병원에 있는 플레이어의 가족들이 그에게 온갖 욕을 퍼부은 것이다.

일반인인 그는 그런 욕을 견디기가 어려웠고 결국 한국에서 도피하게 된 것이다.

“게임을 만드는 것도 힘든 일인데 그게 현실이 될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습니다.”

그 누가 상상했겠는가. 게임이 현실이 되리라고.

한빈혁 디렉터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도 김진석을 초대하는데 많은 고민을 했다. 진작에 초대해도 되는 마당에 루크랑만 대화를 했었으니깐.

당연했다. 자신이 만든 게임 속 세계에서 몇 번을 죽었을지도 모르는 자. 그에게서 무슨 원망의 소리가 나올지 몰랐으니깐.

하지만 김진석이 먼저 내민 손에 그는 안도감의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고생 많으셨겠군요.”

“…그렇죠. 그런데… 옆에 여성은… 제가 생각하는 그녀가 맞습니까?”

한빈혁 디렉터는 긴장감이 풀리자 그제야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그런데 김진석의 옆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인물이 있었다.

김진석은 그의 눈을 따라가고 이내 넬을 바라보자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넬은 그런 김진석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넬. 인사해. 어쩌면 네 아버지 같은 존재야.”

“이 인간이요? 흠…….”

넬이 다가오자 한빈혁 디렉터는 또다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쩌면 김진석을 포함해서도 전 세계에서 넬의 무력을 가장 잘 아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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